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31일 화요일

식득파(識得破) 인득과(忍得過) 건강도노(健康到老)

식득파(識得破) 인득과(忍得過) 건강도노(健康到老)
오대 십국(서기 907 - 서기 1126 ) 시기에 촉() 나라 라성(羅城)의 병마사(兵馬使) 정언빈은 산동성 임치(臨淄) 사람이다.
정언빈 병마사는 군대를 이끌고 영성(寧城)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정언빈의 부하들은 성안에서 세 명의 젊고 아름다운 처녀들을 정언빈에게 바쳤다.
당시 정언빈은 술에 취하였었지만 정언빈은 군자였다. 정언빈은 여자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을 내 딸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너희들을 범하겠느냐?” 고 말한 후 부하들을 시켜 다른 방안에 옮겨 둔 후 잘 보호해 주라고 명했다.
그 이튿 날 세명의 처녀들은 무사히 자기 부모집으로 돌아갔다. 세 명의 처녀의 부모들은 매우 감사하여 정언빈에게 사례를 하였다. 그러나 정언빈은 금전보답을 거절하였다.
후에 정언빈은 궁궐로 들어가 입신출세하였다.
정언빈은 친구들을 모두 보내고 난 후 93세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정언빈의 자식들도 입신출세하였다.
이 고사를 통하여 우리는 한 순간의 음욕을 절제함으로써 더 많은 복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상의 고사는 보명연수법 중 식득파(識得破) 인득과(忍得過) 건강도노(健康到老)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五代十國時期,蜀國羅城兵馬使,叫程賓,他是山東臨淄人。當時他領兵攻打寧城,攻下城之後,他的左右在這個城中奪來三個年輕的處女,獻給程賓,都是美貌的女孩子。當時程酒後有點酒醉,可是他這個人是一位正人君子,對這些女孩子說:們也不要害怕,我看們就像我自己的女兒一樣,麽會侵犯們?說完之後,就命人把們三位女子關到一個房間裏面保護起來。到第二天就去找們的父母,然後把女孩子平安地送還給們的父母。們的父母也非常感恩,拿出很多金錢來報答、酬謝程賓,程賓一不收。後來程賓升官了,在仕途上也很發達。93歲壽終,走得非常的自在,臨終是正念分明,跟自己的親友告別後才去世.他的幾個兒子都得到顯貴。所以看看,這都是智慧人。能忍一時,得到的福分是綿長的."

2012년 7월 30일 월요일

천도화음(天道禍淫) 불분고금(不分古今)

천도화음(天道禍淫) 불분고금(不分古今) 일제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기원(妓院 : 기생집)과 음업(淫業)에 종사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돈은 벌었지만 병을 얻어 질병 치료에 번돈을 많이 썼다. 좋지않은 영업을 하는 사람들의 자식들의 운명도 비참했다. 어떤 자식들은 아버지가 경영하던 음업(淫業) 사업을 그만 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집안에서는 할아버지가 하던 음업(淫業)을 아버지가 계승하고 아들은 참회하고 음업(淫業)을 폐기하였다. 그러나 인과응보는 현세에 나타났다. 아버지와 숙부와 백부의 가족 중 1 년 사이에 7명이 여러가지 질병에 걸려 죽었다. 형제들 중에 백치(白痴)도 있고 또 어떤 가정에서는 며느리를 범하여 며느리 부부가 함께 자결한 난륜(亂倫) 사건도 발생했다. 참회한 사람의 신체에도 참회는 했지만 온 몸에 독창이 번져 있어 온 몸에서 악취나는 고름이 흐른다. 통증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녀들이 미련스럽고 사리에 어둡기 때문에 가르치기 어려운 점이다. 결국 자녀들이 집을 떠나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이전 생활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생활이었고 원망과 분노 속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불법에 접촉할 기회가 생겨 다음과 같은 대덕자(大德者)와 지자(知者)들의 훈시를 읽었다. ” 祖先若犯邪淫及助淫,後代俱受『犯淫』、『無子』、『破家亡身』之報.” 다시 말하면 만일 조상들이 사음(邪淫)을 범하거나 조음(助淫)했을 경우 후대는 모두 범음(犯淫)하거나 무자식(無子息)이거나 패가망신의 응보를 받는다.” 는 뜻이다. 그는 이와 같은 훈시를 읽고 크게 깨우쳤다. 그후 마음이 편안해지고 심정의 기복이 사라졌으며 슬프고 침울했던 방황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문창제군은 天道禍淫,其報甚速。人之不畏,夢夢無知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천지 자연의 법칙에 벗어난 음을 범하면 그 응보는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은 무식해도 보통 무식한 것이 아니다.” 는 뜻이다. 이상의 고사는 보명연수법 중 천도화음(天道禍淫) 불분고금(不分古今) 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數十年前的日據時代,有不少經營妓院及淫業生意的人,雖然了不少的錢,後來都花在治療自己的惡病上,子孫的命運也都非常淒慘。有一位後代曾懺悔:他的祖父繼承家裏的淫業,到了他父親那一代,果報現前:他的父親、叔、伯父的家族在一年內,共有七人以各種方式喪命,他的同輩兄弟中有的白癡、有的家中亂倫,侵佔子媳,以至於子、媳雙雙自殺。這位懺悔者的身上經常長滿毒瘡,遍體流膿,非常痛苦。最讓他痛心的是他的女兒頑冥難,竟然離家出走去做流鶯。
他以前都是生活在無奈、怨憤與易怒的日子裏,一直到他在偶然中,接觸到佛法,讀到古大德及智者的諭示:「祖先若犯邪淫及助淫,後代俱受『犯淫』、『無子』、『破家亡身』之報」他才恍然大悟。在漸趨平和的心情下,說出自己多年來,心情的起伏與黯然無助的徬徨。
這件事,若不是當事人懺悔說出,誰會去追溯那多代?又有誰會去記錄別人家,幾代前或幾代後的事呢?
文昌帝君云:「天道禍淫,其報甚速。人之不畏,夢夢無知。」
문창제군(文昌帝君)은 민간과 도교에서 신봉하는 문운공명지신(文運功名之神)이다.

