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1일 토요일

삼종사덕(三從四德)

삼종사덕(三從四德)이란? 송명(宋明) 이후 여자들의 행위 규범이었다.
삼종(三從)미가종부(未嫁從父), 출가종부(出嫁從夫), 부사종자(夫死從子)를 의미한다.
미가종부(未嫁從父)?
아직 시집가지 않은 여자들은 부모에게 효순해야 하며 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결혼식 전에 어머니는 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수여(男帥女), 여종남(女從男), 부부지의종차시(夫婦之義從此始), 모친정촉여아불가위배장부적명령(母親叮囑女兒不可違背丈夫的命令).”
다시 말하면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남자는 여자를 통솔하고 여자는 남편을 따라야 한다. 부부는 이렇게 시작하느니라. 내딸아! 절대로 남편의 명령을 거스리면 않된다. 신신당부한다.” 는 뜻이다.
종부(從夫)에 관한 속어(俗語)천명불가도(天命不可逃), 부명불가위(夫命不可違), 필수순종(必須順從), 경중장부(敬重丈夫), 부창부수(夫唱婦隨).” 란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천명은 피할 수 없고 남편의 명령은 거역하지 못한다. 반드시 남편을 존중하고 남편의 말에 순종해야 되며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 는 뜻이다.
출가종부란?
시집간 여자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뜻이다.
부사종자란?
과부에게 해당되는 말인데 종자는 종부의 연속으로써 재가하지 말고 수절해야 되며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자식을 보양해야 된다는 뜻이다.
사덕(四德) :
상층 계급 가정에서는 여자의 나이가 열 살이 되면 선생님으로부터 부도(婦道)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부도 교육 중에는 완만청종(婉娩聽從)과 유순청화(柔順聽話)와 직포제의(織布製衣)와 제사와 관계된 모든 절차와 예법과 술 담그는 법과 바느질 하는 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사덕(四德)을 배운 여자 아이들에게 부순(婦順)이란 의식을 행하였다.
사덕은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조건으로써 부덕위정순(婦德謂貞順), 부언위사령(婦言謂辭令), 부용위완만(婦容謂婉娩), 부공위사탁(婦功謂絲橐)을 일컫는다.
부덕(婦德)은 정조가 굳고 순함을 뜻하며 부언(婦言)은 남과 대화하는 법과 지켜야 할 예의와 타인의 말을 잘 이해하고 자기가 해야할 말과 해서는 않되는 말을 선택하는 법 등을 말하고 부용(婦容)은 용모가 단정하고 예의를 지키며 경거망동하지 않고 말을 부드럽게 하며 얌전하고 온유함을 뜻한다.
부공(婦功)이란?
치가지도(治家之道)를 말하며 교자(敎子)와 존노애유(尊老愛幼)와 근검절약(勤儉節約)과 수화(繡花)와 직포(織布) 등 생활방면에 관한 것 등이다.
삼종사덕은 중국 부녀 도덕을 지배한 부녀들의 도덕표준과 행위표준과 능력표준과 수양표준이 되었다. 여성들을 속박한 봉건 예교(禮敎)이었다.

시어머니에게 불효(不孝)하면…

시어머니에게 불효(不孝)하면


청 나라 때 양공진(梁共辰)의 저서 지상초당필기(池上草堂筆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역부조우천견적(逆婦遭遇天遣的) 고사(故事) 두 편이 실려 있다.


다시 말하면 "시어머니에게 불효하면 천벌을 받게 된다." 는 고사이다.


고사(故事) 1.


양씨기건륭기유기유십일월상숙동남임양현유일개불효부인의욕살기가고적정황(梁氏記乾隆己酉十一月常熟東南任陽縣有一個不孝婦人擬欲殺其家姑的情況), 타선장독약방재병중(先將毒藥放在餠中), 연후외출(然後外出). 기가고취병흘시(其家姑取餠吃時), 홀연일걸개로과(忽然一乞路過), 구기병이충기(求其餠以充飢), 가고여지(家姑與之), 걸개이일록능삼급여노부이표사의(以一綠綾衫給與老婦以表謝意). 역부반가후(逆婦返家後), 가고이사정상고(家姑以事情相告), 병이녹능삼출시부인(幷以綠綾衫出示婦人), 부인견삼심미(婦人見衫甚美), 쟁욕천상(爭欲穿上), 즘지천상후홀연부지신음(知穿上後忽然仆地呻吟), 편각즉변성일두저라(片刻卽變成一頭猪).”


다시 말하면 건륭 기유년 11 월 임양현 동남쪽에 시어머니를 살해 하려는 음모를 꾸민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악독 며느리는 떡 속에 독약을 집어 넣어두고 외출하였다.


시어머니가 독약이 들어있는 떡을 먹으려고 할 때 홀연히 거지 한 명이 지나가다가 시어머니의 집안에 들어와 떡을 좀 달라고 구걸하였다.


