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시(龐安時)의 침구조산(鍼灸助産)
다음은 송사(宋史)—방기하(方技下) 중 방안시전(龐安時傳)에 수록되어 있는 고사(故事)이다.
<<방안시위인치병(龐安時爲人治病), 율십유팔구(率十愈八九). 종문구진자(踵門求診者), 위벽저사거지(爲辟邸舍居之), 친시전죽약물(親視飦粥藥物), 필유이후견(必愈而後遣); 기불가위자(其不可爲者), 필실고지(必實告之), 불복위치(不復爲治). 활인무수(活人無數), 병가지금백래사(病家持金帛來謝), 부진취야(不盡取也). 상예서지동성(嘗詣舒之桐城),
유민가부잉장산(有民家婦孕將産), 칠일이자불하(七日而子不下), 백술무소효(百術無所效). 안시지제자이백전적재방사(安時之弟子李百全適在傍舍), 요안시왕시지(邀安時往視之. 재견(才見), 즉연호불사(卽連呼不死), 영기가인이탕온기요복(令其家人以湯溫其腰腹), 자위상하부마(自爲上下拊摩). 잉자각장위미통(孕者覺腸胃微痛), 신음간생일남자(呻吟間生一男子). 기가경희(其家驚喜), 이부지소이연(而不知所以然). 안시왈(安時曰) : 아이출포(兒已出胞), 이일수오집모장불능복탈(而一手誤執母腸不能復脫), 고비부약소능위(故非符藥所能爲). 오격복문아수소재(吾隔腹扪兒手所在), 침기호구(針其虎口), 기통즉축수(旣痛卽縮手), 소이거생(所以遽生), 무타술야(無他術也). ”취아시지(取兒視之), 우수호구침흔존언(右手虎口針痕存焉). 기묘여차(其妙如此). 유문이화타지사자(有問以華佗之事者), 왈(曰) : ”술약시(術若是), 비인소능위야(非人所能爲也), 기사지망호(其史之妄乎)!” 연오십팔이질작(年五十八而疾作), 문인청자시맥(門人請自視脈), 소왈(笑曰) : ”오찰지심의(吾察之審矣). 차출입식역맥야(且出入息亦脈也), 금위기이절(今胃氣已絶), 사의(死矣).” 수병각약이(遂屛却藥餌). 후수일(後數日), 여객좌어이졸(與客座語而卒).>>
다시 말하면
”방안시(龐安時)가 환자 열 명을 치료하면 8, 9 명은 반드시 치유되었다. 환자가 방안시(龐安時)를 방문하면 방안시(龐安時)는 환자들을 여인숙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자기 안방을 내주고 병을 치료하는 동안 편안히 묵어 가라고 말했다.
그 뿐만 아니라 방안시(龐安時)는 환자를 위하여 직접 죽을 끓여 복용시키는가 하면 탕약도 손수 끓여 환자에게 복용시킨 후 병정이 호전되면 집으로 돌려 보냈다. 또 방안시(龐安時)는 자기 실력으로 치유할 수 없는 의난잡병 환자들에게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치료하지 않았다.
그는 무수히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방안시(龐安時)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금은(金銀)과 비단을 방안시 앞에 내놓았다. 그러나 방안시(龐安時)는 극구 반대하며 보수를 받지 않았다.
어느 날 서주(舒州) 동현(桐縣 : 현재 安徽省 桐城)에 살고있는 임신부가 산통이 시작된지 7 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태아를 분만하지 못하였다. 산부의 가족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백전(李百全)이라고 불리는 방안시(龐安時)의 제자가 임산부의 집 옆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백전(李百全)은 스승에게 달려와서 옆집 임산부를 진맥해 달라고 요청했다.
방안시(龐安時)가 산부를 진찰하고 있는 동안 산부는 ”아기가 죽지 않았습니까? 아기가 죽지 않았습니까?” 하고 계속 중얼거렸다.
방안시(龐安時)는 산부의 가족들에게 물을 끓여 가지고 오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뜨거운 물 수건으로 산부의 배와 허리 부분을 따뜻하게 열부(熱敷)해 주라고 말했다. 한편 방안시(龐安時)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산부의 배를 안마해 주었다.