화수포(花秀圃). 작음서음화(作淫書淫畵) 절진공명(折盡功名)

화수포(花秀圃). 작음서음화(作淫書淫畵) 절진공명(折盡功名)
() 나라 때 복건성(福建省) 복주시(福州市)에 화수포(花秀圃)라고 불리는 서생이 살고 있었다. 그는 용모가 뛰어나고 총명하였으며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동네 친구들은 어려서부터 화수포(花秀圃)가 글도 잘쓰고 그림도 잘그리므로 장래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화수포(花秀圃)는 자기 스스로도 자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화수포(花秀圃)의 총명함을 정도(正道)에 사용하지 않고 연애시와 연정시와 연서와 애정 소설을 쓰고 남녀간의 규방락사(閨房樂事)와 음란하고 음탕한 그림과 나체 그림을 그렸다. 동료들에게 돌려가며 자기가 쓴 글을 읽어보라고 주었고 춘화를 보고 즐기게 하여 주었다. 화수포(花秀圃)는 자기의 작품들 은하나의 오락 작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 절대로 읽는 사람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음탕한 생각을 품게 할 줄은 전혀 몰랐다.
8 대왕 선종(宣宗 : 서기 1821 서기1850 ) 도광(道光) 갑진년(甲辰年 : 서기 1844 ) 춘 삼월에 화수포(花秀圃)의 이종 사촌 누이 동생이 화수포의 집을 방문하였다.
사촌 누이 동생은 오빠의 글재주가 뛰어났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촌 누이 동생은 오빠의 글과 그림을 보고나서 먼 고향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법도에 벗어난 행위를 하였다. 화수포(花秀圃)의 부모님들은 이와 같은 불륜의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사촌 누이 동생의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남을 발견하였다. 사촌 누이 동생은 임신을 두려워하였고 집안 어른들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얼굴을 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사촌 누이 동생이 죽은지 한 달도 채 못되어 화수포(花秀圃) 역시 병이 들었다. 갑자기 화수포의 몸에서 열이 났다가 다시 차거워졌고 두통도 있으며 위가 땅기고 통증도 있었기 때문에 의사를 불러 약도 지어 먹었다. 그러나 이틀 동안 혼수 상태에 있었다.
화수포는 혼수 상태 속에 있는 동안 사촌 누이 동생을 불렀다. 그리고 나서 큰 소리로 울부짖고 나를 끓는 물속에 집어 넣어 죽여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혼수 상태에서 깨어 난 화수포(花秀圃)사촌 누이 동생이 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나의 꿈속에서 서낭당 신령께서 나를 꾸짖었습니다. 서낭당 신은 너는 하찮은 붓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무지한 부녀자를 살해하였다.