시어머니는 먹으려던 떡을 거지에게 주었다. 거지는 주린배를 떡으로 채우고 감사함을 표시하기 위하여 초록색 능단 적삼을 할머니에게 드렸다.


악독 며느리가 집에 돌아왔다. 시어머니는 거지에게 떡을 주고 거지로부터 능단 적삼을 받았다고 며느리에게 말했다. 며느리는 능단 적삼이 욕심났고 입고 싶었다.


며느리는 초록색 능단 적삼을 뺏어 입었다. 며느리는 갑자기 땅바닥에 쓰러지며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며느리는 바보가 되었다.


고사(故事) 2


역부변려적고사직발생재섬서성고현향(逆婦變驢的故事則發生在陝西城固縣鄕). 해향유일한부(該鄕有一悍婦), 대대가고심가(對待家姑甚苛), 인인증여견책(隣人曾與譴責), 단병미능산생작용(但幷未能産生作用). 가경경진정월초일일(嘉慶庚辰正月初一日), 해부기상불구(該婦起床不久), 홀연오장초통(忽然五臟楚痛), 와지불기(臥地不起), 경각간(頃刻間,일퇴이변성려퇴(一腿已變成驢腿,계지변성일두려자(繼之變成一頭驢子), 경과수월(經過數月), 려자사거료(驢子死去了)!”


다시 말하면 악덕 며느리가 당나귀로 변했다는 고사는 섬서성 고현향(固縣鄕)에서 발생했다. 성질이 사납고 난폭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매우 가혹하게 대했다. 이웃 집 사람들은 이와 같은 악독한 며느리의 시어머니에 대한 불미스러운 행실을 꾸짖었다. 이 악독 며느리는 아기도 낳지 못한다.


청 나라 제 7 대왕 인종(仁宗 : 서기 1796년 - 서기 1820 년) 가경(嘉慶) 경진(庚辰) 정월 초 하룻날 악독 며느리는 오랫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자 마자 갑자기 배가 아파 대굴 대굴 땅바닥에서 딩굴며 일어나지 못했다. 삽시간에 며느리의 한 쪽 다리에 털이 나더니 당나귀 다리 처럼 변했다. 이윽고 며느리의 머리도 당나귀의 머리와 똑같이 변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악독 며느리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는 뜻이다.


첫번 째 고사의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죽이려고 했으며 두번 째 고사의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노비 처럼 학대하였다

2012년 3월 30일 금요일

당(唐) 나라 때 여성들의 화장

() 나라 때 여성들의 화장
당 나라 때 여성들의 화장술은 현대 여성들의 화장술에 비하여 조금도손색이 없었다. 당 나라 때 호인(胡人)들의 풍속이 전입되어 사회는 종전 보다 개방적이었고 궁인(宮人)들과 궁기(宮妓)들이 흥성하기 시작하였다. 그외 민간 부녀자들의 사화활동도 활발해 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부녀자들은 용모 장식에 상당한 비중을 두기 시작하였다.
당대(唐代)의 미녀(美女)검상금하세(上金霞細), 미간취전심(眉間翠鈿深).” 이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하면 두 뺨은 금가루를 뿌려 놓은 아침 노을빛과 같고 양미간에는 짙은 비취빛 꽃무늬!” 라는 뜻이다.
당대 여성들은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 연지를 칠하고 얼굴에 분을 바르는 화장술을 연구하였다.
고대 부녀자들의 눈썹 화장술을 보면 본래의 눈썹을 면도로 깨끗이 밀어 버리고 버드나뭇 가지를 태운 재로 만든 청흑색(靑黑色) 물감으로 여러가지 모양의 눈썹을 그려 넣었다. 이와 같은 눈썹 화장을 대미(黛眉)라고 칭했다.
당 나라 때 부녀자들이 사용한 대미의 명칭은 여러 종류가 있다. 가늘고 긴 눈썹은 아미(蛾眉)라고 불렀고 폭이 넓은 눈썹은 광미(廣眉)라고 불렀다. 잠화사여도(簪花仕女圖)의 귀족 부녀자들의 눈썹은 광미이다.
당시(唐詩)에 보면 청대점미미세장(靑黛點眉眉細長)” 이란 시구(詩句)가 있다.
다시 말하면 짙은 푸른빛으로 그린 가늘고 긴 눈썹!” 이란 뜻이다.
교윤경대약잔장(輕黛約殘粧)” 이란 시구도 있다.
다시 말하면 솜씨있고 고르게 칠한 어렴풋이 남아있는 눈썹 화장이란 뜻이다.
당 나라 현종(玄宗)은 화공(畵工)들에게 명하여 십미도(十眉圖)”를 그리게 하였다. 그중 원앙(鴛鴦), 소산(小山), 오악(五嶽), 삼봉(三峯), 수주(垂珠), 월능(月稜), 분초(分梢), 함연(涵煙), 불운(拂雲), 도훈(倒暈) 등이 있다.
가늘고 긴 선녀들의 눈썹 처럼 거의 두 번 그린 눈썹 등 눈썹의 모양에 관하여 연구를 많이 한 흔적이 보인다. 또 양미간에 꽃 무늬 장식 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꽃 무늬 장식을 하고 이마에 금속으로 만든 꽃 무늬 장식도 붙였다. 당말(唐末) 까지 입술에는 석류교(石榴嬌)와 대홍춘(大紅春)과 성성훈(猩猩暈) 등 연지를 발랐다.
그리고 얼굴 전체에 백분을 바르고 난 후 양쪽 볼에 연지를 짙게 또는 얕게 발라주는 화장법이 유행했었다. 주훈장(酒暈粧), 도화장(桃花粧), 비하장(飛霞粧) 등 화장법의 명칭이 있었다.
눈 뚜껑에 붉은 색 문신도 하고 봉선화의 꽃잎으로 눈 뚜껑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기도 하였다.
당대 부녀자들에게 면엽()이 유행했었다.
면엽()이란?
얼굴의 한 쪽 볼에 색깔 무늬를 만들어 귀부인 티를 내는 화장술이다. 주로 빨강색 안료(顔料)나 파란색 안료나 주홍색 안료를 달 모양이나 동전 모양이나 기타 여러가지 모양으로 칠했다.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즉시 모방하여 서로 미()의 경쟁을 하였다. 면엽()은 계속 발전하여 인공 보조개 만드는 화장술로 발전하였다.