잠시 후 산부는 장위(腸胃)의 통증이 점점 멎어짐을 느꼈다. 이윽고 산부는 신음 소리를 내더니 남자 아기를 분만하였다.
산부의 가족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며 방안시(龐安時)의 신효막측한 의술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방안시는 ”태아가 이미 포의(胞衣)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태아의 손 하나가 모친의 창자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태아의 손힘이 얼마나 센지 손이 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경우 부적을 사용해도 않되고 약을 써도 않됩니다. 태아의 손을 펼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산부의 배를 살살 더듬어 뱃속에 들어있는 태아의 손이 어디쯤 있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태아의 엄지와 식지 사이에 있는 합곡혈(合谷穴)을 찾아서 침을 한 방 놓았습니다. 태아는 합곡혈에 침을 한 방 맞고 아프니까 산모의 창자를 꼭 쥐고있던 손가락을 쫙 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태아의 손을 펼수 없습니다." 고 말했다.
산부의 집안 사람들이 아기의 손을 살펴보니 아기의 오른손 호구(虎口)에 침을 맞은 흔적이 보였다. 가족들은 방안시(龐安時)의 의술에 탄복하였다.
산부의 가족 중 한 사람이 ”화타의 의술이 방선생님의 의술과 똑 같습니까?” 하고 방안시(龐安時)에게 물었다.
방안시(龐安時)는 ”의술은 신기한 것이며 보통 사람들은 이루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사서(史書)에는 터무니 없이 멋대로 논평해 놓은 것도 있습니다.” 고 말했다.
방안시(龐安時)는 58 세 되던 해 병에 걸렸다. 방안시(龐安時)의 학생들은 스승으로 하여금 스스로 진맥해 보라고 말했다.
방안시(龐安時)는 ”나는 이미 나의 병을 자세히 관찰해 보았다. 호흡이 맥(脈)아니냐? 현재 나의 위기(胃氣)는 이미 끊겨 있다. 죽음이다.” 고 말했다.
방안시(龐安時)는 약을 복용함도 포기하고 며칠 후 병문안(病問安) 온 손님들과 이야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는 뜻이다.
방안시(龐安時)의 자(字)는 안상(安常)이고 기주(蕲州) 기수(蕲水 : 현재 湖北省 浠水縣)에서 조상 대대로 의업에 종사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방안시(龐安時)는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으며 항상 책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내과와 침구과에 정통한 송(宋) 나라의 저명한 의학가였다. 그는 난경변(難經辨)과 주대집(主對集) 1 권(卷)과 본초보유(本草補遺) 등 저술을 남겼으나 도중에 모두 분실되었고 현재 상한병총론(傷寒病總論) 6 권(卷) 만이 전해지고 있다. 상한병총론(傷寒病總論)은 장중경(張仲景)의 상한이론을 재정리하고 쉽게 풀이했으며 부족한 점을 보충한 것이다.
방안시(龐安時)는 의술에 정통했을 뿐마 아니라 고상한 의덕을 지니고 있었다. 방안시(龐安時)의 부친은 방안시(龐安時)에게 맥학(脈學)을 가르쳤다. 그러나 방안시(龐安時)는 ”시부족위야(是不足爲也)” 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실력이 부족합니다.” 는 뜻이다.
방안시(龐安時)는 아버지의 얕은 의학 지식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내경(內經)과 난경(難經) 등 고서를 스스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방안시(龐安時)는 송대(宋代) 이전의 명의학가(名醫學家)들의 저술을 모두 탐독하였다. 방안시(龐安時)는 고적의 원의(原意)를 깨달음은 물론 자기 스스로 새로운 견해를 발표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실력에 감탄하였다.
방안시(龐安時)는 영추(靈樞)와 태소(太素)와 갑을경(甲乙經)과 상한론 등 각종 저명 의서들을 탐독하였다. 비록 방안시(龐安時)는 의사였지만 그 당시 유명한 명사(名士) 소동파(蘇東坡)와 황정견(黃庭堅)과 장래(張來)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명사(名士)들의 문학작품 중에 여러 군데 방안시(龐安時)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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