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9일 일요일

왕불류행(王不留行)

왕불류행(王不留行)
왕불류행(王不留行)에 관한 다음과 같은 고사(故事)가 있다.
王不留行北方有一段歌謠說:穿山甲,王不留,大閨女喝了順懷流。誇張地說出了王不留行的通乳作用。那王不留行不過是一種草的種子,怎麼起了這個怪名字呢?傳說王不留行這種藥是藥王邳彤發現的,經實驗,具有很好的舒筋活血、通乳止痛的作用,可是給起個什名字呢?邳彤想起當年王莽、王曾來過這裡的事。王率兵追殺主公劉秀,黃昏時來到邳彤的家,揚言他們的主子是正的漢室後裔,劉秀是冒充漢室的種,要老百姓給他們送飯送菜,並讓村民騰出房子給他們住。這村裏的老百性知道他們是禍亂天下的姦賊,就不搭他們的兒。天黑了,王見百性還不把飯菜送來,不由心中火起,便帶人進村催要,走遍全村,家家關門鎖戶,沒有一縷飽煙。王氣急敗壞,揚言要踏平村莊,斬盡殺。此時一參軍進諫道:此地紗帳起,樹草叢生,莊稼人藏在暗處,去找。再說就是踏平十會村莊也解不了兵將的饑餓,不如緊離開此地。另作安頓,也好保存實力,追殺劉秀。王郎聽了,才傳令離開了這個村莊。
邳彤想到這段歷史,就給那草藥起了個名字叫王不留行,就是這個村子不留王莽、王
食宿,借此讓人們記住得人心得天下的道理
다시 말하면 ”’천산갑과 왕불류행은 부녀들이 복용한 후 젖이 잘나온다.’ 는 민요가 있는데 약간 과장된 말이기는 하지만 이는 왕불류행의 통유(通乳) 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왕불류행은 일종의 초약의 씨앗이다. 어째서 왕불류행이란 괴상한 이름을 얻었을까?
전설에 의하면 왕불류행은 약왕 비동(邳彤)이 발견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왕불류행은 통유 작용과 지통 작용과 서근활혈 작용이 있는데 왕불류행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비동은 그 당시 왕망과 왕랑의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였다.
왕랑은 군대를 이끌고 유수를 잡아 죽이려고 추격하던 중 황혼이 되어 비동의 동네로 들어갔다. 왕망의 군대들은 왕망이 진정한 한실(漢室)의 후예이지 유수는 한실의 서자인체 가장 한다고 떠들어 댔다. 그러면서 이 동네 노인들에게 군대들이 먹을 밥과 반찬을 가져오라고 요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군대들이 쉬었다가 묵어갈 수 있는 방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동네 노인들은 왕랑의 무리들은 천하의 간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상대하기 조차 꺼려하였다. 날이 점점 저물어 감에도 불구하고 동네 사람들은 왕랑의 군대들이 먹을 밥과 반찬을 가져오지 않았다. 왕랑은 부하들에게 명하여 군대들의 식사 준비를 속히 하라고 동네 사람들을 재촉하라고 명하였다.
왕랑의 군대들은 동네 속으로 들어가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뒤지기 시작하였다. 저녁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밥을 짓는 연기는 한 줄기도 굴뚝 속에서 올라오지 않았고 대문을 모두 꽉꽉 닫아 놓았다.
왕랑 장군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군대들에게 온 동네를 삿삿이 뒤져서 보이는대로 촌민을 모두 학살해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 왕랑 군대의 참모가 이 동네엔 풀과 농작물이 무성하게 자라 몸을 숨기기에 좋은 푸른 장막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풀밭 속으로 숨어 버렸기 때문에 찾을 수 없습니다. 수풀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지쳐서 장병들이 굶어 죽을 것 같으니 속히 이 동네를 떠납시다. 그리고 군대들을 안정시켜 남은 여력으로 유수를 계속 추격합시다.” 고 말했다.
왕랑은 참모의 말을 듣고 나서 전군에게 명하여 이 동네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비동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며 이 동네에 자라고 있는 풀의 이름을 왕불류행이라고 명명하였다.
왕불류행(王不留行)의 숨은 뜻 속에는 이 동네에서는 왕망과 왕랑의 숙식을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득인심득천하(得人心得天下)’ 의 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인심을 얻어야 천하를 얻는다.’ 는 좌우명을 일컫는다.” 는 뜻이다.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곡양구탑(曲陽狗塔)