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너의 복록과 명예를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너의 죄값으로 너는80대 곤장을 먼저 맞고나서 너의 몸을 끓는 물속에 집어 넣는 형을 받게될 것이다. 그리고 너의 이름은 아귀(餓鬼)의 명부에 기록될 것이다고 말했다.” 고 가족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 이튿 날 화수포(花秀圃)의 양 다리에 갑자기 종기가 생겨 아픔을 참을 수 없었다. 일 주일 후에 온 몸에 붉은 농창이 생겨 가렵고 고름이 흘러 나왔다. 가렵기 때문에 손가락으로 긁으면 고름이 터져 나오며 고름이 묻은 곳에 종기가 또 생겨 생창은 계속 번져 나갔다. 의사를 불러 치료해봐도 치유되는가 생각하면 또 다시 재발하였다.
후에 화수포(花秀圃)는 여러 차례 과거 시험을 치루었으나 오자가 많아 낙방하였거나 정답을 쓰지 못하여 낙방되었으며 먹물로 글씨가 뭉개져서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 낙방하였다. 어느 때는 시험장 안에서 하루 종일 생각해도 정답이 떠오르지 않아 백지 시험지를 제출한 적도 있었다. 매번 과거 시험을 치룰 때 마다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화수포(花秀圃) 보다 실력이 모자라는 친구들은 모두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다.
화수포는 과거운이 없었고 사업운도 없어 하는 사업마다 모두 실패했다.화수포(花秀圃)는 후에 빈궁한 생활을 하였고 결국 굶어서 죽었다. 분명히 화수포(花秀圃)의 이름이 아귀(餓鬼)의 명부에 올라 있는 것이 틀림 없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이상의 고사는 보명연수법 중 화수포(花秀圃). 작음서음화(作淫書淫畵) 절진공명(折盡功名) 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花秀圃 작음서음화(作淫書淫畵) 절진공명(折盡功名) “福建省福州市有一書生花秀圃,聰明好學,相貌堂堂,里親友見他幼年時就有才學,書畫俱佳,都預估他將來必成大器,他自己也自命不凡;可惜,他聰明卻沒有用在正途:寫詩喜歡詞,文偏愛描述男女閨房樂事,喜歡畫春宮淫蕩、赤身露體之圖,在同儕之間傳閱;他認這些只不過是娛樂而已,卻不知道常常引動人的淫念。
道光甲辰年,春天三月的時候,花秀圃的姨表妹前來花家探親。表妹素仰表哥的文采,在瀏覽花秀圃的書畫之際,亦不免生起暇思綺想,兩人遂有不軌行,可是家長們未察覺。過些時日,表妹覺得身體狀況異常,恐已有了身孕,又怕事情被長輩知道,將無地自容,竟然自縊而亡。
大約一個月後,花秀圃得病,忽冷忽熱,頭痛、拉肚子,延醫服藥,昏睡了兩天,在昏睡時忽而喚表妹,忽而又叫「別打了!」又哭:「燙死我了!」醒來時告訴家人:「表妹是因我而死的,我夢見城隍老爺罵我:『作賤有用之筆墨,害死無知之婦女,實在可恥!應該削除祿籍、功名俱廢!責沸湯淋身之刑,先打八十大板再治罪。』之後就將我的名字納入餓冊。」家人安慰他:「不要放在心上,不過是夢境而已,別當;好好的養病,將來功名利祿少不了的。」
第二天,花秀圃的兩股俱腫,疼痛難行。一周後,全身上下長滿膿瘡,紅腫奇癢,破後瘡水所流之處又生瘡,醫治了很久,還會不定時復發。
後來花秀圃參加各種考試,不是因錯字、或文不對題,就是因墨汁汙了考卷而被淘汰;還有一次在試場整日苦思,仍然交白卷,但是出了考場又能振筆而論;每次考試總是令他捶胸頓足,不能如願,可是,實力比他差的同儕反而能入榜。科一直無緣得中,事業無成。後來,花秀圃潦倒窮困,饑餓而死;果是入了餓冊


2012년 7월 29일 일요일

사망도곤(師亡徒困)

