2015년 6월 7일 일요일

손사막(孙思邈)의 일상생활

손사막(孙思邈)의  일상생활


손사막(孙思邈)이 섭취한 음식물은 비교적 간단하였으며 조반은 죽(粥)을 주로 먹었다. 오반(午饭)과 만반(晚饭) 역시 소량의 음식물을 섭취하였다. 채소 중 손사막(孙思邈)은 만청(蔓菁:순무)을 잘게 썰어서 먹거나 가루내어 먹었다. 모춘(暮春:늦은봄) 이전에  손사막은  상육묘(商陆苗 : 상육의 어린잎과 줄기)를 삶아서 나물로 무쳐서 먹거나 볶아 먹거나 가루내어 먹었다. 순무는 쌍떡잎식물 양귀비목 겨자과의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로 중국에서 처음 우리나라에 도래되었다. 순무는 봄에 노란 꽃이 총상(總狀) 꽃차례로 피고 뿌리와 잎에 많은 비타민을 함유한 채소이다. 잎은 긴 타원형이며, 품종에 따라 바소꼴, 무잎 모양의 깃꼴의 모양이 있다. 뿌리의 크기나 모양 또한 품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팽이 모양의 둥근형이다. 그냥 무와 확연히 다른 점은 뿌리의 색인데, 색이 그냥 무와 달리 자줏빛을 띄고 있다. 맛은 매콤한듯하나 고소하며 겨자향의 인삼맛이 난다. 순무는 무를 재배하는 방법으로 재배하면 되지만 늦여름에 파종하고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수확하는 것이 많다.

 

손사막은 불교사상(佛教思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손사막(孙思邈)은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살생(杀生)은 일종의 죄악이다고 여기고 고기를 먹는 것은 일종의 살상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손사막은 변질(变质)된 음식과 변미(变味)한 음식은 섭취하지 않았으며 생냉식(生冷食)을 하지 않았다.   

 

또 손사막(孙思邈)은 인삼(人参)과 복령(茯苓)과 감초(甘草) 등을 컵속에 집어넣고 끓는 물을 부어 우려서 차(茶) 대신 마셨다.   손사막은 순면(纯棉)을 원료(原料)로 만든 헐렁한 의복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손사막(孙思邈)은 매일 목욕을 하여 몸은 항상 정결하게 유지하였다. 

손사막은 청심과욕(清心寡欲)을 가훈으로 삼았으며 집안 식구들에게 모든 집안일에 관하여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  손사막(孙思邈)의 만년생활(晚年生活)의 규율(规律)은 매우 엄격했다.

  손사막의 집 울안에 여러채의 크고 작은 초가집이 있었다. 초가집의 한가운데 방이 3 칸있는 기와집이 한 채 있었는데 손사막이 주로 사용하는 정옥(正屋)이었으며 그 중 한 칸의 방은 손사막(孙思邈)의 침실(寝室)이었으며 닭장이 바로 옆에 있었으므로 새벽에 수탉들의 울음소리는 기상을 알리는 자명종 시계나 마찬가지였다. 손사막이 살던 시절에는 시계가 없었다. 손사막은 새벽에 기상과 동시에 의복을 갈아 입침상 위에 앉아서 묵상한 후  기공(气功)을 수련(修炼)하고 吸纳 천지(天地)의 영기(灵气)를 들이마셨다.

  기공 수련을 마친 후  세수를 한 후 洗漱 조반(早饭)을 취했다.

  손사막은 조반후(早饭后)  두 손바닥에서 열이 날 때 까지 문질러 소화를 돕기 위하여 배를 쓸어주었다. 그리고나서  집안팎으로 일백보를 걸었다.

  산보(散步)를 마친 후  정옥(正屋)으로 부터 20여 미터 뒷쪽에 떨어져 있는 작은 초가집 안으로 들어가서 향(香) 불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서 불경을 암송하면서 심중(心中)에 있는 모든 잡념(杂念)을 제거시켰다. 그리고 나서 다시 정원을 한 바퀴 돌거나 천천히 산보하며 등산을 하였다.

  오반후(午饭后)에도 두 손바닥에서 열이 날 때 까지 비빈 후 소화를 돕기 위하여 복부(腹部) 마사지를 실시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100 보 내지 200 보(步)를 걸었다.

 

  만반후(晚饭后)에도 오반후나 마찬가지 동작을 실시해 주었으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공(气功) 수련을 실시해 주었다.

 

 손사막(孙思邈)130여 세 될 때 까지 매일 산보(散步)를 즐겼다.

 

  정옥(正屋)으로 부터 10 여 미터 떨어진 동쪽편에  3 간(间)의 초가집이 있었는데 그곳에 손사막의 부엌이 있었다. 손사막(孙思邈)130세 이후에도  날씨가 청명(晴朗) 할 경우 몇 백보(百步)를 걸어서  등산을 했는데 어느때는 1km 혹은 2km 를 등산했으며 그 이상은 절대로 초과하지 않했다왜냐하면   빨리 걷거나 더 멀리 걷거나 힘에 겨울 경우  핍력()과 기천(气喘) 등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손사막의 집은 동향(東向)이었으며 동쪽을 향한 큰집 한 채가 있었고 뒷쪽에 두 개의 작은채가 있었다. 한 채는 약방(药房)으로 사용했고 또 한 채는 약기방(药器房)으로 사용했다. 또 큰채의 서북쪽에  2 개의 방이 있었는데 한 칸은  부엌으로 사용했고 또 한 칸은 약물을 말리는  장소로 사용했다.


손사막은 친구들과 만나서 담소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친구들과 고별인사를 할 때 손사막은 친구들의 손을 붙잡고  문빢으로 나아가 100 보(百步)를 함께 걸어가며 배웅해 주고 작별인사를 했으며 친구들의 모습이 사라져서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바라보고 길가에 앉아 있었다.

 

손사막(孙思邈)은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 고함도 지르지 않았으며 절대로 화를 내지 않았다.  손사막은 고단하고 적막한(寂寞)한 생활을 했으며 많은 시간을 독서명상에 소모했다.

 

손사막(孙思邈)은 항상 의서(医书) 뿐만 아니라 주역(周易)《노자(老子)장자(庄子)를 탐독하였다.

 

손사막(孙思邈)은 장수인(长寿人),으로써 매우 희귀한 인물이었다.  

그당시 백성들은 손사막을 존경하고 흠모하였으며 복(福)과 수(寿)를 모두 함께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손사막(孙思邈)의 종교사상(宗教思想)은 비교적 엄중했으며 불교(佛教)는 선(善)한 일을 하게해 주고 ,积有 음덕(阴德)을 베풀게 해주며 就会有 선보(善报)를 누리게 해주는 종교이므로 신봉한다고 말했다.

 

손사막(孙思邈)무수히 많은 병자들을 고통 속에서 해방시켜 줌으로써 행복(幸福)의 근본원인(根本原因)을 삼았으며 복록론(福禄论)을 저술했는데  이 책 속에서 손사막은 복(福)과 수(寿)를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답변을 해주고 있다.

 

당(唐) 나라 고종(高宗) 영순(永淳) 원년(元年:서기 682 )에 손사막(孙思邈)은  141 세의 고수(高寿)를 누리고 영면하였다. 손사막은  자신의 천년(天年)이 당도했음을 스스로 예감(预感) 한 후 집안식구들을 불러모아 놓고 유언을 하고나서 두 눈을 영원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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