연지(胭脂)와 분(粉)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에 연지를 칠하고 눈썹을 그리는 먹으로 눈썹을 그리는 화장술은 이미 상(: 서기전 16 세기 서기전 11 세기) 나라와 주(: 서기전 11 세기 서기전 771 ) 나라 때 여성들에게 성행하였다. 연지와 분은 지금부터 3000여 년 전에 발명되었다.
열자(列子)에 보면 상주시기공자가아(商周時期公子哥兒), 상상파겸도득백백적(常常把塗得白白的), 출입어시정궁정(出入於市井宮廷), 가견고대적지분(可見古代的脂粉, 병불한어부녀방면적응용(幷不限於婦女方面的應用).”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상 나라와 주 나라 때 제후의 자제들과 고관대작과 부잣집 자제들은 항상 얼굴을 하얗게 화장하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가지와 궁정 출입을 하였다. 고대의 여성들은 연지와 분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는 뜻이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 호강스럽게 자란 귀족과 부잣집 자식들은 빨강색 분도 얼굴에 칠하고 다녔다. 상서(尙書) 하안(何晏)을 비롯한 일부 관료들도 화장을 하고 다녔다.
수 나라와 당 나라 때 이후 분대(粉黛)” 는 여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백거이의 장한가에 보면 회모일소백미생(回眸一笑百媚生), 육궁분대무안색(六宮粉黛無顔色).” 이란 시구(詩句)가 있다.
다시 말하면 양귀비가 한 번 눈방울 굴리며 웃음지으면 백가지 아름다움이 생겨, 육궁의 미녀들이 부끄러워 낯을 가리네!” 란 뜻이다.
중국 역사상 여성들에게 화장을 전혀 하지 못하게 했던 시기가 있었다. 북주(北周: 서기 557서기 581) 선제(宣帝 : 서기 579)금천하부인개부득시분대(禁天下婦人皆不得施粉黛)” 라고 어명을 내렸다. 다시 말하면 천하의 여성들은 모두 화장을 하지 못한다.” 는 뜻이다.
고인들은 홍화(紅花)와 산유화(山榴花의 홍색소(紅色素)를 추출하여 유지(油脂)와 혼합해서 연지를 만들어 사용했다. 고시(古詩) 중에 주화(朱華)는 연지를 의미한다.
연지 중에 가장 품질이 우수한 연지는 동물성 염료인데 자광()이라고 부른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보면 자광출남번(出南番), 내세충여의슬(乃細蟲如蟻蝨), 록수지조성(綠樹枝造成), 정여금지동청수상소충조백랍일반(正如今之冬靑樹上小蟲造白蠟一般), 고인다삽지조연지(故人多揷枝造), 금오인용조연지(今吳人用造).”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자광은 남쪽 이민족들이 사는 곳에서 생산된다. 개미 처럼 생긴 작은 곤충이 록수 가지에 만든다. 동청수 위에 소충들이 만드는데 백랍(白蠟) 처럼 생겼다. 사람들이 나무의 가지를 꺾어 연지를 만든다. 현재 강소성과 절강성 사람들은 자광으로 연지를 만든다.” 는 뜻이다.
자광은 광석(鑛石) 처럼 생겼고 자광의 색깔은 자색인데 깨뜨리면 속은 빨강색이다. 남해의 산곡(山谷)에서 생산된다.
북방의 연지산(燕支山)에서 생산되는 홍화로 만든 연지가 최상품이다. 연지산 홍화로 만든 연지는 흉노의 황후(皇后)들 만 전용하던 연지이다. () 나라 때 흉노족 군주(君主)의 정실(正室)연씨()” 라고 칭했는데 "연씨()"는 "연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고인들의 유질(油質) 화장품 중에 지택(脂澤)이 있었는데 발유(髮油: 머릿 기름)와 구홍(口紅 : 립스틱)을 만들었다.
두목(杜牧)은 아방궁부(阿房宮賦)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위유창니(渭流漲), 기지수야(棄脂水也).”
다시 말하면 위수(渭水)의 강물이 불어나고 기름기가 많았는데 궁녀들이 화장에 사용하고 버린 기름 때문이다.” 는 뜻이다.
위수는 감숙성에서 발원하여 섬서성의 경수(涇水)와 합류해서 황하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진시황 때 아방궁은 위수의 바로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아방궁 궁녀들이 버린 기름 섞인 화장품이 위수(渭水) 강물위를 떠내려 왔다. 궁녀들이 소비한 기름 화장품은 지택이었다.
고대 여성들이 현대 여성들 보다 더 많은()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연지산은 감숙성 장액시(張掖市) 산단현(山丹縣)에 있고 언지산(焉支山), 연지산(燕脂山), 연지산(脂山) 등 별명을 갖고 있다.
오대시화(五代詩話) - 패사회편(稗史匯編)에 보면 북방유언지산(北方有焉支山), 상다홍남초(上多紅藍草), 북인취기화타염비(北人取其花染緋), 취기영선자작연지(取其英鮮者作). 고구상인북지연지대지북방적미녀(故舊常人北地脂代指北方的美女). 환유적사서상설(還有的史書上說), 연지시일종홍색안료(脂是一種紅色顔料), 원산어중국서북흉노지구적언지산(原産於中國西北匈奴地區的焉支山), 유장건출사서역지행시인출(由張騫出使西域之行時引出). 화개지시피정타적하(花開之時被整摘下), 연후방재석발중반복저추(然後放在石鉢中反復杵槌), 도거황즙후(淘去黃汁後), 즉성선염적홍색염료(卽成鮮艶的紅色染料). 소이(所以), 도현재장액시수선와불사(到現在張掖市修繕臥佛寺), 환시용저종염료(還是用這種染料), 도말조량화동(塗抹雕梁畵棟).”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북방에 있는 언지산에 홍람초가 많이 자라고 있다. 북방 사람들은 그 꽃잎으로 빨강색 물을 들인다. 또 신선한 꽃으로 연지도 만들어 사용한다. 그래서 옛날 북지연지북방미녀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사서(史書)에 기록된 것을 보면 연지는 얼굴에 바르는 일종의 빨강색 화장품이다. 원산지는 중국 서북쪽 흉노 지역의 언지산인데 장건이 서역 출사 때 가져왔다.
홍람초의 꽃이 필 때 꽃잎을 따서 돌로 만든 사발 속에 집어 넣고 공이로 계속 찧는다. 황즙 만 걸러낸다. 이것이 홍색염료이다.
현재 장액시에 있는 와불사를 수리하고 있는데 홍람화 염료를 사용하여 그림이 그려진 마룻대와 조각된 들보에 채색하고 있다.” 는 뜻이다.

