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31일 월요일

토방치료법(土方治療法)

토방치료법(土方治療法)

우리들의 조상들은 자식들이 아플 때 어떻게 치료했는가? 아주 간단하면서도 안전한 치료방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강총보죽을 먹여 주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며 손가락 끝에서 사혈시켜 질병을 치료했다. 이와같은 치료법은 몇 천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치료방법이었다.

할아버지 대()에서 부모님 대() 로 내려오면서 병에 걸리면 침이나 한약을 복용하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인식했었다. 그래서 세대차이 때문에 질병치료 의견의 충돌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비를 맞고 옷이 흠뻑 젖은 채 집안으로 들어오는 손자들에게 할머니는 즉시 따뜻한 생강차를 한 컵 마시라고 권한다. 이것이 바로 전통 한의학이다.

감기가 들어 으슬 으슬 춥고 몸에 열이 날려고 할 때 할머니는 따뜻한 아랫목에 손자들을 눕혀놓고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며 땀을 내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시키는대로 하고 나면 그 이튿 날 몸이 거뜬해 진다. 이것이 바로 한의학이다.

감기가 들면 밥맛이 없어지기 쉽다. 이때 할머니는 하얀 쌀죽을 끓여 숟가락 끝에 간장을 조금 만 묻혀 쌀죽을 먹여 주었다. 이것이 바로 한의학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한의사나 다름 없었다.

한의학의 정도(正道)란 무었인가? 누구든지 의술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쉽게 사용 할수 있어야 하며 실제로 일상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내용이 간단명료하여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알기쉬워야 한다.

한의학에서 음양(陰陽)을 강의한다. 사람이 낮에 일하는 것은 양()이고 밤에 잠을 자는 것은 음()이다. 또 한의학에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음양의 평형(平衡)을 유지해야 된다고 강의한다.

음양(陰陽)의 평형(平衡)이란?

매일 밤에는 잠을 잘 자야하고 낮에는 일을 잘해야 되며 음식물을 잘 섭취해야 됨과 동시에 대소변이 창통되어야 만 음양(陰陽)의 평형(平衡)이 이루어져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아주 간단한 음양평형(陰陽平衡)의 이론이다.

한의학의 원리는 간단하다.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토방법(土方法) 속에 한의학의 심오한 도리가 숨어있다. 이러한 토방법 만 잘 터득하고 이용해도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끓여주는 한 사발의 강초보죽(姜蔥)은 약방에 가서 비싸게 돈을 지불하고 지어 온 감기약 보다 훨씬 효과가 있다.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토방치료법(土方治療法)이야 말로 질병 치료의 정도(正道)임과 동시에 진정한 한의학이다.  


풍한(風寒)감기

풍한(風寒)감기

감기에 걸리면 가까운 친구들이 판란근(板藍根)을 먹어 보라고 말하거나 금은화(金銀花)를 먹어 보라고 말하며 냉차(冷茶)를 마셔 보라고 권유한다.

요즘 같이 날씨가 추운 겨울철에 몸을 차게하여 걸리는 감기는 10 8,9 는 풍한감기이다. 풍한감기는 일반적으로 휴식을 충분히 취하지 못하여 면역기능이 약해졌거나 신체가 허약하다거나 의복을 너무 얇게 입고 외출하였거나 땀을 흘리고 난 후 갑자기 찬 바람을 쐬었거나 몸을 한기(寒氣)에 노출 시켰기 때문에 걸린다.

한의학에서는 감기를 풍한감기와 풍열감기로 구분하여 치료한다. 보통 사람들은 풍한감기와 풍열감기의 구분에 관하여 애매모호할 때가 많다. 밤에 잠을 잘 때도 이불을 걷어차고 자면 풍한감기에 걸리기 쉽다. 특히 가을철과 겨울철에 풍한감기에 걸리기 쉬우며 풍한감기는 태양경증(太陽經證)이다. 즉 태양경이 제일 먼저 외사의 침입을 받는다.

풍한감기의 특징은 뒷통수에 통증이 있으며 목덜미를 움직이기 불편해 진다. 바람을 싫어하고 추위를 싫어하며 두터운 의복을 입고 싶은 생각이 들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맑고 하얀색이거나 약간 노란색을 띤 콧물이 흐른다. 코가 막혔을 때 뜨거운 물이나 뜨거운 차를 마실 경우 코가 뚫린다. 이런 경우는 대개 풍한감기이다.

혀에는 태()가 없거나 약간의 백태(白苔)가 끼어 있다. 몸에 열이 있는듯 하나 땀은 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의 땀도 난다. ()은 부완맥(浮緩脈)이다.

풍한감기의 치료의 관건은 땀을 내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신온해표(辛溫解表)라고 칭한다. 신온해표의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다.

사우나를 해도 땀이나고 뜨거운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열수포각(熱水泡脚)도 몸에서 땀을 나게 해준다. 이때 뜨거운 물 속에 소주를 약간 섞으면 더욱 좋다.

젊은이들은 농구를 해도 땀이나고 털모자를 쓰고 두꺼운 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따뜻한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어도 땀을 낼수 있으며 신선한 생강에 황설탕을 타서 마셔도 땀이 난다.

또 신선한 생강과 파의 하얀 부분을 섞어 쌀죽을 끓여 먹어도 땀이 나고 고추가루를 많이 타서 매웁게 만든 음식을 먹어도 땀을 낼수 있다.

한의(漢醫)에서는 장중경(張仲景 : 서기 150 서기 219 )이 대략 서기 205 년에 저술한 상한론(傷寒論)에 기록되어 있는 계지탕(桂枝湯)을 풍한감기의 치료에 사용한다.

계지탕의 조방(組方)은 다음과 같다.

계지 9g, 작약 9g, 감초 6g, 생강3(), 대추 4, 6

계지탕은 간단한 조방이면서 값도 저렴하다. 1700여 년이나 된 고방(古方)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2011년 1월 30일 일요일

어린이 감기 치료

어린이 감기 치료

아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치료되지 않으니 어쩐일 입니까? 감기가 혹시 폐염으로 발전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는 어머니들이 많이 있다. 감기는 제대로 치료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후유증이 심하다.