사망도곤(師亡徒困)
() 나라 제 11 대왕 세종(世宗 : 서기 1522 서기 1566 ) 가정(嘉靖) 연간에 육궤재(陆篑斋)의 아들 육중석(锡)은 유년 시절부터 시문(詩文)에 능하였으며 타고난 자질은 남달리 총명하였다.
책을 읽고나서 모두 외웠으며 시문 따위는 한 번 읽으면 입에 익어 거침없이 술술 나왔다.
17세 때 북경에 있는 구스승 밑에서 과거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석이 거처하고 있는 구스승의 집 바로 맞은 편 집에 아름다운 소녀가 살고 있었다. 구스승과 중석은 모두 그 처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구스승은 중석에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말 것이며 무례하게 굴지 말고 처녀를 쳐다보지도 말고 품행을 단정히 하여 공부에 만 전심전력을 다하라고 권고해 주지 않았다.
구스승은 중석에게 선무문 밖에 있는 서낭당에 가면 수 많은 신령들이 있다. 신령들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얻을 수 있다. 거기 가서 성황신에게 중매를 해달라고 기도해 보아라.” 고 말했다.
중석은 구스승님의 말을 믿고 정말로 서낭당 신령에게 기도하였다. 그날 밤 중석은 서낭당에 가서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꿈을 꾸며 목놓아 울었다.
꿈에서 깨어 난 후 구스승은 중석에게 어째서 꿈에 그렇게 구슬피 울었느냐?” 고 물었다.
중석은 꿈속에서 서낭신이 스승님과 저에게 쫓아와 나에게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후에 서낭신은 복록신을 불러 저와 스승님의 이름 밑에 두 사람의 앞날에 관하여 무엇이 기록되어 있나? 검열해 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의 이름 밑에 갑술년지장원(甲戌年之壯元)” 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갑술년에 장원급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이름 밑에는 아무 공명도 없는 공백이었습니다. 서낭신은 천제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어라.’ 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의 스승이나 나는 모두 속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분수를 지키지 못했으므로 나의 장원급제와 나의 부귀공명을 삭제해 주시고 스승님의 이름 밑에 본래 아무 기록도 없었는데 저의 스승님께서 젊은 청년을 잘못 인도하여 해를 끼친 징벌로써 창자를 뽑아 내소서!”
중석은 말을 마치자 마자 큰 소리로 울며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이때 서동이 급히 중석의 방안으로 들어오며 구스승님이 급성장염으로 죽었오!” 라고 말했다.
중석은 그후 여러 차례 과거 시험을 치뤘으나 모두 낙방했으며 평생 가난하고 영락한 생활을 하였다.
중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박학다식하여 과거 시험 급제는 문제없을 것이다고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스승을 잘못 만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세상 사람들은 과거 시험 급제는 운이 가장 중요하다. 운이 없으면 때때로 지극히 작은 점수 차이로 낙방된다.” 고 말한다.
과거의 운은 어디서 오는가? 모든것은 마음에서 온다.
구선생은 어째서 그와 같은 엄중한 징벌을 받았을까?
구선생은 스승으로써 제자를 선도하지 못했으며 제자의 생각을 똑바로 잡아 주 지 못했다. 십 여세 소년의 나이엔 성욕이 눈뜨기 시작하며 쉽게 망령된 생각을 할수 있는 나이이다. 그런데 중석은 아름다운 소녀를 보고 종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상상이 매우 많았다. 만일 갑자기 욕화가 동하고 억제하지 못할 경우 막기 어려움은 물론 도덕과 의리를 그릇치고 나쁜 행실 속으로 몰입한다.
이처럼 제자를 잘못 인도하는 것은 엄중한 죄이다. 또 이 제자는 다른 제자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친다. 더 나아가서 사회에 해를 끼치고 그 여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이상의 고사는 수명연수법 중 사망도곤(師亡徒困)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明世宗嘉靖年陆篑斋之子,幼年就能能文,天资颖异,凡看很快就朗朗上口。十七那年,跟邱老住在京城准,居处对门住了一位容颜娇丽的少女,人常借机偷窥少女;位老不但有乘机生非应当端正行心一志于学问,反而告诉陆锡说:‘宣武外的都城隍,有求必去祈求城隍老爷给你们撮合。’锡真的就去祈求了。
就做狂哭不止,被叫醒后他:‘究竟何事哭得这么?’他:‘才我梦见城隍在追赶我和老,而且很严厉的斥我。然后又叫掌管福之神,看老和我,两个人名下的前途是记载?我的名字下著『甲戌年之元”而老的名字下,是一片空白,什功名也有。城隍爷说立即向天帝禀奏:我们师人居心不正,不思本作非想,立即削除我的位及功名富;老名下本即空无所有,所以惩罚为师无德、人子弟。’完仍哭未停,此僮急急忙忙的的房内说:‘邱老忽得绞肠痧死了!’
果然屡试不中,贫贱潦倒以。他年少即有才明博,理于考奏捷,登科及第,可惜遇到好老!我常听世人:‘考很重要,,往往以微分之差而落榜。’考运从哪来呢?得失全凭心地!
邱老何以受到如此重的惩罚?因他未能善任去生,匡正生的思想;十几的少年情,易生妄念,到美的少女幻想更多,如果不加抑制,欲火动时,勃然以遏止,而做出荒唐德之事,所以老如果误导学生是非常重的事,因为这生又直接或接的影的同,以致害社,如此亘下去,后果堪!"

참비름(오행초, 마치현)

명나라 때 약학가(藥學家)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보면 "마치현시인(馬齒莧是因), 기엽비병여마치(其葉比幷如馬齒), 이성활리사현득면(而性滑利似莧得名)"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마치현의 잎사귀의 모양은 말의 이빨과 같이 생겼으며 성은 비름( 莧)과 같이 활리하므로 얻은 이름이다." 는 뜻이다.