하북성(河北省) 곡양현(曲陽縣) 문덕향(文德鄕) 왕대북촌(王臺北村)의 백초(白草) 언덕에 고탑(高塔)이 하나 서있는데 이 탑은 동한(東漢 : 서기 25 년 - 서기 189 년) 광무제(光武帝 : 서기 25 년 - 서기 57 년)의 의로운 개를 위하여 건립된 탑으로써 곡양구탑(曲陽狗塔)이라고 칭하는데 다음과 같은 광무제 유수(劉秀)와 관련된 고사(故事)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西末年,王莽篡权,改国号为新朝,而其荒淫无道,新朝上下官吏皆虎作,助纣为虐,天下哀鸿遍野。推翻王莽的治便在河南南起兵,之后被王莽的大王朗一路追天,到曲阳县王台北村南的白草坡上,便藏在草中。时值秋末,白草坡上的草已,一点即燃。追兵一找不到秀,就始放火山。
眼看秀即葬身火海,突然王台北村跑来狗,只见它附近的一水塘中,然后再湿淋淋地秀身边滚,把其周的枯草弄湿。就这样,那条黄狗周而始,一次次地在枯草上翻于制止住烈火的蔓延,而保住了秀的性命,但那条黄狗却因累而死去。秀十分感激这条性的犬,将它埋葬在白草坡上才离去。帝以后,念念不忘那条义犬的救命之恩,就令曲阳当地石匠在那白草坡上修建了一座高塔,以示对义犬永久念,而那白草坡也被后人称为狗塔坡。曲阳县在西汉时就是有名的雕刻之,那狗塔全部是用地出白玉及瓦精雕筑成,共13,高50米,塔形呈平面八角形,每四面均有券,塔身各高度及塔自下而上逐层递减,收分得体。狗塔底座四面的板上,雕刻着的犬,栩栩如生,引人入。狗塔第一的外壁上刻有光武帝为义自撰的祭文,塔一至四的石壁上刻有浮雕壁:第一犬救惊险场面,赞颂犬舍死救人的精神;第二荆轲刺秦王面,表了燕国侠荆轲不畏强暴、舍死报国的英雄气概。第三秀大面,曲石雕人通自己的艺术构精湛的雕刻技,使活生生的然于石之上,以此表光武帝秀推翻王莽、天下服的正;第四雨耕,此浮雕刻的是夫赶着耕牛在清风细雨中作的面,表帝之后,人安居乐业风调、五谷丰登的社会现状狗塔的那些浮雕作品,构图严谨,布局匀称,刀工细腻,形象逼艺术高,代表着当时雕刻人的技水平。
狗塔是中最早的念碑式大型石雕建筑物之一,也是中国东汉时期石雕艺术成就高的建筑物。令人痛惜的是,座矗立了近千年的狗塔因年久失修在上世六十年代倒塌,但光武帝感恩筑狗塔传说片古老的土地上。" 
다시 말하면서한 말년 왕망이 정권을 탈취한 후 국호를 신()이라고 칭했다. 왕망은 황음무도한 정치를 했으며 조정의 상하 관리들은 모두 왕망의 앞잡이가 되어 왕망을 도왔기 때문에 도처에 이재민이 가득했다.
이때 유수는 하남성 남양에서 왕망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거를 일으켰다. 유수는 왕망의 대장군 왕랑을 죽이고 나서 곡양현 왕대북촌의 남쪽에 있는 백초언덕의 풀속으로 도망쳐 숨어 있었다.
때는 늦가을 이라서 백초 언덕의 풀들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유수를 뒤쫓아 오던 왕망의 군대들은 유수가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머지 산에 불을 질렀다. 이제 곧 유수의 몸은 불바다 속에 묻혀있을 찰라였다.
이때 돌연히 누런 큰개 한 마리가 뛰어와서 근처에 있는 연못속으로 들어가 뒹굴더니 온 몸에 물을 묻혀 유수의 주위에 있는 마른 풀에 물을 척척하게 발랐다. 결국 불길은 유수가 숨어있는 곳을 덮치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유수는 살아 남을 수 있었고 황구는 지쳐서 그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유수는 의로운 황구를 그 자리에 묻어주고 무사히 백초언덕을 떠났다. 유수가 동한을 건립하고 초대왕 광무제로 군림한 후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준 황구의 생각이 계속 머리속에 떠올라 곡양현의 석공(石工)들에게백초언덕에의견(義犬) 황구(黃狗)위한석탑을높이세우라고어명을내렸다.
그후부터사람들은백초언덕을구탑언덕이라고칭했다.
곡양현은서한조각의고향이었으며구탑은당지에서생산되는백옥(白玉)벽돌과기와를사용하여건축되었으며13 층으로높이는50m 이다. 탑의모양은팔각형이고매층마다4 면에아치형문을냈으며위로올라갈수록탑의높이와탑경(塔徑)점점좁아진다.
구탑의가장부분에백개의여러모양의개를살아있는처럼생동감있게조각하였기때문에사람들을끌어당기게만들어주고있다.
구탑의층에는광무제유수가의견(義犬)위하여친히제문(祭文)있다. 탑의1 층에서4 까지석벽에아름다운벽화도그려져있다.
1 층에는의견(義犬)유수를구해주는아슬아슬한장면이묘사되어있고사람들로하여금의견이자기몸을희생시켜사람을구해의견을칭송하게만들어주고있다.
2 층에는 형가다진왕(荆轲刺秦王)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 나라의 협객 형가(荆轲)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하여 보여 준 영웅적인 기개가 담겨있는 그림이다.
3 층에는 유수가 곤양에서 전투하는 장면을 묘사해 놓았다. 이는 석공들이 심혈을 기울여 생동감있게 유수가 왕망 정권을 전복시키는 장면이다.
4 층에는 전원우경도라고 칭하는데 청풍세우(淸風細雨) 중에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장면인데 유수가 왕이 된 후 백성들은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오곡이 풍성한 사회상을 잘 묘사한 그림이다.
구탑의 조각은 구도가 빈틈없고 합리적으로 배치되었으며 실물과 똑 같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 곡양의 석공들의 탁월한 조각 기예(技藝)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곡양구탑은중국에서가장오래된대형건축물하나이며동한시대의조각예술이훌륭했었다는것을나타내주고있다.
그러나거의2000동안면모를유지해오던구탑은1960대에수리를잘못하여애석하게도무너져버리고말았다. 그러나광무제의황구에대한은혜에감사하여건립한구탑의전설은지금도살아서탑이있던바로자리에남아있다.” 뜻이다.