어린 아이들의 감기는 특징이 있다. 어제 까지 잘 놀던 아이가 밤새 열이나고 땀이 약간 나거나 땀이 전혀없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에겐 돌발적으로 감기가 발생한다.

간단한 처방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린 아이들의 엄지 손가가락 만한 사이즈의 신선한 생강을 잘게 썰어서 파의 하얀 부분 1 개 내지 3 개를 쌀죽 속에 넣어 끓여서 죽을 먹이던가 아니면 죽의 국물만 먹여도 병정이 완화된다.

둘째 신선한 생강을 끌인 물이 따뜻할 때 그물로 목욕을 시켜도 좋다. 또는 생강을 끓인 물을 수건에 묻혀 아이들의 온 몸을 닦아주고 문질러 준다. 특별히 아이들의 등을 잘 닦아주고 문질러 주면 체온이 하강된다. 해열시키기 위하여 얼음을 사용하면 않된다.

셋째 음식물은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골라서 먹여야 된다.

넷째 ()와 대장(大腸)은 표리(表裏) 관계에 있다. 아이들 중에는 감기에 걸렸을 때 설사를 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치료되는 좋은 징조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감기 증상이 4,5 일 계속되며 대변이 불통할 경우 통변(通便)을 위주로 치료해야 되며 감기 증상은 치료할 필요가 없다. 통변만 해주면 감기는 자연적으로 치료된다.

다섯째 아이들을 위한 감기 개위차(開胃茶)의 조성은 다음과 같다.

산사(山楂) 20g, 목향(木香) 10g, 계지(桂枝) 6g, 백작(白芍) 6g, 감초(甘草) 6g, 대추3(씨는 제거), 생강1(), 황설탕 한 숟갈

복용 방법 : 10분 동안 끓인 후 복용시킨다. 1세 이하의 아기들은 한 배 내지 두 배의 끓인 물을 타서 희석시킨 후 복용시킨다. 희석시킬 경우 산사와 계지와 감초와 대추가 들어있기 때문에 약간 시면서 달콤하여 아이들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처방은 부작용이 없어서 사용하기 편리하다.


2011년 1월 29일 토요일

방역(防疫)

방역(防疫)

지진이 발생한 후 구조작업이 끝남과 동시에 방역 작업을 개시한다. 즉 살균과 격리와 공기 소독과 깨끗한 물과 음식 섭취등이 포함된다. 서양 의학편에서 주위 환경 소독과 격리 수용과 세균 박멸에 관해서 동양 보다 앞섰다.

한의학에서 공기 소독과 병균 소독에 기껏해야 쑥잎(艾葉)을 태우거나 훈증한다. 쑥잎과 오수유(吳茱萸)와 같은 식물 속에는 휘발성유(揮發性油)를 함유하고 있으므로 일정한 살균 효과가 있음은 분명하다.

오수유(吳茱萸)는 녹농간균(綠膿杆菌 : PseudomonasAeruginosa)과 황금색포도상구균(黃金色葡萄狀球菌 : Staphylococcus)과 진균(眞菌Fungus)의 멸균작용이 강하다.

또 쑥(艾葉)은 포도상구균과 백후간균(白喉杆菌 : Corynebacterium Diphtheria)과 황선균(黃癬菌 : Favus) 등 여러 종류의 피부병 진균 억제작용이 강하다.

현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살균제는 쑥잎 보다100배가 더 강하다. 그래서 사실 한의학에서 방역 작업이란 매우 미약하다.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 : 서기 150 - 서기 219 )이 생활하던 동한(東漢 : 서기 25 서기 189 ) 말기는 전쟁이 끝일 날이 없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전답을 내팽개치고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였기 때문에 논과 밭은 황폐된채로 있었다. 백성들은 곤궁에 빠져 유랑생활을 하며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설상가상격으로 온역(瘟疫)까지 도처에서 발생하였다. 낙양(洛陽)을 비롯하여 장중경의 고향 남양(南陽)과 회계(會稽 : 현재 紹興) 지역에 온역이 가장 심했다.

집집마다 온역으로 인하여 썩어빠진 시체들이 즐비하게 쌓여 있었고 집집마다 통곡소리 그칠 날이 없었다. 장중경(張仲景)의 집안도 마찬가지였으며 장중경은 자기 두 눈으로 비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가슴 아파 하였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동한(東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원년(元年 : 서기 196 ) 부터 시작된 역병으로 10년도 채 못되어 전체 인구의 3 분의 2 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상한론(傷寒論)의 서문(序文)에 보면 장중경(張仲景)은 의학 연구에 분발하여 백성들을 질병의 고통으로 부터 해방시켜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장중경의 친척 중에 장백조(張伯祖)라고 불리는 의술이 고명한 명의가 있었다. 장중경은 장백조를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의학을 공부하였다. 장백조는 자기의 의술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장중경에게 가르쳐 주었다.

후에 하옹()은 그의 저서 양양부지(襄陽府志)중경지술(仲景之術), 정우백조(精于伯祖).” 라고 기록해 놓았다.

다시 말하면 장중경(張仲景)의 의술은 장백조의 의술 보다 낫다.” 는 뜻이다.

하옹(  : 서기 ? - 서기1 90 )의 자()는 백구(伯求)이고 남양(南陽) 양향(襄鄕 : 현재 조양(棗陽)의 東北) 사람이며 삼국시대의 영웅이었다. 동탁(董卓)의 난() 때 사공(司空) 순상(旬爽)과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함께 동탁을 죽이려고 음모하다가 체포되어 울분을 참지 못하여 죽고 말았다.

장중경(張仲景)의 전기(傳記)를 읽어보면 장중경(張仲景)은 가족들이 역병으로 쓰러져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 더욱 분발하여 의학 연구에 몰두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상한론은 역병 치료서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상한론 중에 있는 일 백 여개의 처방은 온역(瘟疫)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처방이다. 외사(外邪)가 인체내로 침입하여 맨 처음 태양경으로 들어가고 후에 양명경으로 들어가며 그 다음 소양경으로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삼음경으로 침입된다는 질병의 발생과 발전 과정을 장중경은 상한론에 기록해 놓았다.