활리(滑利)란?


물체의 표면이 매끄럽고 반들 반들함을 일컫는다.



마치현의 다른 이름은 약 30여 가지나 된다. 30여 가지의 다른 이름들 중에는 많은 고사와 전설들이 깃들어 있다.



예를들면 마치현의 별명 중 오행초(五行草) 혹은 오방초(五方草)가 있는데 그것은 잎은 청색이며 줄기는 빨강색이고 꽃은 노랑색이며 뿌리는 하얀색이고 열매는 검정색이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다.


목(木 : 푸른색:간), 화(火 : 빨강색:심장), 토(土 : 노랑색:비장), 금(金 : 하얀색:허파), 수(水 : 검정색:콩팥)의 오행(五行)의 색깔을 모두 갖고있다.



마치현은 살이 통통 찌고 물기가 많고 연하며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마치현은 육질(肉質) 초본 식물에 속한다.

손으로 오행초를 만질 때 사람에게 살이찌고 몽실 몽실한 부드러운 감각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호(雅號)를 "반왜(娃)" 라고 지어 주었다.


반왜란?


"살이 포동 포동 찐 갓난아기" 란 뜻이다.



마치현은 장하(長夏)에 꽃을 피운다. 아침에 꽃잎이 활짝 피었다가 저녁에는 꽃잎을 다문다. 한 여름 무더위에 태양이 작열하는 한 낮에도 마치현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땅에 뿌리를 밖고 자라나온 것이든지 처마 기슭에 매달려 자라나온 것이든지 바람이 불거나 햇빛이 쪼이거나 상관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장수초(長壽草)란 이름을 얻었다.



흉년이 들어 농작물 수확이 없을 때는 물론이고 풍년이 들어 농작물 수확이 풍부할 때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행초를 채소로써 사용해왔다.


그래서 마치채(菜)라고도 부르며 과자채(瓜子菜), 지마채(地馬菜), 산미채(酸味菜), 장명채(長命菜), 마답채(馬踏菜), 안락채(安樂菜) 등 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마치현을 태양초(太陽草) 혹은 보은초(報恩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중 아름다운 신화 고사 한 토막을 소개한다.



상고 시대에 하늘에 열 개의 태양이 있었다. 지구는 너무나 강한 태양광선 때문에 땅이 갈라졌다. 농작물들은 불타는 듯한 햇빛에 타서 죽고 강물은 말라 바닥이 드러났다. 백성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가 굴속에서 생활하였다.


동네에서 가장 힘이 센 후예(后羿)라는 총각 용사는 활을 잘 쏘았다. 모든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그는 활과 화살이 가득한 화살 통을 어깨에 메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연속 아홉 개의 화살을 쏘아 올려 아홉 개의 태양에 적중시켜 떨어 뜨렸다.



나머지 한 개의 태양이 겁이나서 마치현 잎사귀와 줄기 밑에 숨었다. 그래서 후예의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양전(楊)이라고 불리는 풍채가 웅장하고 힘이 센 장수가 태양을 쫓아갔다. 태양이 숨어있는 마치현 잎사귀와 줄기 밑 까지 육박해 갔다. 그러나 마치현이 태양을 숨겨 주었기 때문에 살아 남을 수가 있었다.


태양은 마치현이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마치현으로 하여금 작열하는 햇볕에도 타지않게 보호하려 하였다.



매년 삼복 더위에 모든 식물들은 강한 햇빛 때문에 활기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유독 마치현 만이 생기가 넘쳐 흐르고 잎사귀에 기름기가 번질 번질하다. 또 꽃을 피워 꽃술을 내어밀고 열매를 맺어 번식한다. 이러한 이유로 태양초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당나라 때 이강(李絳)의 저서 병부수집(兵部手集)에 기록되어 있는 고사를 하나 더 소개한다.



무원형(武元衡) 상국(相國)이 서천(西川)에 있을 때 "자고경창흔양불감(自苦脛瘡焮痒不堪), 백의무효(百醫無效), 급도경(及到京), 유청리고지(有廳吏告之), 다년악창백방불차(多年惡瘡百方不), 혹은통불이자(或焮痛不已者), 병게마치현부상(幷揭馬齒莧敷上), 불과삼양편(不過三兩遍)"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좌의정 무원형은 정강이에 부스럼이 나서 가렵고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러명의 명의를 불러 치료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한 관리가 다년간 악창이 있어 백방으로 치료해도 소용이 없고 뜨거운 열이 나며 통증이 그치지 않는 사람은 마치현을 갈아서 부치면 치료되는데 불과 마치현 삼 냥이면 족하다고 말했다" 는 뜻이다.