2012년 4월 28일 토요일

밀타승(密陀僧)


밀타승(密陀僧)

다음은 밀타승(密陀僧)에 관한 고사(故事) 한 토막이다.

密陀僧(化鉛)在中嶽嵩山中,有一樵夫,一日進山柴,忽遇一隻惡狼向他撲來,好在他眼急腿快,命奔走,方才免狼食。但因驚嚇俘度,回家後得一怪病,失音不能言語,多天難愈。一日,遇一僧人路過,自稱能治此病。那僧人取出一塊似銅非銅、似金非金的東西,末後讓樵夫用茶水調服。樵夫服藥後,很快便感覺渾身輕鬆,失音不語的症狀隨即消失。樵夫向那僧人詢問藥物的名藥,那僧人並不作答,只是連聲念起阿密陀佛!阿密陀佛!後來,那樵夫在一家銀匠家裏發現煉銀爐爐底的殘渣很象那僧人給他治病的藥,便也試著給人治病,果然也有效果,別人問他這藥的名字,他一時無言以對,因想起僧人給他治病時口念密陀,便靈機一動,說這藥名叫密陀僧

다시 말하면 옛날 중악숭산에 한 나무꾼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땔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다. 홀연히 흉악한 이리 한 마리가 그를 향하여 쫓아오고 있었다. 나무꾼은 재빨리 자기를 향하여 달려 오는 이리를 보고 필사적으로 도망쳐 위험을 간신히 면했다.

나무꾼은 얼마나 놀랬던지 집에 돌아오자 마자 괴병이 생겨 자리에 드러눕게 되었다. 실음(失音)이 되어 말도 할수 없었으며 오랫 동안 병이 치유되지 않았다.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 한 분을 만났다. 스님은 나무꾼을 보더니 나무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님은 구리 조각도 같고 쇠붙이와도 같은 물건을 꺼내어 갈아서 가루내어 나무꾼에게 찻() 물과 함께 복용시켰다. 복약후 나무꾼의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워 졌고 실음증상도 사라져서 말도 할수 있었다.