상한론의 첫째 처방은 계지탕(桂枝湯)이다. 계지탕은 온역을 예방하는 첫째 처방이다.

온역(瘟疫)을 예방하는 처방에 강총보죽(姜蔥)이 있다. 강총보죽(姜蔥)은 사실 계지탕의 응용이다. 간단하면서 효과가 탁월하다.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쌀죽을 끓인다. 죽을 너무 오랫동안 끓여서 쌀이 풀어지면 않되며 죽속에 들어있는 쌀알을 눈으로 볼수 있어야 한다.  그 다음 자기 엄지 손가락 만한 사이즈의 생강을 실() 처럼 가늘게 썰어서 파()의 하얀 부분 3개와 함께 쌀죽 속에 넣고2분 동안 만 끓인다.

강총보죽(姜蔥)은 반쪽 계지탕이라고도 부른다. 현대 의학편에서 말하면 시시하게 보이는 강총보죽(姜蔥)은 인체의 면역기능을 증강시켜 준다.

한의학 편에서 설명하면 강총보죽은 영위(營衛)를 조화시켜 주고 약간의 땀을 나게 해준다. 인체에서 약간의 땀이 나는 상태는 태양경(太陽經)의 외사의 감염을 예방해 주고 치료해 주는 과정이다고 말할 수 있다. 외사의 감염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면 먼저 따뜻한 강총보죽(姜蔥) 한 사발을 먹으면 그 효과는 인삼탕 한 대접을 마시는 것 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또 수친양로신서(壽親養老新書)에 보면 생강(生薑)과 황설탕 두 가지 만 함께 끓여 마셔도 노인들의 해수(咳嗽)와 토역(吐逆)과 복중창만(腹中脹滿)을 치료해 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지탕(桂枝湯)은 계지 9g, 작약 9g, 생강( : 썰다) 9g, 대추( : 쪼개다) 4(), 감초( : 굽다) 6g으로 조성되어 있다.

용법(用法)은 水煎溫服(물로 끓여서 따뜻할 때 복용한다), 服後進少量粥或開水(마신 뒤 약간의 죽을 먹거나 끓인 물을 마신다), 覆被取微汗(이불을 뒤집어 쓰고 약간의 땀을 낸다).

계지탕(桂枝湯)의 약리 작용은 해열작용, 중추신경 진정작용, 진통작용, 항염작용, 최면작용, 대식세포(大食細胞 : Macrophage)의 식작용(食作用 : Phagocytosis)활성화  등이다.

장중경(張仲景)은 계지탕(桂枝湯) 복용 후 철열희죽(啜熱稀粥), 온복이급(溫覆以及), 일이복(日二服)” 이라고 복용 방법을 기록해 놓았다.

다시 말하면 계지탕(桂枝湯) 복용 후 따뜻한 묽은 죽을 먹고나서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땀을 내며 하루에 두 차례 복용한다.” 는 뜻이다.

대식세포(Macrophage)의 활성화는 면역 기능을 증강시켜 준다는 뜻이다. 계지탕은 감기, 인플루엔자, 자한(自汗), 도한(盜汗), 내분비기능 문란, 식물성 신경기능 문란, 두성심동서완(竇性心動徐緩 : Sinus Bradycardia), 전색성맥관염(栓塞性脈管炎 : Embolic  Vasculitis),  심마진(蕁麻疹 : Urticaria), 피부소양증(皮膚瘙痒症), 임신오조(姙娠惡阻), 과민성비염(過敏性鼻炎) 등의 치료에 사용된다. 요즘 서양의 과학자들이 계지(桂枝 : Cinnamon)에 관하여 무척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것을 볼때 장중경의 상한론을 다시 한 번 더 들여다 보게된다.


2011년 1월 28일 금요일

불쌍한 북미(北美)의 닭

불쌍한 북미(北美)의 닭

캐나다 시골의 양계장 안에 들어가서 구경을 해본 사람은 잘 알지만 넓이 15cm 쯤 되는 철사망 울타리 속에 끼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모이만 주어먹고 물 마시는 일과 알 낳는 일만 할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양계장 주인은 닭 창고 속에 전등불은 24시간 켜놓고 밤인지 낮인지 모르게 해서 많이 먹고 알을 잘 낳기를 바란다.

보통 하나의 작은 창고 속에 8천 마리 부터 1만 마리 까지 닭이 들어 있다.  대형 창고 속에는 2만 마리 부터 10만 마리 까지 들어있기 때문에 귀마개 없이 닭장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와같이 사육하여 기른 닭의 달걀을 삶아서 깨뜨려 보면 노른자위의 색깔은 흰색에 가까운 담황색이고 달걀의 껍질이 얇아서 손으로 조금만 세게 쥐면 깨져 버린다.

그러나 들판에 놓아먹인 닭에서 난 달걀은 노른자위의 색깔이 진한 노랑색이다. 껍질도 시중에서 사먹는 달걀 보다 두 배는 더 두껍고 단단하다. 왜냐하면 닭들이 야외에서 주어먹는 모이 속에는 칼슘을 비롯한 여러가지 광물질과 비타민이 풍부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닭은 사회적 동물이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고 싸움질도 잘하며 경쟁심도 많다. 북미의 양계장에 견학가서 보면 주로 지중해산 레그혼(Lghorn)이 가장 많다. 왜냐하면 달걀을 많이 생산하는 레그혼은 양계인들의 수익을 가장 많이 올려 주기 때문이다. 보통 하루에 한 개의 달걀을 낳는다. 평균 일년에 레그혼 한 마리가 340개의 알을 생산한다.

양계장에서 자라는 닭들의 모이는 닭을 죽일 때 나오는 고깃 부스러기를 포함하여 인공적으로 가공한 사료들이다. 닭들은 독성있는 박테리아와 사모넬라(Salmonella) E-coli에 감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항생제 주사를 맞는다.

닭의 몸집이 철사망과 철사망 사이에 꽉끼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레그혼의 몸집을 작게 만든다고 한다.