그래서 무원형은 그 관리의 말대로 치료하여 경창(脛瘡)이 치료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마치현은 외용양약(外用良藥)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역대 의가와 민간에서 마치현을 외치법에 보편적으로 사용해왔다.



해상방(海上方)에 보면 "치주각염창(治蛀脚臁瘡)"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마치현은 정강이뼈 부근의 궤양을 치료해 준다" 는 뜻이다.



천금방에 보면 "치옹구불차(治癰久不瘥)"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마치현은 오랫동안 치료되지 않는 부스럼을 치료해 준다." 는 뜻이다.



또 전남본초(滇南本草)에 보면 "치다년악창(治多年惡瘡)"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마치현은 오래된 악창을 치료해 준다." 는 뜻이다.



이상의 모든 질병은 신라(新羅) 마치현을 갈아서 환부에 부치거나 신라마치현 가루를 상처에 발라주면 효과가 극히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新羅) 땅에서 자라는 마치현이 약효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고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과일과 채소와 곡식 등을 불문하고 한국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가장 영양분이 풍부하고 맛이 좋다.



"마치현은 우리말로 "쇠비름" 이라고 부른다.


성(性)은 한(寒)이며 미(味)는 산(酸)이고 무독하다. 모든 악창을 다스리고 대소변을 통하게 해주고 징결(結)을 부수고 지갈(止渴) 해주며 모든 충을 죽인다. 잎사귀를 약으로 사용하는데 잎이 작은 것이 효력이 좋다. 오행초라고 이름하니 잎은 푸르고 줄기는 붉고 꽃은 누르고 뿌리는 희고 열매는 검음으로서이다. 잎의 모양이 말의 이빨과 같은 고로 이름한 것이다. 청맹(靑盲)과 백의(白)를 치료하니 자말(作末)하여 물에 풀어서 마신다." 고 동의보감에 기록되어 있다.



마치현은 완고성 만성 하지궤양을 치료한다. 음경종통(陰莖腫痛),치창(痔瘡)종통, 오공교상(蜈蚣咬傷)종통과 마봉(馬蜂)교상종통과 대상포진(帶狀疱疹)과 단독(丹毒) 등을 치료한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보면 "마치현소주제병(馬齒莧所主諸病), 개지취기산혈소종지공야(皆只取其散血消腫之功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마치현은 모든 병을 치료해 준다. 왜냐하면 마치현은 산혈작용과 소종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는 뜻이다.



마치현은 약 40 가지 질병을 치료해 준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외부(外敷)는 물론 내복약으로 사용하는데 모두 양호한 효과가 있다. 청열이습(淸熱利濕) 작용과 양혈해독(凉血解毒) 작용과 산어소종(散瘀消腫) 작용이 있다.



현대 약리 실험 결과 마치현은 대장간균과 이질간균과 상한간균의 억제작용이 강하다고 나타났다.


고대 의가(醫家)와 민간에서 일 천년 전 부터 사리(瀉痢)의 치료에 마치현을 사용한 과학적 근거가 오늘날에 와서 증명되었다.


마치현에 비타민 A 가 풍부하게 들어있다. 그러므로 상피조직 즉 피부와 각막(角膜)의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해 준다.



또 로돕신(Rhodopsin : 視紅素))을 합성하며 망막의 감광성능(感光性能)을 증강시켜 준다.


마치현은 비타민 A 결핍증을 치료해 주고 피부건조와 각막연화증과 안구건조증과 야맹증과 12 지장 궤양과 구강 점막궤양 등 각종 궤양치료에 양호한 효과를 나타냈다.



마치현은 의가에서 양약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채소로 사용되며 특별한 향기가 있다.


늦은 여름철과 초 가을에 잎과 줄기가 무성할 때 채취하여 뿌리는 내어 버리고 끓는 물에 3 분 내지 5 분 동안 삶은 후 소금과 식초와 간장과 생강과 다진 마늘과 참기름과 기타 조미료를 가미하여 무쳐서 먹으면 입맛을 상쾌하게 해준다.



민간에서 마치현과 밀가루를 섞어 빵도 만들어 먹고 만두도 만들어 먹는다.


당(唐) 나라 때 식료전문(食療專門) 의사 맹선(孟詵)은 마치현과 쌀로 만든 죽을 먹으면 "제기부조(諸氣不調), 지리급감리(止痢及疳痢)"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마치현 죽은 기를 조절해주고 설사를 멎게 해주며 감리를 치료해준다." 는 뜻이다.



감리(疳痢)는 기생충이나 소화불량에 의한 어린아이들의 설사, 배가 장구통 같이 불룩하고 안색이 창백하고 얼굴이 누렇게 뜨며 푸르스름한 청백색의 똥을 누는 병이다.