2012년 3월 29일 목요일

양귀비(楊貴妃)의 원통(寃痛)

양귀비(楊貴妃)의 원통(寃痛)
일부 당사(唐史) 연구 학자들에 의하면 당 나라가 흥성했다가 점점 쇠망하게 된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관건은 양씨(楊氏) 일가의 총애였다고 말한다. 그중 양귀비의 음탕이 가장 큰 영향을 입혔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와 양귀비의 사적을 기록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기인된 것 같다.
현대 학자들이 양귀비를 보는 관점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양귀비가 음란하고 쾌락적이며 방탕한 탕녀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양귀비의 억울함을 해명하고 있는 학자들도 적지 않게 있다. 그 이유는 어디서 왔을까?
장한가에 보면 운빈화안금보요(
華顔金步搖), 부용장난도춘소(芙蓉帳暖度春宵), 춘소고단일고기(春宵苦短日高起), 종차군왕부조조(從此君王不早朝), 후궁가려삼천인(後宮佳麗三千人), 삼천총애재일신(三千寵愛在一身……”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구름 같은 머리, 꽃 같은 얼굴, 흔들거리는 금장식, 부용화 그려진 커튼 안에 따스한 봄밤, 짧은 봄 밤이 못내 아쉬워 해가 중천에 뜰 때 까지 일어나기 싫어졌으니, 현종은 이때부터 아침 조정(朝廷) 나들이가 싫어졌네! 후궁에 아름다운 미녀 3000! 3000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있네!” 라는 뜻이다.