또 닭들이 입주둥이의3분의2는 끊어 버린다. 왜냐하면 닭들 끼리 싸움할 때 부리로 쪼아서 상처를 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입주둥이의 3분의 2가 없는 뭉뚝한 부리로 먹이를 쪼아먹고 있는 레그혼의 모습을 쳐다볼 때 가엽기 그지없다. 개중에는 부리를 3분의 2 이상 더 잘라내어 너무나 주둥이가 뭉뚝해서 먹이를 제대로 쪼아 먹기 힘든 닭들은 결국 제명대로 살지도 못하고 아사(餓死)하고 만다.

또 발톱과 발가락을 움직일수 없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아서 자연적으로 퇴화되어 엉크러지고 꼬여서 말려들어 있다. 통계에 의하면 80%의 닭들이 발가락과 다리 병신이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영구적인 발가락과 발톱 병신 닭들이다.

닭들은 죽을때 까지 창고 안에 갇혀서 햇빛도 보지 못하고 신선한 공기도 마시지 못하며 움직일 수도 없기 때문에 운동부족으로 대부분 골다공증에 걸려 있다. 보통 가로 50cm 세로 50cm 의 사각형 안에 4마리 내지 5마리의 닭이 들어있기 때문에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날개 한 번 펴보지 못하고 죽는다.

또 달걀 껍질을 만드는데 칼슘을 비롯한 기타 광물질을 모두 사용해 버림으로써 광물질 부족증에 걸려 있다. 골다공증에 걸린 닭들 중에는 골절이 생긴 닭들도 많이 있다. 반신불수 닭들이다.

통계에 의하면 80%의 닭들은 관절이 약한 다리(Rickety Legs)를 가지고 있다으며 심장병과 폐병과 지방간 등 병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양계장 주인들의 말에 의하면 닭이 알을 잘 생산해내지 못할 경우 인공적으로 털갈이를 시킨다고 한다.

인공적 털갈이란?

닭에게 며칠 동안 모이를 주지않고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면 즉 인공적으로 단식을 시키면 털이 많이 빠지게 되는데 털을 갈고 난 다음 닭들은 알을 더 잘 낳는다고 한다.

1987년 부터 영국에서는 인공적인 털갈이는 아무리 말을 못하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잔인한 처사로 동물애호가들이 인정하였기 때문에 정부에 건의해서 인공털갈이 금지법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미에서는 아직까지 털갈이를 실시하고 있다.

고기를 사용하는 닭을 양육하는 양계장에서는 6주 내지 8주 만에 시장에 내다 팔수있는 살찐 닭을 만들기 위하여 닭에게 성장호르몬 주사를 준다. 그리고 이러한 닭들은 큰 창고 속 바닥에 놓아 먹이는데 몇 천 마리의 닭을 서로 부딪쳐 움직일수 없게 콩나물 시루 속에 들어있는 콩나물 처럼 서로 꽉 끼어있게 해둔다.

왜냐하면 닭들이 맘대로 움직일 경우 칼로리가 소모되고 칼로리가 소모되면 닭들이 날씬해 져서 수익성이 낮기 때문이다. 알고보면 북미의 닭들은 불쌍하기 짝이 없다. 2008 년도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260 억 마리의 닭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불교 종파의 변천

조선의 불교 종파의 변천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 서기 371 - 서기 384 ) 2년 서기 372 년에 그 당시 전진(前秦 : 서기 352 - 서기383 )의 부견(苻堅) ()은 승려 순도(順道)와 사신들에게 명하여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휴대하고 고구려에 들어가게 하였다. 이로써 중국 불교는 가장 먼저 고구려에 전입되었다. 그후로 부터 불교는 고구려를 통하여 백제와 신라로 각각 전입되었다.

() 나라와 당() 나라 때 중국 불교의 종파가 형성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그 당시 중국에 열반(涅槃), 지론(地論), 섭론(攝論), 구사(俱舍), 성실(成實) 등 학파(學派)와 천태(天台), 삼론(三論), 자은(慈恩), 화엄(華嚴), 선종(禪宗), 율종(律宗), 정토(淨土), 밀종(密宗) 등 종파(宗派)가 있었다.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 초기에 조선의 고승(高僧)들이 중국에 들어가 구법(求法)한 후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므로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이미 조선내에 불교 종파가 형성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조선의 불교 중 오교(五敎)가 형성되었다.

오교(五敎)?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불교 종파를 일컫는다.

즉 계율종(戒律宗)과 열반종(涅槃宗)과 원융종(圓融宗)과 법성종(法性宗)과 법상종(法相宗)이다.

각 종파(宗派)의 시조(始祖)는 자장(慈藏 : 戒律宗)과 보덕(普德 : 涅槃宗)과 의상(義湘 : 圓融宗)과 원효(元曉 : 法性宗)와 진표(眞表 : 法相宗)이었다.

또 각 종파의 중심 사원(寺院)은 통도사(通度寺 : 戒律宗)와 경복사(景福寺 : 涅槃宗)와 부석사(浮石寺 : 圓融宗)와 분황사(芬皇寺 : 法性宗)와 금산사(金山寺 : 法相宗)이었다.

또 구산(九山)은 선종(禪宗)9 개 종파(宗派)를 일컫는다.

즉 가지산파(迦智山派), 실상산파(實相山派), 동리산파(桐裏山派), 사굴산파(崛山派), 봉림산파(鳳林山派), 사자산파 師子山派), 희양산파(曦陽山派), 성주산파(聖住山派), 수미산파(須彌山派)를 일컫는다.

또 각파의 조사(祖師)는 도의(道義 : 가지산파), 홍척(弘陟 : 실상산파), 혜철(惠哲 : 동리산파), 범일(梵日 : 사굴산파), 현욱(玄昱 : 봉림산파), 도윤(道允 : 사자산파), 도헌(道憲 : 희양산파), 무염(無染 : 성주산파), 이엄(利嚴 : 수미산파)이며 각파의 주요 사원은 보림사(寶林寺 : 가지산파), 실상사(實相寺 : 실상산파), 대안사(大安寺 : 동리산파), 굴산사((崛山寺 :  사굴산파), 봉림사(鳳林寺 : 봉림산파), 흥녕사(興寧寺 : 사자산파), 봉암사(鳳巖寺 : 희양산파), 성주사(聖住寺 : 성주산파), 광명사(光明寺 : 수미산파)이었다.