농촌에서 매년 늦 여름과 초 가을 쯤 농부들은 마치현을 채집한 후 물에 깨끗이 씻는다. 끓는 물속에 집어넣고 살짝 데쳐서 건져내어 햇빛에 말린다. 채소가 부족한 겨울철과 이른 봄에 나물과 만두와 빵과 떡을 만들어 먹는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보면 마치현의 작용 중 "산혈활태(散血活胎)" 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임신부는 마치현의 복용을 금한다. 특히 습관성 유산을 경험한 임신부는 마치현의 복용을 금해야된다.

부소맥(浮小麥)과 소맥(小麥)

부소맥(浮小麥)과 소맥(小麥)의 내원은 같다.


화본과 식물 소맥의 종자를 일컫는다.


소맥과 부소맥의 틀린 점은 다음과 같다.


소맥은 속이 꽉차 있고 무게가 부소맥 보다 무겁고 물속에 집어 넣으면 밑으로 가라 앉는다. 부소맥은 무게가 소맥 보다 가볍고 물속에 집어 넣을 경우 모두 물 위에 둥둥 뜬다.


소맥의 성미는 감(), ()이고 심(), (), ()로 들어가며 양심제번(養心除煩)의 공효가 있다.


실제로 안산제번(安神除煩)은 소맥의 가장 중요한 효능이다.


감맥대조탕(甘麥大棗湯)은 감초와 대추와 소맥 세 가지 한약만 배합하여 장중경이 만든 아주 간단한 처방인데 부녀자들의 장조증(臟燥症)을 치료해 준다.


장조증이란?


심혈(心血) 부족으로 인하여 생기는 불면증, 다몽증, 심계불안(心悸不安), 상타가흠(常打呵欠 : 하루 종일 하품 만 나오는 증상), 비상욕곡(悲傷慾哭 : 마음이 상하고 몹시 슬퍼져서 울고 싶은 심정) 등을 일컫는다. 억병(: Hysteria)이라고도 부른다.


소맥의 일일 사용량은 30g 내지 60g 이다.


부소맥의 성미는 감(), (), ()이고 심과 비와 신으로 들어 간다. 익기청열(益氣淸熱)해 주고 지한(止汗)해 주는 공효가 있다.


부소맥의 가장 중요한 작용은 지한(止汗) 작용이다.


양허(陽虛)로 인한 자한(自汗)과 음허(陰虛)로 인한 도한(盜汗)이 있는 사람은 모두 부소맥으로 치료된다.


대표 처방은 독성산(獨聖散)이다.


기허(氣虛)인 환자는 부소맥과 황기와 모려와 마황근을 배합하여 사용한다. 그러면 익기(益氣), 고표(固表), 지한(止汗)해 주는 공효가 있다.


음허위주자(陰虛爲主者)는 부소맥과 지모와 황백과 구판(龜板) 등을 배합하여 사용하면 자음(滋陰), 청열, 염한(斂汗)의 공효가 있다.


또 부소맥은 음허발열과 골증노열(骨蒸勞熱) 등의 치료에도 사용 가능하다.


사용법은 부소맥 15g 내지 30g 을 수전복 하거나 살짝 볶아서 가루내어 복용한다.


위생보감(宝鉴) 5 ()에 수록되어 있는 독성산(独圣)의 처방과 공효는 다음과 같다.


方】 浮小不拘多少(文武火炒令焦)。

【制法】 上为细末。

【功能主治】 汗及汗不止。

【用法用量】 每服2,米饮汤调下。佳。



다시 말하면 적당량의 부소맥을 얕은 불로 볶아서 가루내어 매차 2 () 씩 쌀 미음으로 복용하면 도한(盜汗)과 허한(虛汗)이 그치지 않는 증상을 치료해 준다.” 는 뜻이다.


또 보제방() 189 ()에 수록되어 있는 주후방(肘后方)에서 퍼온 독성산(独圣)의 처방과 공효는 다음과 같다.


方】 糯米(微炒)。

【制法】 上末。

【功能主治】 鼻衄不止。

【用法用量】 每服2,新汲水下。

【摘】 《普方》卷一八九引《肘后方》



다시 말하면적당량의 찹쌀을 노릇 노릇하게 볶아서 가루내어 매차 2 () 씩 새로 길어 온 우물 물로 복용하면 코피가 그치지않고 흐르는 증상을 치료해 준다.” 는 뜻이다.


독성산은 한 가지 한약으로 만 조성되어 있는 신효막측한 처방인데 약 42 종류가 있다.


