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씨(詹氏) 부인의 정조(貞操)
다음 고사(故事)는 명(明) 나라 정덕(正德) 원년(元年) 서기 1506 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명조정덕원년(明朝正德元年), 청산현유개산민진호밀(靑山縣有個山民陳好密), 피구인무함투도산리적광석(被仇人誣陷偸盜山里的鑛石), 피박배정이향(被迫背井離鄕), 도망재외(逃亡在外). 타적처자연경미모(他的妻子年輕美貌), 재이십일세(才二十一歲), 수도장부안건견연피사개포졸대왕관부(受到丈夫案件見連被四個捕卒帶往官府). 황혼시재편벽소로행주(黃昏時在偏僻小路行走), 저사개인도상간오첨씨(這四個人都想奸汚詹氏). 첨씨상도도피불료(詹氏想到逃避不了), 편심생일계(便心生一計), 타선택료기중일개유저호수(她選擇了其中一個留著胡須), 비교강장적포졸(比較强壯的捕卒), 가장설(假裝說) : ”청이위아작주(請尔爲我作主), 불요양타문란래(不要讓他們亂來), 도시아가이거이가(到時我可以去尔家), 양이수심소욕(讓尔隨心所欲).” 유호수적청후이상고흥(留胡須的聽後異常高興), 기타포졸상난래(其他捕卒想亂來), 타도출래제지(他都出來制止). 도료황단산우도일개감시적초부(到了黃壇山遇到一個砍柴的樵夫), 첨씨향초부차시도삭혜자(詹氏向樵夫借柴刀削鞋子). 삭완(削完), 대사개포졸설(對四個捕卒說) : ”아파혜자인도수림중(我把鞋子扔到樹林中), 수선창도아취만족수(誰先抢到我就滿足誰).” 혜포출후(鞋抛出後), 사인쟁선공후비분수림(四人爭先恐後飛奔樹林), 첨씨승기지도자살(詹氏乘機持刀自殺). 사인견상경공만상(四人見狀驚恐萬狀), 급망도주(急忙逃走). 당시정치염열적하계(當時正値炎熱的夏季), 우시폭시광야(又是暴尸曠野), 단십천후시체잉불피승충정교(但十天後屍體仍不被蠅蟲叮咬), 차면용의구(且面容依舊). 현령진황곤청설저사건후(縣令陳況袞聽說這事件後), 친자위첨씨위이상사(親自爲詹氏爲理喪事), 병재타적묘비상제자(幷在她的墓碑上題字 ’貞烈’. 연후파사개포졸난곤타사(然後把四個捕卒亂棍打死).”
다시 말하면 ”명 나라 제 10 대왕 무종(武宗 : 서기 1506 년 – 서기 1521 년) 때 청산현(靑山縣) 산중에 진호밀(陳好密)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진호밀(陳好密)의 원수들은 진호밀(陳好密)이가 산속에 들어 있는 광석(鑛石)을 도둑질하여 팔아 먹는다고 없는 사실을 꾸며 무함하였다. 진호밀(陳好密)은 하는수 없어 정든 고향을 등지고 밤중에 멀리 도망쳤다.
진호밀(陳好密)의 부인은 이제 겨우 21세 된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이었다. 첨씨(詹氏) 부인 역시 남편의 사건에 연루되어 네명의 포졸(捕卒)들에게 붙잡혀 관부(官府)로 끌려가고 있었다. 때는 황혼 무렵인데다가 궁벽한 외진 산골길이었다. 네명의 포졸들은 모두 첨씨(詹氏) 부인에게 음란한 행동을 저질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첨씨(詹氏) 부인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꽁꽁 묶여 있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첨씨(詹氏) 부인은 한 꾀를 생각해 냈다. 첨씨(詹氏) 부인은 네명의 포졸 중 가장 건장하게 보이는 수염을 기른 청년에게 다가가서 ”당신이 나의 주인이 되어 줄수 있겠습니까? 나는 나머지 세 사람이 나에게 음란한 행동을 하려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따라서 당신의 집으로 가서 당신이 원하는 바를 받아 주겠습니다.” 고 거짓말을 하였다.
수염을 기른 청년은 첨씨(詹氏) 부인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수염을 기른 청년이 나머지 세 사람의 포졸들의 음란한 생각을 접게 만들었다.
황단산(黃壇山) 쯤 도착하니 나뭇군이 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하산하고 있었다. 첨씨(詹氏) 부인은 나뭇군에게 신발 끈을 자르려고 하니 낫을 잠간 만 빌려 달라고 말했다.
첨씨(詹氏) 부인은 신발을 쳐들고 네 명의 포졸들을 향하여 ”내가 지금 나의 신발을 숲속으로 던질터이니 제일 먼저 나의 신발을 찾아오는 사람을 내맘에 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오!” 라고 외쳤다.
첨씨(詹氏) 부인의 신발이 숲속으로 던져지니 네 명의 포졸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슾속으로 들어가서 신발을 찾고 있었다. 첨씨(詹氏) 부인은 네 명의 포졸들이 신발을 찾으러 숲속으로 들어가고 없는 틈을 타서 낫으로 자기 목을 베어 자살하고 말았다.
네명의 포졸들은 놀라 허둥대며 어쩔줄을 모른 채 급히 달아나 버렸다. 때는 염천지절(炎天之節)이라서 광야에 햇빛이 쨍쨍 비치니 10 일 후 시체는 파리와 모기떼에 물렸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여전하였다.
현령(縣令) 진황곤(陳況袞)이 이 사건을 보고 받은 후 첨씨(詹氏) 부인의 장례식을 마련해 주고 그녀의 묘비(墓碑)에 ”정열(貞烈)” 이란 제자(題字)를 써 주었다. 정열(貞烈)이란? “정조를 끝까지 지켰다.” 는 뜻이다. 그리고 네 명의 포졸들은 곤장(棍杖)을 얻어 맞아 죽어 버렸다.” 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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