고려 때 오교양종(五敎兩宗)” 이 형성되었으며 선종(禪宗)은 가장 널리 알려진 종파였다. 대각국사 의천(義天 : 서기 1055 - 서기 1101 )은 천태종을 창립했다. 고려의 천태종은 선종에 속해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교종(敎宗)에 속해 있었다. 고려 때 선종의 9 개 종파는 합병되어 조계종(曹溪宗)이 되었고 이후 오교구산(五敎九山)은 오교양종(五敎兩宗)으로 개칭(改稱)되었다.

그 당시 오교(五敎)는 교종(敎宗)5개 종파를 일컬었는데 南山宗(계율종)과 慈恩宗(법상종)과 華嚴宗(원융종)과 中道宗(법성종)과 시흥종(始興宗)으로 각각 개명(改名) 되었다.

그리고 양종(兩宗)은 천태종(義天)과 조계종(知訥)이었다.

이씨 조선 초기에 고려 시대의 5교양종은 발전하여 11 종으로 증가되었다. 이씨조선 제 3 대왕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마자 억불정책(抑佛政策)을 폈다. 그 결과 종파들은 합병되었고 사원의 숫자는 대폭 감소되었으며 승려(僧侶)들은 환속(還俗)하였고 사찰에서 소유하던 토지는 국유로 되었다. 또 사원의 노비(奴婢)들은 군정(軍丁)으로 보충되었다. 또 도첩제(度牒制)가 엄격해 짐과 동시에 왕사(王師)와 국사(國師)와 능사제(陵寺制)도 모두 폐지되었다.

태종(太宗) 때 11개 불교 종파는 7 ()으로 합병되었다. 즉 총지종(摠持宗)과 남산종(南山宗)이 합병되어 총남종(摠南宗)이 되었고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神印宗)이 합병되어 중신종(中神宗)이 되었으며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과 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이 합병되어 천태종이 되었다. 그래서 7 종은 총남종, 중신종, 천태종, 조계종, 화엄종, 시흥종, 자은종이다.

세종대왕(世宗大王) 때 불교의 배척은 더욱 심해져서 불교의7종파는 병합되어 양종(兩宗)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계종과 천태종과 총남종을 모두 병합시켜 선종(禪宗)이라고 칭하고 화엄종과 자은종과 중신종과 시흥종을 모두 병합하여 교종(敎宗)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세종 때 이씨조선의 불교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뿐이었다.

불교 사원 역시 전국에 36개로 줄어 들었다. 불교 종파의 병합은 각 종파들이 자원하여 합병된 것이 아니었고 통치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선종이나 교종이나 종지(宗旨)가 없고 종파적 특징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가 성종(成宗)과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 때 이르러 그나마 존재해 오던 선종과 교종은 완전 폐지되고 말았다. 후에 독실한 불교 신자인 중종(中宗 : 서기 1506 - 서기 1544 )의 왕비 문정왕후(文定王后 : 서기 1501 - 서기 1565 )의 섭정(攝政) 때 선종과 교종은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또 다시 불교는 탄압을 받게되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불교에 큰 변화가 일어나 선종적(禪宗的) 조계종(曹溪宗)이 가장 성행하게 되었다.



2011년 1월 27일 목요일

구도(求道)를 위하여 입당(入唐)한 조선의 고승(高僧)

구도(求道)를 위하여 입당(入唐)한 조선의 고승(高僧)



중국 당( : 서기618 - 서기907) 나라는 신라(新羅 : 서기57- 서기935 )가 삼국을 통일한 시기를 전후(前後)로 군림한 왕조(王朝)이다.

수 많은 조선의 고승들이 당() 나라에 구법(求法)하러 갔다.

그중 유명한 고승들은 다음과 같다.

의상(義湘), 자장(慈藏), 원측(圓測), 도증(道證), 명랑(明朗), 혜통(惠通), 혜초(慧超), 법랑(法朗), 신행(神行), 도의(道義), 체징(體澄), 혜조(慧照), 혜철(惠哲), 무염(無染), 현욱(玄昱), 도윤(道允), 홍척(弘陟), 범일(梵日), 이엄(利嚴) 등등 이다.

이들 고승 중에는 당 나라에 머무는 동안 현장(玄奘)과 금강지(金剛智)의 역경(譯經) 사업에 동참했으며 당 나라 불교 종파의 조직 활동에 적극 참여했었다.

그리고 당 나라에서 불법을 학습한 후 조선으로 귀국할 때 대량의 불경전(佛經典)과 문물(文物)을 휴대하고 돌아왔으며 귀국한 후 계속 불교경론 연구에 힘썼다.

고승들은 귀국 후 명산에 절을 세우고 조선 민족 특유의 오교구산(五敎九山)” 의 불교 종파를 형성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朝鮮)의 오교(五敎)? 열반(涅槃), 계율(戒律), 원융(圓融), 법상(法相), 법성(法性)을 일컬으며 중국의 교종법통(交宗法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신라의 의상(義湘 : 서기625- 서기702) 스님은 당 나라에 가서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嚴) 스님으로 부터 화엄(華嚴)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강원도 낙산사(洛山寺)와 경상북도 부석사(浮石寺) 등 많은 절을 지어 신라 화엄종에 공헌한 바가 컸다. 저서로는 화엄일승법계도가 있다. 의상 스님은 화엄경 연구에 탁월하였으며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시조가 되었다.

당 나라 제 2 대왕 태종(太宗 : 서기 626 서기 649 )으로 부터 상()을 받은 바 있는 자장(慈藏) 스님은 당 나라에서 귀국할 때 불사리(佛舍利)와 불가사(佛家裟)를 신라에 가지고 들어왔다. 자장 스님은 승려들을 통제하는 승려들의 계율(戒律)을 정비하고 당제관복(唐制冠服)을 조선 사람들에게 맞는 관복으로 바꾸어 사용하자고 새로운 의견을 제의하였다. 자장 스님은 통도사(通度寺)와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을 건축했으며 계율종(戒律宗)의 조사(祖師)가 되었다.