장한가는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시()이다.
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보면 경위양비(更謂楊妃) : ”소록산입금중(召祿山入禁中),이금수위대강보(以錦繡爲大襁褓), 이록산(裏祿山), 사궁인이채여여지(使宮人彩輿舁之). 자시(自是), 록산출입궁액불금(祿山出入宮掖不禁). 혹여귀비대식(或與貴妃對食), 혹통소불출(或通宵不出), 파유추성문어외(頗有醜聲聞於外), 상역불의야(上亦不疑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또 양귀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안록산이 궁궐 출입을 금지 당하고 있을 때 양귀비는 비단으로 만든 포대기로 안록산을 싸서 꽃수레 속에 집어 넣고 여러명의 궁녀들이 마주 들었다. 이때 이후로 안록산은 궁중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때로는 양귀비와 식사도 같이 하고 안록산은 밤늦게 까지 궁을 따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쁜 추문이 나돌았었지만 현종은 조금도 양귀비를 의심하지 않았다.” 는 뜻이다.
백거이의 장한가와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는 양귀비의사적을 살펴 보면 양귀비는 탕부임에 틀림없다. 장한가는 시가(詩歌)이며 문학작품이므로 저자의 상상력이 내포될 수 있고 글을 과장 시킬수 있는 성분이 다분하다. 그래서 역사적인 사료로 간주할 수 없다. 또 자치통감(資治通鑑)과 록산사적(祿山事蹟)과 천보유사(天寶遺史) 등도 모두 버금가는 보조적 역사 기록일 뿐이다.
그리고 청() 나라 때 문학가요 사상가인 원매(袁枚 : 서기 1716 서기1799 )의 양비세아사(楊妃洗兒事)는 신구당서(新舊唐書)에 전혀 기록이 없다. 사마온공(司馬溫公 : 서기 1019서기1086)의 자치통감 속에 수록되어 있는 양비세아사 역시 천보유사(天寶遺史)에서 퍼서 수록해 놓았을 뿐이다.
사적(史籍)에 기록된 것을 보면 양옥환(楊玉環)27(서기 745 ) 때 귀비로 책봉되었다. 그때 현종은 61세의 할아버지였다. 61세의 할아버지인 현종은 정신적인 반려자로써 양귀비를 택하였고 색욕추구(色慾追求)는 그 다음이었을 것이다. 양귀비가 현종을 11 년간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양귀비가 죽임을 당할 그 당시 현종은 72세의 진짜 할아버지였다. 그때 양귀비는38세였다.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양귀비가 태어나면서 부터 빼어난 용모를 갖고 태어났으며 능가선무(能歌善舞)했기 때문이다. 또 양귀비는 현종과 같은 노인들의 속 마음을 누구 보다 잘 이해하고 현종의 눈빛 만 보아도 현종이 무엇을 원하는지 척척 알아 맞추었기 때문에 현종을 살뜰히 보살펴 줄수 있었다.
사적(史籍)에 기록된 것을 보면 안록산(安祿山)”복수과슬(腹垂過膝), 중삼백삼십근(重三百三十斤)”, 여차치비이위풍화절대적양비소애(如此癡肥以爲風化絶代的楊妃所愛), 야난상상(也難想像), 자치통감소재(資治通鑑所載), 역공비실록(亦恐非實錄).”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안록산의 몸무게는 330 ()이었으며 살이 뒤룩 뒤룩쪄서 아래 뱃가죽이 축 늘어져서 거의 무릎에 와서 닿을 정도였다. 그리고 안록산의 말씨는 품위가 없었고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를 지니지 못했으며 타고난 재주와 재능도 없었기 때문에 양귀비 스타일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자치통감에 수록되어 있는 양귀비에 대한 사적은 아마도 진실이 아닌 것 같다.” 는 뜻이다.

330
()165kg 이다.

2012년 3월 28일 수요일

무칙천과 선종(禪宗) 오조(五祖)

