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부(義夫) 오억천(鄔憶川)
오억천(鄔憶川)의 자(字)는 맹진(孟震)이고 절강성 태생이다. 29 세 되던 해 오억천의 부인 하씨(何氏)는 죽었다. 억천은 죽은 부인을 생각하며 자녀를 양육하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저녁에 늦게 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억천은 후처를 갖지 않기로 맹세했으며 편안한 생활에 빠지지 않고 연애할 마음도 없었으며 오직 자식을 돌보는데 있어서 절대로 소홀하지 않았다. 한 동네에 살고 있는 부자 과부가 억천의 소식을 듣고 억천이 죽은 부인에 대한 정이 깊다는 것을 알았다. 이 과부는 억천을 진정으로 공경하고 우러러 봤기 때문에 마음에 들어서 중매쟁이에게 많은 돈을 주며 중매를 한 번 서 보라고 청했다. 억천은 화를 벌컥내며 ”여자는 응당 한 남편 만 죽을 때 까지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죽은 남편을 위하여 수절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정결케 하고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고대의 부녀자들이 덕(德)을 쌓고 복(福)을 누린 본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이 그녀 대신 돈을 가지고 와서 나와 상의하려 하는데 내가 색(色)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매우 수치를 느낍니다. 내가 돈도 갖고 사람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중매쟁이에게 말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억천을 경모하게 되었다. 몇몇 부유하고 권세가 있는 집안에서 억천이 재물을 탐내지 않고 가산을 탈취할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 딸 자식을 가진 학자풍의 선비 집안에서도 억천의 인격을 경모하였기 때문에 딸 자식을 억천에게 시집 보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억천은 일언지하에 모두 거절했다. 억천은 혼자서 고생을 참고 견디어 가면서 두 아이를 배불리 먹이고 의복도 잘 입혔으며 곁에서 공부 시중도 들어주었다. 억천은 상처했지만 다시 재혼하지 않는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첫째 억천은 항상 망처(亡妻)를 생각하며 살았고 둘째 남녀간에 연애할 경우 자녀들의 교육에 소홀함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세월 동안 억천이 겪은 고생도 고생이지만 성가시고 번거롭고 귀찮은 일들도 많이 있었다. 후에 관청에서 억천에게 많은 양식과 포목 등을 하사하였고 억천의 집 대문 앞에 ”의부(義夫)” 라고 쓰여진 편액(匾額)을 걸어 주었다. 억천의 아들 오원회(鄔元會)는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신안(新安)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이상의 고사(故事)는 보명연수법(保命延壽法)에 수록되어 있는 의부(義夫) 오억천(鄔憶川)이다.
원문(原文)은 다음과 같다.
“의부(義夫) 오억천(鄔憶川) :
鄔憶川,字孟震,浙江人。當他二十九歲時,妻子何氏去世;憶川感念妻子為他生育子女、受諸苦惱,日常早起晚睡,憂勞操持直至衰亡,因此,發誓不再續弦,不耽逸樂,也不迷戀男女之欲,免得因此而忽略了對孩子的照顧。
鄉里中有一位富孀,聽到有關憶川的傳言,感歎憶川對亡妻的情深義重,由敬仰而生情愫,於是請媒人攜鉅金為她撮合。憶川勃然而怒的對媒人說:「女子應當從一而終,她應該為夫守節,要求自己清心寡欲,效法古時婦女立德修福。你替她帶著這些錢財來說合,是要羞辱我既愛財又好色,想人財兩得,是嗎?」媒人被說得羞慚萬分,只得告退。
這件事一經傳開之後,仰慕億川的人就更多了。有些富紳豪門因為他不貪財,不會有謀奪家產的顧慮;書香門第的人家敬仰他的人格,都願意將少女嫁給憶川;憶川均一一拒絕。
他獨自含辛菇苦的照顧兩個孩兒衣食溫飽,陪他們讀書作息。鄔憶川喪妻不娶的堅持,是吊念亡妻,更是為了避免:因男女愛戀而忽略了子女的教育;雖辛苦,但省卻不少麻煩事。後來,地方官知道這件事,特地賜給他豐厚的穀糧及布疋,並致送匾額於門庭之上,題曰:「義夫」。
憶川之子鄔元會,學優而仕,官至新安太守,受人愛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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