원측(圓測)은 현장(玄奘)으로 부터 불법을 배웠으며 당 나라 제 2 대왕 태종(太宗)으로 부터 도첩(度牒)을 받고 종신토록 당 나라에 머물었다.  인도의 유가행파(瑜伽行派) 안혜일(安慧一) () 학설을 중국에 전파했다. 원측은 구사종(俱舍宗 : 宗祖 世親菩薩의 구사론을 따른 小乘佛敎)과 유식종(唯識宗 : 無着과 世親에 의하여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의 한 갈래) 등 여러 학설에 정통한 스님이었다.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은 신라에 귀국하여 원측의 사상을 신라에 전파하였다. 그리고 도증은 신라 법상종(法相宗)의 이론기초를 확립하였다.

명랑(明朗) 스님은 밀교(密敎)의 고승이다.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축했으며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시조이다. 신인종은 신라 선덕여왕 때 명랑대사(明朗大師)가 개종(開宗)한 종파로써 칠종십이파(七宗十二派)의 하나이다.

혜통(惠通)은 당 나라에 가서 선무외(善無畏)로 부터 밀교(密敎)의 참뜻을 배우고 신라에 돌아와 밀종(密宗)의 교풍(敎風)을 불러 일으켰다. 후세인들은 혜통을 진언종(眞言宗)의 조사(祖師)라고 칭한다.

혜초는 당 나라에 가서 금강지로 부터 밀법(密法)을 배우고 인도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 중요한 역사 문헌(文獻)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편찬하였다.

조선의 구산(九山)이란?

실상(實相), 가지(迦智), 사굴(阇崛), 동리(桐里), 성주(聖住), 사자(師子), 희양(羲陽), 봉림(鳳林), 수미(須彌) 등 선종구산(禪宗九山)을 일컫는다.

신라의 법랑대사는 당 나라에 가서 당 나라의 선종사조(禪宗四祖) 도신(道信)으로 부터 불법을 공부하고 나서 귀국한 후 제일 먼저 도신의 선법을 전파하였다.

법랑대사의 제자 신행(神行)은 신수(神秀)의 제자 보적(普寂)의 문하생(門下生) 지공(志空)으로 부터 북종선(北宗禪)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조선에서 홍인(弘忍)과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을 전파하였다.

도의와 혜철과 홍척(弘陟)은 마조(馬祖)의 제자 서당지장(西堂地藏)으로 부터 선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 조선에 남종선(南宗禪)을 전파하였다.

그외에 혜조와 무염과 도윤과 현욱과 범일과 이엄 등은 당 나라에 가서 선법(禪法)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남종선법을 전파함으로써 조선 선종의 형성에 공헌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선종 각파의 형성과 발전은 당 나라에 가서 구법(求法)하고 돌아 온 조선의 고승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중국 선종(禪宗)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를 갖고 있다.

신라의 고승 홍척(弘陟)은 당 나라에 가서 서당지장으로 부터 선()을 공부했다. 신라에 돌아 온 후 홍척(弘陟)대사는 실상사(實相寺)를 건립하고 선법(禪法)을 전파하여 실상산파(實相山派)를 형성하였다.

도의(道義) 스님은 당 나라에 가서 서당지장(西堂地藏)으로 부터 선법을 배우고 신라에 귀국하여 체징(體澄)에게 선법을 전파했다.

체징은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를 건축하고 스승 도의(道義)의 종풍(宗風)을 부흥시켰다. 도의(道義)의 종풍은 후에 가지산파(迦智山派)를 형성하였다.

범일(梵日)은 당 나라에 가서 마조의 제자 염관제안(鹽官齊安)으로 부터 사사(師事)하고 신라에 돌아와 굴산사(崛山寺)를 건립하고 문하에 수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사굴산파(崛山派)를 형성하였다.

혜철은 맨 처음엔 화엄(華嚴)을 공부했으나 후에 서당지장(西堂地藏)으로 부터 선()을 공부하여 동리산(桐裏山)에서 선풍을 일으켰으며 동리산파(桐裏山派)를 형성하였다.

무염은 마조의 후계자 마곡보철(麻谷寶徹)로 부터 선을 공부하고 신라에 귀국하여 성주사(聖住寺)에 머물면서 열심히 전교했으며 후에 성주산파(聖住山派)를 형성하였다.

도윤은 마조의 제자 남천보원(南泉普原)과 징효절중(澄曉折中)으로 부터 사사한 후에 신라로 귀국하여 사자산사(師子山寺)를 건립하고 사자산파(師子山派)를 형성했다.

혜조(慧照)는 마조의 문하생 신감(神鑑)으로 부터 남종선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 도헌(道憲 : 一名 智憲)에게 전교했다. 도헌은 법랑을 계승했었다. 그후 신행법맥의 준범(遵範)의 제자 혜은(惠隱)으로 부터 선을 공부한 후 희양산(曦陽山)에 봉암사(鳳巖寺)를 건립하고 선법(禪法)을 전파하며 희양산파(曦陽山派)를 형성하였다.

현욱(玄昱)은 마조의 문하생 장경(章敬)으로 부터 선()을 배웠다. 현욱의 제자 진경심희(眞鏡審希)는 봉림사(鳳林寺)를 건립하고 선풍(禪風)을 불러 일으켰으며 봉림산파(鳳林山派)를 형성하였다.

이엄(利嚴)은 당 나라에 가서 운거도웅(雲居道膺)의 문하에서 6 년 동안 선()을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이엄(利嚴)을 스승으로 모시고 선을 배웠다. 고려 태조는 수미산(須彌山)에 이엄(利嚴)을 위하여 광조사(廣照寺)를 지어 주었으며 이엄(利嚴)은 수미산파(須彌山派)를 형성하였다.