무칙천과 선종(禪宗) 오조(五祖)
() 나라 때 불교가 중국에 전입된 후 제왕들이 성지(聖旨)를 내려 불교를 보호했기 때문에 불교는 흥성하였다.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女皇帝) 당() 나라 제 6 대왕 무칙천(武則天) 역시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고승(高僧)들을 우대하였다. 그 결과 불교 선종(禪宗)이 흥성하였다. 무칙천은 선종(禪宗) 오조(五祖) 홍인(弘忍)을 가장 존경하였다.
신당서(新唐書)에 보면 무칙천이 자칭 황제라고 칭한 후 대운사(大雲寺)를 각처에 건립하라고 칙령을 내렸다. 또 대운경(大雲經)을 천하에 반포하였다.
대운경은 인도의 고승 담무참(曇無讖)이 북량(北凉)에서 번역한 불경인데 대략 서기 421 년 과 서기 433 년 사이에 번역되었다고 한다. 북량은 십육국(十六國) 중 하나로써 서기 397 년과 서기 439 년 까지 존재했던 나라이다.
무칙천이 천수(天授) 원년(元年: 서기 690 )에 전국에 대운경을 반포했는데 대운경은 이미 260 년 동안 중국내에 존재해 있었다.
당 나라 때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가 연합하여 강론하였다. 그런데 강론할 때 마다 유가에서 제일 먼저 단상에 올라가 강론하였다.
그런데 무칙천이 임금이 된 후부터 불가에서 제일 먼저 강론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이때부터 유학자들의 위치는 불교의 스님들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후(武后)는 궁중에 특별 강의실을 마련하고 고승들을 초청하여 불경을 강론케 하였다.
무후(武后)는 선종(禪宗) 오조(五祖) 홍인(弘忍)을 여러 차례 궁중으로 불러 불경 강의를 부탁했으며 홍인은 물론 홍인의 제자들도 궁중의 무단출입을 허용해 주었다.
홍인의 제자들에겐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궁중문을 개방해 주었다.
홍인의 제자는 지선(智詵)과 신수(神秀)와 현약(玄約)과 혜안(慧安) 등 이었다.
그중 신수(神秀)는 가장 출중한 스님이었다. 신수(神秀)는 무후(武后)와 제 7 대왕 중종과 제 9 대왕 예종(睿宗)의 국사(國師)를 역임하였다. 신수(神秀)의 문하생도 많았다. 당실(唐室) 내에서 우대해 주었으며 신수(神秀)는 선종 북파(北派)에 속해 있었다.
남방의 혜능 역시 선종 오조(五祖) 홍인의 제자이며 선종 남파를 발전시켰다. 신수(神秀)는 혜능(慧能)을 조정에 추천하였으나 혜능은 일신상의 병환으로 인하여 사양했다. 혜능은 무후(武后)와 대면한 적은 없었으나 선종 남파 역시 당실(唐室)에서 소중하게 여겼다. 무후(武后)는 선종 남파의 스님들도 오조(五祖) 홍인의 제자와 똑같이 우대해 주었다.
홍인 선사(禪師)의 속성(俗姓)은 주씨(周氏)이고 호북(湖北) 사람이다. 홍인은 13 세 때 선종(禪宗) 사조(四祖) 도신(道信)을 배알(拜謁)했으며 30 년 동안 수습고행(修習苦行)하였다.
불교 선종은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쪽에서 중국으로 전입한 불교의 한 파로써 사조(四祖) 도신(道信) 때 까지도 창성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홍인대사에 이르러 연정습고(硏精習苦)하여 선풍(禪風)을 선양(宣揚)하였다. 홍인 대사 때부터 선종은 조야(朝野) 상하(上下)에서 모두 접수하여 존숭을 받았다. 홍인 대사의 제자들 중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서 신수 대사는 북방을 담당하고 혜능(慧能) 대사는 남방을 담당하여 불법을 대흥(大興)시켰다.
선종의 영향을 받아 송() 나라 때 명리학(名理學)이 탄생하였는데 무칙천이 성지(聖旨)를 내려 불교를 보호한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명리학은 양송(兩宋) 때부터 명() 나라 때 까지의 유학을 일컫는데 도학(道學)이라고도 칭했다.

고대 황제들의 진정한 사랑?

고대 황제들의 진정한 사랑?

속어(俗語)에 “고인삼처사첩(古人三妻四妾)” 이란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옛날 사람들은 수 많은 본 아내와 첩을 두었다.” 는 뜻이다.

황제들은 “삼궁육원(三宮六苑)” 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비빈(妃嬪)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고대 남성들은 여성들을 정욕 발산의 대상으로 삼았고 자식을 낳고 생육하는 도구로 삼았다. 고대 남성들 중 진정한 사랑을 갖고 있는 남성들은 소수에 달했다. 특히 황제들은 후비(后妃)들을 장난감 인형 처럼 생각햇었기 때문에 실증이 날 경우 즉시 버렸다.

그러나 소수의 황제들과 후비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고사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무제(漢武帝)와 이부인(李夫人), 당명황(唐明皇)과 양귀비(楊貴妃), 남조(南朝)의 송효무제(宋孝武帝)와 은귀비(殷貴妃), 청(淸) 나라 때 세조(世祖)와 동악귀비(董鄂貴妃) 등이 있다.

송효무제의 총애를 받던 선귀비(宣貴妃) 은씨(殷氏)의 경우 은씨(殷氏)가 사망하고 나서 효무제는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은씨 생각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효무제는 신하들에게 덮개가 있는 관(棺)을 만들지 말고 서랍식으로 된 특수한 관(棺)을 제작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효무제는 은씨의 관을 침실 곁에두고 매번 은씨(殷氏) 생각이 날 때 마다 서랍을 열어 은씨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곤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은씨의 시체를 하장(下葬)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도달 되었을 때 효무제는 눈물을 머금고 은씨의 시체를 하장해버렸다. 효무제는 은씨의 시체를 하장하고 나서 허전한 마음이 지나쳐 정신마저 혼돈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효무제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은씨 부인의 영위(靈位) 앞에 술을 따라 추모의식을 지냈다. 그리고 효무제는 그 당시 제일 유명한 무녀(巫女)를 불렀다. 무녀는 효무제에게 죽은 은씨 부인의 혼(魂)을 불러 온 후 잘 다스려 주어야 된다고 아뢰었다. 효무제는 무녀에게 은씨 부인의 혼을 잘 다스려서 보내 주라고 어명을 내렸다.

