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5일 수요일

근유(靳瑜)‧불음소녀(不淫少女) 반백득자위귀(半百得子為貴)

근유(靳瑜)불음소녀(不淫少女) 반백득자위귀(半百得子)

근유(靳瑜)는 강소상(江蘇省) 진강시(鎭江市) 사람인데 개인이 운영하는 사학당의 선생이었다. 근유(靳瑜)의 부인은 현덕한 부녀자이었고 이들 부부는 매우 화목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유(靳瑜)50이 지나도록 슬하에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 근유(靳瑜)의 부인은 자기가 애를 갖지 못함을 알고 남편에게 항상 마음속으로 미안한 감을 갖고 괴로워 하였다. 근유(靳瑜)의 부인은 적당한 여자를 물색하여 맞아 들여 자기 남편의 자식을 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사실을 남편에게 절대로 알려서는 않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암암리에 계획을 진행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후에 한 동네의 이웃집에 미목이 수려하고 총명한 처녀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가정은 매우 빈한하였다. 근유(靳瑜)의 부인은 자기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혼수품을 소녀의 부모에게 주고 딸을 데려오기로 소녀의 부모와 합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집 딸은 근유(靳瑜)의 소첩(小妾)이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근유(靳瑜)의 부인은 술상을 준비해 놓고 처녀를 불러 방안에 앉혀두고 선생님을 기다리게 하였다. 선생이 방안으로 들어간 후 부인은 남편에게 우리가 결혼 생활한지 벌써 수 십년이 흘러 갔습니다. 나는 이제 근씨 가정의 후대를 이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미 늙은 진주 조개나 마찬가지임으 진주를 더 이상 만들수 없습니다. 나의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며 근씨(靳氏) 가문의 후대가 나로 인하여 끊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소녀는 매우 청순하고 예의를 아는 처녀입니다. 그러나 집안이 매우 빈궁합니다. 내가 이 처녀의 부모님과 상의한 후 데려 온 처녀입니다. 내가 바라옵기는 당신이 이 처녀를 통하여 근씨 가문의 대를 이을 것을 희망합니다. 이와 같은 큰 일을 남편인 당신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나 혼자서 결정한 것에 대하여 책망하시거나 원망하지 마십시요.” 라고 말했다. 근유(瑜)는 부인의 말을 듣고나서 소녀를 다시 한번 더 쳐다 보았다. 처녀의 얼굴과 귀는 새빨개지고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부인은 남편의 마음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방문을 나와 문을 닫고 빗장을 걸어 잠그었다. 남편은 도리어 창문을 뛰어 넘어 밖으로 나와서 부인에게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 만 내가 받겠는데 저 아이는 어렸을 때 내가 안아주고 보듬어 주고 달래주고 어르고 했던 아이입니다. 그래서 나는 저 아이가 내 딸아이 처럼 보입니다. 저 아이는 이제 다 컸으니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야 합니다. 오늘 저 아이를 당신이 나의 후대를 잇기 위하여 나의 소첩으로 데려왔는데 나는 매우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늙었습니다. 저 젊은 처녀의 청춘을 망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자식이 있고 없고는 운명이 정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 말했다. 부인은 남편의 말을 듣고나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부인은 남편의 성질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소녀를 다시 부모님 집으로 돌려 보내 주었다. 그리고 부인은 소녀의 부모에게 맡긴 자기의 혼수품을 팔아서 돈을 만들어 환금해 주었다. 이듬 해 부인은 뜻밖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부부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하늘이 내려 준 귀(貴)한 아들이라고 이름을 귀()라고 지었다. ()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하여 부모들이 신경을 쓰지 않해도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17세 때 향시(鄕試)에서 장원급제 하였고 다음 해 예부에서 실시하는 회시(會試)에서 합격하여 공인(貢人)이 되었으며 또 전시(殿試)에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후 귀는 한림원(翰林院)의 편수관(編修官)에 임명되어 국사를 편찬하였다. 최후로 귀는재상(宰相)의 자리에 올랐으며 근귀의 정치 업적은 조정내에서는 물론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사람들은 근귀를 현상(賢相)이라고 칭했다. 근귀(靳貴)가 죽은 후 조정에서는 근귀를 문희공(文僖公)에 추봉(追封)하였다. 이상의 고사는 보명연수법 중 근유(靳瑜)불음소녀(不淫少女) 반백득자위귀(半百得子)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靳瑜,江蘇省江市人。性敦厚樸實,在一所私人學堂當老師。妻子賢德,家庭和睦;可是,年逾五十仍然無兒無女,他的妻子了自己未能生育而深感內疚,總想找一位適當的女子,娶回來先生生兒育女。並沒有把這個想法告訴先生,而是暗自進行著。後來在同里巷中見到鄰家女兒已長大成人,秀外慧中,但是家庭貧苦;於是夫人便典賣自己陪嫁的首飾幫助這一家人,也得到女孩父母的同意,將娶回做先生的小妾。
這一天,夫人準備了酒菜,並且喚女孩一起在內房等候先生回來。待先生進房後,夫人告訴他:「這多年了,我沒有靳家留下後代,如今已是老蚌,無力生珠,不能因我個人的因素,而讓靳家斷了後代。這女孩秀知禮,家境貧窮,我自作主張的與父母談好、買回家來,希望能靳家傳宗接代。這件事,事先沒跟夫君商量,但願夫君不要責怪才好。」
靳瑜聽了這些話,再看看女孩,隨即面紅耳赤,低頭不語。夫人心想:可能是因自己在場,老夫子覺得不好意思;於是藉故離開,並且將房門由外上。
卻見靳瑜越窗出來,並且對夫人說:「夫人的美意我心領了。這女孩小的時候我曾抱、牽、哄,我把當女兒看待,希望長大能有好的歸宿。如今,夫人讓她為我傳宗接代,我覺得很羞愧!我已年老,不能糟了姑娘的春!況且有子無子皆由命定,求不得!」
夫人聽了默不作聲,知道靳瑜的個性,於是只好將女孩送回父母的身邊,至於那些變賣首飾的錢,就當作助人一臂之力。
次年,夫人卻意外有孕生子,夫婦二人高興得不得了,認是天賜貴子!取名靳貴。
靳貴字充遂,自幼聰明好學,讀書不用雙親操心,十七歲於試中得第一名(解元),次年於禮部考試又得進士,在翰林院職司編修,掌理國史;官至宰相,政績甚得朝廷與百姓的推崇,人人皆稱賢相。死後追封「文僖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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