수 많은 조선의 고승들이 입당(入唐)하여 불법을 배워 귀국한 후 불교를 전파하고 발전시켰으며 불법외에 의학과 산학(算學)과 역학(曆學)과 율학(律學)과 문학과 건축기술과 미술과 공예 등 각 방면의 기술을 습득한 후 귀국하여 조선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조선의 고승들이 당 나라의 건축술을 배워 귀국한 후 건 축과 조각과 회화(繪畵) 등에 현저한 발전을 이룩했다.

그중 신라 예술의 극치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경주(慶州) 토함산(吐含山)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신라 통일 후에 건립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신라인들의 위대한 예술 착작성에 감탄하였다.

마조(馬祖)는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 : 서기 709 서기 788 )라고도 부른다. 마조는 선종(禪宗)의 조사(祖師)이다.

마조의 용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모기이(容貌奇異), 우행호시(牛行虎視), 인설과비(引舌過鼻), 족하유이륜문(足下有二輪紋)”

다시 말하면 마조의 용모는 괴상하였다. ()의 걸음에 호랑이 눈초리요,  혀가 보통 사람들 보다 훨씬 길어서 자기 혀로 코끝을 빨아 먹을수 있었으며 다리엔 두 개의 수레바퀴 무늬가 있었다.”는뜻이다.

2011년 1월 26일 수요일

백마사(白馬寺)는 중국 최고(最古)의 사원(寺院)

백마사(白馬寺)는 중국 최고(最古)의 사원(寺院)

낙양(洛陽)의 동쪽 12km 지점에 한 개의 고사찰(古寺刹)이 있다.  수 백년 된 송림(松林) 고목들과 서로 잘 어울려 돋보이는 이 사찰! 우람스럽고 장엄하며 엄숙한 전당(殿堂)들......, 높이 솟아있는 보탑(寶塔)들......, 한 번 이 사찰을 방문한 사람들의 뇌리속에서 인상이 깊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 이 사찰이 바로 백마사이며 중국에서 맨 처음 건축된 사찰이다.

"중국제일고사(中國第一古寺)” 란 호칭을 갖고 있으며 약 12345 ()의 대지(垈地) 위에 천왕전(天王殿), 대불전(大佛殿), 대웅전(大雄殿), 접인전(接引殿), 청량대(淸凉臺), 비로각(毘盧閣) 등이 있다.

백마사에 한 가지 기괴한 일이 있다.

즉 낙양팔대경(洛陽八大景) 중의 하나인 백마사종성(白馬寺鐘聲)” 이다.

매달 달이 밝고 바람이 없는 날 밤 온 세상이 고요할 때 스님이 방망이로 대불전(大佛殿)에 높이 매달아 놓은 종을 치면 종소리가 십리 까지 들리고 그치지 않고 계속 울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12.5km 떨어져 있는 낙양의 노성(老城) 종루(鐘樓) 위에 매달아 놓은 큰 종의 음율(音律)이 백마사의 종과 똑 같기 때문에 백마사의 종을 칠때 마다 함께 울려 계속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백마사는 북망산(北邙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낙수(洛水)가 옆으로 흐르고 있다. 백마사에서 중원의 대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수 있다. 백마사 내에 있는 구리로 만든 종과 북소리는 2000여 년 동안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다.

백마사의 건립과 동한(東漢)의 제 2 대왕 명제(明帝 : 서기 58 서기 75 ) 유장(劉庄)과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어느 날 밤 한명제(漢明帝)의 꿈에 금인(金人 : 금으로 만든 사람)을 보고 나서 사신을 서방(西方)으로 보내어 구법(求法)하고 돌아오라고 명했다.

채음과 진경은 대월지(大月氏)에 가서 우연히 인도의 고승 섬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을 만났다. 섬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으로 부터 불경을 익히고 불경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한(漢) 나라로 귀국하였다. 

이들은 말등에 불경을 싣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사막을 뜷고 천신만고 끝에 영평(永平) 10(서기 68 )에 낙양에 도착되었다.

한명제(漢明帝)는 스스로 두 명의 인도 고승에게 경의를 표하여 극진히 모셨다. 한명제는 그들을 홍려사()에 임시로 머물게 하였다. 홍려사()는 그 당시 외교사무(外交事務)를 관장하는 관서(官署)였다.

한명제(漢明帝)는 그 이듬해 서기 69 년에 낙양성 서편에 승원을 건축하라고 명하였다. 사원이 완공된 후 명제는 불경을 천축에서 낙양까지 싣고 온 백마(白馬)”와 홍려사()()” ()  따서  명제가 직접 이 사찰의 이름을 백마사라고 명명하였다. 그래서 백마사는 중국 최초의 사원이 되었다.

백마사 건축 후 한문에 능통한 천축 승려 섭마등 스님과 축법란 스님들은 불경의 번역에 주력하였다. 첫번 째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번역하였다. 한명제가 사십이장경을 읽어 본 후 극구 칭찬하였으며 한(漢)나라 황실도서관(皇室圖書館)-난대석실(蘭臺石室)에 잘 보관해 두라고 칙령을 내렸다.

인도의 섭마등 스님과 축법란 스님이 번역한 사십이장경은 중국 불교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불교 홍법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로써 백마사는 중국내에서 불교 경전 번역의 발원지(發源地)가 되었다.

명제때 불경 번역 승려 중 안식(安息 : 파키스탄 왕국) 왕자(王子) 안세고(安世高)와 월지인(月氏人 : 기원 전 3 세기와 기원 1 세기 사이에 북 아시아와 중앙 아시아에 건국했던 유목민족 국가) 지류가참(支流迦讖) 등도 모두 백마사에서 천축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국가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들 외에도 천축인 축불삭(竺佛朔)과 안식인 안현(安玄)과 월지인 지요(支曜)와 강거인(康居人 : 카자흐스탄) 강맹상(康孟祥)과 강거인(Kazakhstan) 강거(康巨) 등이 있었다.