또 효무제는 한무제가 이부인을 추모하는 부(賦)를 모방해서 일편의 애도부(哀悼賦)를 무녀에게 지어 달라고 청했다. 그 당시 문사(文士) 사장(謝莊) 역시 효무제와 은귀비(殷貴妃) 사이의 정사(情思)를 글로 써서 효무제에게 바치며 매일 저녁 낭송케 하였다.

청 나라 제 3 대왕 세조(世祖 : 서기 1644 년 – 서기 1661 년)의 총애를 받던 동악귀비가 죽었다. 세조는 동악귀비가 죽은 후 동악귀비를 황후(皇后)로 추서(追敍)해 주었다. 이는 가장 지위가 높은 시호(諡號)였기 때문에 한때 조야(朝野)에서 경탄햇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조는 동악귀비가 죽은 다음 정치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세상 물정에 대하여 관심이 없어졌다.

세조는 삭발(削髮)하고 불문(佛門)으로 들어 갔으며 결국 오대산(五臺山)의 중이 되었다. 청사고(淸史稿)에 보면 동악씨는 연동씨(楝董氏)로 기재되어 있는데 악석대신(鄂碩大臣)의 딸로써 18세에 입궁(入宮)했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세조의 전설로 미루어 보아 세조의 동악씨에 대한 사랑은 진정(眞情)인 것 같다.

2012년 3월 27일 화요일

청(淸) 나라 때 공주(公主)들의 결혼 생활

() 나라 때 공주(公主)들의 결혼 생활


공주(公主)는 임금의 딸이며 급지옥엽(金枝玉葉)이라고도 부른다. 일반 백성들의 눈에는 공주의 생활은 행복으로 가득차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 역대 공주(公主)들의 혼인 생활은 일반 백성들 보다 더 고뇌가 많았다.


() 나라 때 공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초(淸初) 부터 봉건적 예교(禮敎)를 답습했다. 그래서 공주들은 부도(婦道)를 준수해야 했기 때문에 시부모를 잘 섬기고 공경해야 했다. 또 한편으로는 공주들은 왕가의 지고(至高)한 체통을 지켜야만 했다. 시부모를 만날 때 임금을 만나는 것 처럼 군신지예(君臣之禮)를 갖추어야 만 하였다.


사위는 물론 양쪽 부모들에게 효도해야 되고 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 공주는 궁내에 혼자 살아야 했다. 공주의 남편인 사위가 공주를 만나고 싶으면 먼저 연락을 하고 만나야 한다.


또 공주가 자기 남편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반드시 공주의 보모를 통해서 만날 수 있었다. 보모는 지위상 시비(侍婢)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노보모(老保姆) 다년간 궁내에서 보모(保姆) 노릇을 해왔기 때문에 신임을 얻고 있다.


보모들의 권력은 미약했지만 봉건적 예교(禮敎)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봉건 시대의 여자들은 유약하고 수집어 하였다. 또 봉건시대 황실 가정에서는 보모들이 예법과 각종 규율을 공주들에게 가르치고 강의도 했다. 보모들은 이러한 특권도 가지고 있었다.


공주가 자기 남편을 만나고 싶으면 그때 마다 뇌물을 보모에게 주어야 만 했고 보모들은 그때 마다 뇌물을 공주들로 부터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만일 공주가 보모에게 건내준 뇌물이 보모의 맘에 들지 않을 경우 공주는 남편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다. 만일 보모의 생각과 주장이 과격하다든지 성격이 가혹하거나 냉혹할 경우 공주와 공주의 남편이 서로 만나서 좋은 날을 보내지 못하게 된다. 이 처럼 청 나라 때 공주들의 생활에 심한 고통이 뒤따랐다.


() 나라 제 8 대왕 선종(宣宗 : 서기1821 - 서기1850 )의 대공주(大公主)는 출가 후 성격이 엄격한 보모에 의하여 여러 차례 신랑을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했다. 결혼 후 1 년 동안이나 신랑을 만날 수 없었다.


도광(道光) 황제의 대공주는 고통을 참다못해 죽음을 무릅쓰고 아버지께 가서 통곡하며 신랑을 만날 수 없는 경위를 알려드렸다. 도광 황제는 딸의 형편을 이해하고 나서 보모의 허락없이 자유자재로 신랑을 만날 수 있게 하락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도광(道光) 황제의 대공주(大公主)는 청() 나라 때 가장 행복한 공주로 이름이 남아 있다.