나무꾼은 스님에게 저에게 복용시킨 약물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고 물었다. 스님은 약명은 가르쳐 주지 않고 계속 아미타불! 아미타불!” 만 외우고 있었다.

얼마 후에 나무꾼은 은세공(銀細工) 기술자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은세공 기술자의 집안에 있는 은()을 제련하는 용광로 밑바닥에 찌꺼기를 발견했는데 영락없이 스님이 자기의 병을 치료해 준 약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나무꾼은 그 찌꺼기를 얻어다가 한자들을 치료해 보았더니 신효막측한 효과가 있음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그 약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무꾼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스님이 자기의 병을 치료해 줄 때 계속 아미타불을 외우는 모습을 기억해 냈다. 나무꾼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사람들에게 그 약의 이름은 밀타승(密陀僧)” 입니다고 대답했다.” 는 뜻이다.

아미타불이란?

서방(西方) 정토(淨土)에 있다는 부처의 이름이다.

밀타승은 신수본초(新修本草)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는 산화연(酸化鉛 : Oxiized Lead : PbO)이고 학명은 Lithargite 이며 뇌공포자론에 밀타승, 신수본초에 몰다승(沒多僧), 본초강목에 로저(爐底), 약물출산변(藥物出産辨)에 은지(銀池), 현대실용중약에 은로저(銀爐底)라고 각각 기록되어 있다.

처방명은 밀타승이다. 연광(鉛鑛)에서 은()을 제련할 때 연()이 용광로의 밑바닥에 침적(沈積)되는데 바로 이것이 밀타승이다. 또는 연()을 제련하는 용광로 속에 무쇠 막대기를 집어 넣고 휘저은 다음 무쇠 막대기에 달라붙어 있는 연()을 찬물 속에 집어 넣어 냉각시킨 후 형성되는 것이 산화연인데 이것이 바로 밀타승이다.

밀타승의 성미(性味)는 함(), (), (), 유독(有毒)이다. ()과 비()로 들어 간다.

본초강목에 보면 치제창(治諸瘡), 소종독(消腫毒), 제호취(除狐臭).”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밀타승은 모든 창과 종독(腫毒)을 치료해 주고 액취(腋臭 : 암내)를 제거시켜 준다.” 는 뜻이다.

밀타승은 지혈(止血) 작용이 있으므로 치창(痔瘡)과 구리(久痢)와 창상(創傷) 등을 치료해 준다.

또 일화자본초에 보면 진신(鎭心), 보오장(補五臟), 치경간수구급토담등(治驚癎嗽嘔及吐痰等).”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밀타승은 마음을 진정시켜 주고 5 장을 보해 주며 경풍과 해수와 구토와 담을 제거시켜 준다.” 는 뜻이다.

내복 할 경우 0.3g 내지 0.9g 이며 외용할 경우 가루내어 환처에 발라 준다.

(1) 밀타산의 처방은 다음과 같다.

포황 15g, 황약자 15g, 밀타승 30g, 황백 30g, 감초 30g 을 가루내어 구설생창(口舌生瘡)에 발라주면 치유된다.
(2) 액하호취방(腋下狐臭方) : 밀타승을 기름과 혼합하여 겨드랑이에 발라 준다. 겨드랑이에서 나는 악취를 제거시켜 주는 처방이다.

본초경소(本草經疏)에 보면 대도가외부(大都可外敷), 불가내복(不可內服).”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밀타승은 대부분 외용하나 내복은 삼가해야 된다.” 는 뜻이다.

하남성 중악숭산은 천하에서 제일 유명한 명사찰(名寺刹) 소림사(小林寺)가 자리 잡고 있는 명산(名山)이다. 하남성 등봉시(登封市) 서북쪽에 있다.

중국 내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다음과 같은 6 가지 유적이 현존하고 있다.
(1)   선종조정(禪宗祖庭) – 소림사
(2) 최대탑림(最大塔林) – 小林寺塔林
(3) 가장 오래된 탑 북위(北魏) 崇岳寺塔
(4) 가장 오래된 궐() – 한삼궐(漢三闕)
(5) 가장 오래된 백수(柏樹 : 측백나무 () 나라 때 將軍樹
(6) 가장 오래된 첨성대 () 나라 때 관성대(觀星臺).

숭산에 72 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중 가장 높은 봉우리는 1491.7m이다.

숭산은 중국 불교의 발상지(發祥地)이고 유교의 탄생지이며 도교의 성지(聖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