서진(西晉) 때에도 백마사는 불경을 번역하는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북위(北魏) 때에도 인도의 승인 불타선다(佛陀扇多)는 백마사에서 역경(譯經)에 종사했었다. 이와 같이 백마사는 중국 불교 발전에 크나 큰 역할을 해온 사원임과 동시에 중국 불교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에 불교 전교(傳敎)한 최초의 인도(印度) 화상(和尙)

중국에 불교 전교(傳敎)한 최초의 인도(印度) 화상(和尙)

() 나라 때 혜교(慧皎)의 저서 고승전(高僧傳)에 보면 최초로 중국에 불교를 전교한 인도의 화상은 섭마등(攝摩騰)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섭마등(攝摩騰)은 가엽마등(迦葉摩騰) 또는 축마등(竺摩騰)이라고도 불렀으며 마등(摩騰)은 간칭(簡稱)이다. 섭마등(攝摩騰)은 천축인으로써 대소승불경전(大小乘佛經典)을 강의했으며 해외로 돌아다니며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의하였다. 그리하여 섭마등(攝摩騰)의 명성은 온 천하에 널리 퍼졌었다.

동한(東漢) 2 대왕 명제(明帝 : 서기58- 서기75) 영평(永平) 연간에 명제는 채음(蔡愔)과 진경(秦景)을 천축에 보내어 불법을 배워 오라고 명했다.

채음과 진경은 어명을 받고 천축에가서 불법을 학습하던 중 우연히 섭마등(攝摩騰)을 만나 한() 나라에 가서 전교해 달라고 간청했다. 섭마등(攝摩騰)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한 나라의 수도 낙양(洛陽)에 도착하였다.

고승전에 섭마등위한자유사문지시(攝摩騰爲漢地有沙門之始)”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섭마등은 한 나라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승려이다.” 는 뜻이다.

섭마등(攝摩騰)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천축(天竺) 화상이다.

또 한() 나라 백성으로써 최초로 출가(出家)한 승인(僧人)은 엄불조(嚴佛調) 스님이다. 엄불조(嚴佛調)는 임회(臨淮 : 현재 安徽省 泗縣) 사람이다. 엄불조(嚴佛調)는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으며 배우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엄불조(嚴佛調) 스님과 안현(安玄) 스님은 공동으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안현은 천축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범문(梵文)을 읽어가며 동시에 중국어로 번역하면 엄불조(嚴佛調)는 받아 쓰기 바빴다.

엄불조(嚴佛調)는 번역문 의리(義理)에 매우 밝았고 간결한 문자를 사용하여 불경사상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여 번역하였다.

후에 도안(道安) 스님은 엄불조(嚴佛調)를 다음과 같이 극구 칭찬하였다.

성이불번(省而不煩), 전본교묘(全本巧妙).”

다시 말하면 엄불조(嚴佛調)가 번역한 불경은 산란하지 않고 번잡을 피해서 장황하지 않고 간결하다. 그는 번역에 아주 교묘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다.” 는 뜻이다.

그 당시 백성들은 호위난계(號爲難繼)” 라고 까지 극평했으며  후세 사람들 중에는 엄불조(嚴佛調)와 안세고(安世高)와 안현삼(安玄三)과 같은 그 당시 불경 번역자들의 뒤를이어 그 만큼 번역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엄불조(嚴佛調) 스님은 사미십혜장구(沙彌十慧章句)”를 저술했는데 이는 중국 최초의 불교저작(佛敎著作)이다.


불교의 중국 전입 시기

불교의 중국 전입(傳入) 시기

불교가 어느 때 중국에 전입되었는가에 관하여 여러가지 설이 있다. 첫째 곽복(郭璞) <산해경(山海經)-해내경(海內經)> 주석(註釋)에 보면 삼황오제(三皇五帝) 시절에 불교가 중국에 전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틀린 설명이다.

사학가들의 고증(考證)에 의하면 삼황오제는 중국 고대의 전설이며 원시 사회의 부락 추장(酋長)들이었고 후세인들이 신화(神化)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삼황오제는4, 5천년 전 인물들이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삼황오제는 존재했던 인물들이다.

둘째 주조(周朝)의 제 4대왕 소왕(昭王) 때 백성들은 이미 불타(佛陀)를 알고 있었으며 그 당시 불타를 성인(聖人)이라고 칭했었고 주조 때 인도의 승인들이 중국에 들어와 전교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 역시 틀린 주장이다. 왜냐하면 불타의 생존년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주조의 소왕 때 불타가 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셋째 공자(孔子)가 말한 성인은 불타를 의미하기 때문에 공자 생존시 불교가 중국에 전입되었었다는 설이 있다. 열자(列子)의 기록을 근거로하여 주장한 설인데 열자는 일종의 우화집(寓話集)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고 그 당시 중국과 인도의 왕래가 없었다.

넷째 동진(東晉 : 서기317- 서기470) 때 사람 왕가(王嘉)의 저서 습유기(拾遺記)에 보면 전국시대 말기 도인(道人)들이 인도로 부터 중국에 들어와 연국(燕國 : 서기 전 11세기 서기 전222)의 수도(首都) ( : 현재 북경의 서남쪽 房山 지구)에서 전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주장도 별로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전국시대 말기에 불교는 인도내에서 주로 전교되었으며 외국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이 설도 신빙성이 없다.

다섯 째 진시황(秦始皇) 때 인도의 승인들이 중국에 불교를 전입했다는 설이있다.

여섯 째 서한(西漢)의 제 6 대왕 한무제(漢武帝 : 서기 전140 서기 전87) 때 이미 불교를 알고 있었다는 설과 제 10 대왕 성제(成帝 : 서기 전32서기 전 7 ) 때 유향(劉向)이 불경을 가지고 종종 설법했다는 설이 있는데 증명할 만한 자료가 충분치 못하다.

학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에 의하면 불교는 서한(西漢서기 전206- 서기23)과 동한(東漢: 서기25- 서기189 )이 교차될 무렵에 중국에 전입되었다고 한다. 서한 때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역 지방과 교통이 빈번했기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의 교류가 빈번하였다. 그 당시 인도에서 불교의 세력이 확장되어 대하(大夏 : 아프카니스탄)와 안식(安息 : 이란)에 불교가 전교되었고 상인들과 사절(使節)들에 의하여 중국 본토로 불교가 전입되었음은 자연적이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