사천(謝遷). 거음시음과(拒淫示淫過) 일문구현귀(一門俱顯貴)

사천(謝遷). 거음시음과(拒淫示淫過) 일문구현귀(一門俱顯貴)


사천(謝遷)은 명 나라 때 절강성 여요(餘姚 : 杭州 서쪽 100km 지점) 태생이다. 사천(謝遷)은 소년 때 비릉군(毘陵郡 : 현재 江蘇省 武進縣)에 있는 부잣집에 가정교사로 취직되었다. 여요에서 비릉 까지 300km 쯤 떨어진 먼곳이다.


부잣집 소녀는 사천의 박학다식함은 물론 행동거지가 우아함에 반하여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소녀의 부모가 외출하였다. 소녀는 사천(謝遷)의 방문 앞에 가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 고백하였다.


사천(謝遷)은 열 서너살 밖에 않되는 십대 소녀가 자신의 심정을 어떻게 저와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 생각해 보았다.


사천(謝遷)은 득의양양하거나 즐거워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엄숙한 표정으로 여자는 시집가기 전에 반드시 속세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남이야 어떻게 하든 자기 한 몸만을 돌봐야 함은 물론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정중해야 합니다.


당신이 단독으로 나를 찾아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대담하게 말하는 것은 당신의 부모의 교육이 엄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경거망동한 남자를 만나면 당신의 정조를 잃게되고 그럴 경우 당신의 불결함과 치욕을 평생 숨기고 살아야 하며 친부모나 시집 부모님들에게 볼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남자를 마음속으로 존중하고 경애하는 것만이 현숙한 여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여자는 절대로 경솔하게행동하면 않되고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만 돌아가 주십시요. 오늘 이후로는 행동거지와 언행을 조심하십시요.” 라고 소녀를 타일렀다.


소녀는 사천(謝遷)의 말을 듣고나서 사천(謝遷)이 올바른 군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경솔함과 경박한 요청을 받아 들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는 것과 자신의 경솔함이 남으로 하여금 오해를 살수있게 한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소녀는 갑자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사라져 버렸다.


사천(謝遷)은 그 이튿 날 가정교사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명 나라 제 8 대왕 헌종(憲宗: 서기 1465 서 기 1487 ) 성화(成化) 년간에 사천은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하였고 편수관에 임명되었다. 9 대 왕 효종(孝宗: 서기 1488 서기 1505 ) 때 내각에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태자태보(太子太保)를 맡았으며 병부상서(兵部尙書)와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를 역임했다. 백성들은 사천(謝遷)을 현상(賢相)이라고 추대하였다.


10 대왕 무종(武宗: 서기 1506 서기 1521 ) 즉위하자 마자 무종의 스승이 되었다. 사천(謝遷)은 죽은 후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고 저서에 귀전고(歸田稿)가 남아 있다. 사천(謝遷)의 아들 사비(謝丕)는 시랑(侍郞)을 역임하였다.


이상의 고사는 수명연수법 중 사천(謝遷). 거음시음과(拒淫示淫過) 일문구현귀(一門俱顯貴)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謝遷,明朝余姚人。少年時應聘於毗陵郡(今江蘇省武進縣)富戶任家;富家女兒見謝遷少年博學,止優雅,而有愛慕之意。有一次趁父母外出時,到謝遷住處,細訴自己仰慕之情。謝遷面對著這一位豆年華的少女來訪,而且主動向自己表達心意,他不但沒有沾沾自喜,反而嚴肅的勸導少女:「女子未嫁,應當潔身自愛、止莊重;單獨來找我,一來:落人父母家不嚴之口實;二來:若遇輕狂男子,使喪貞失節,更將終生蒙垢、受人輕視,父母及夫家都無面。好男子內心尊重、敬愛的是端莊賢淑的女子,而不是輕佻、率性而的人。請快回去,今後要注意自己的言行止。」

富家女聽了,猛然醒悟,幸虧謝遷是正人君子,自己才未受輕薄;但想到自己的輕率讓人誤解,頓時羞愧得無地自容,掩面而去。

謝遷第二天就向富家辭職歸返。

明憲宗成化年間,謝遷應試,得中狀元,授修撰職。明孝宗時,以少詹事入內閣,參預機務,隨即加任太子太保、兵部書兼東閣大學士,輔政時天下皆稱之賢相。武宗嗣位,加少傅,後以年老而辭歸。卒諡文正,著有《歸田稿》。

謝遷之子,謝丕,官至侍

謝遷與少女單獨相處時不起邪心,保全少女名節又能正言規勸,此其一;當富家女自動表示好感時,謝遷卻能有守有,不攀緣富貴,此其二;因他這樣光明磊落的人格,加上努力不懈,所以不僅自己能有平坦而顯達的前途和好名聲,連子孫都蒙善護而能榮耀順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