발수난수(潑水難收)

발수난수(潑水難收)

동진(東晉) 때 왕가(王嘉)의 저서 습유기(拾遺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고사(故事)가 실려 있다.

발수난수(潑水難收) : ”태공망처마씨고사일직(太公望妻馬氏故事一則), 재태공초취마씨(載太公初娶馬氏), 인애독서(因愛讀書), 불사생산(不事生産), 마씨혐빈이거(馬氏嫌貧離去), 개가신부(改嫁新夫), 급태공기봉제(及太公旣封齊), 마 씨구재합(馬氏求再合). 태공취수일분(太公取水一盆), 경지어지(傾之於地), 명마씨수수(命馬氏收水), 지수득일사니장(只收得一些泥漿). 태공왕(太公曰) : ”기능이재합(豈能離再合), 복수정난수(覆水定難收).”

다시 말하면 태공은 마씨와 처음 결혼하였다. 태공은 책 읽기를 좋아하여 매일 독서 만 하고 일은 하지 않아 먹고 살기도 어려웠다. 마씨는 가난한 생활이 역겨워 태공과 헤어졌다. 마씨는 태공과 헤어진 후 다시 다른 남자와재가(再嫁)하였다.

나중에 태공은 벼슬을 하게 되었다. 마씨는 태공이 벼슬을 했다는 소문을 듣고 태공을 찾아가서 재결합 하자고 사정을 했다.

태공은 물 한 동이를 마씨 앞으로 가져오더니 물 동이를 기울여 물을 깡그리 땅바닥에 부으며 땅바닥에 엎지러진 물을 주워 담으라고 명했다. 마씨는 약간의 진흙탕 물을 주워 담았을 뿐이다.

태공은 가엾은 마씨를 바라보며 헤어졌다가 다시 재결합하는 것은 엎지러진 물을 주워 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 말했다.

습유기(拾遺記)는 황당무계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들도 많이 실려 있다. 태공의 고사(故事)도 믿기 어렵다. 그러나 발수난수(潑水難收)의 고사를 통하여 우리는 재가(再嫁)하는 부녀들이 고대 사회에서 멸시 당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습유기(拾遺記)는 동진십육국(東晉十六國) 시기의 롱서(西) 안양(安陽 : 현재 甘肅省 泰安(西安의 서쪽340km 지점)) 사람 왕가(王嘉 : ? – 서기390 )의 저서인데 20 ()으로 구성되어 있고 220 ()의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왕가의 자()는 자년(子年)이다. 그래서 습유기를 왕자년습유기(王子年拾遺記)라고도 칭한다.

습유기는 중국 고대 단편소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왕가는 동진십육국 시기의 저명한 방사(方士)였으며 수 백명의 제자를 양성하였

2012년 3월 26일 월요일

화견수(花見羞)와 수계혼인(收繼婚姻)

화견수(花見羞)와 수계혼인(收繼婚姻)


화견수는 후당(後唐) 명종(明宗 : 李嗣源 : 서기 926 서기 933 )의 총희(寵姬) 숙비(淑妃)를 일컫는다.


신오대사(新五代史) 15 ()에 보면 숙비왕씨(淑妃王氏), 빈주병가자야(邠州餠家子也), 유미색(有美色), 호화견수(號花見羞), 시폐월수화적의사(是閉月羞花的意思).”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숙비 왕씨는 빈주에 있는 떡집 아가씨인데 미인이고 호()는 화견수이다. 화견수란? 꽃들도 수집어서 바라보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는 뜻이다.


폐월수화란?


도 숨고 꽃들도 부끄러워 할 정도로 여자의 자태가 아름다움을 표현한 말이다.


숙비는 오대시 가장 아름다운 미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숙비가 운이 나빠진 사이에 호인(胡人)들의 수계혼인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당시 사회에 수계혼인이 성행하게 되었다.


신오대사(新五代史) 15 권에 보면 후당멸망후(後唐滅亡後), 숙비수후진궁실(淑妃隨後晉宮室), 천거변도(遷居汴都), 득이후대(得以厚待), 유일차타왕경사위영안공주판리결혼전례(有一次往京師爲永安公主辦理結婚典禮),요태종야율덕광경대숙비작료일종기괴적표시(遼太宗耶律德光竟對淑妃作了一種奇怪的表示).”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후당 멸망 후 숙비는 개봉으로 이사하여 후진(後晉) 궁실(宮室)로 들어갔다. 숙비는 궁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어느 날 숙비는 영안공주의 결혼식 준비를 위하여 경성으로 갔다. 그때 요태종 야율덕광은 숙비에 대하여 일종의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는 뜻이다.


석경당(石敬瑭 : 서기 936 서기 942 )은 후진(後晉) 고조(高祖)가 된 후 왕숙비를 궁중으로 모셔 보살펴 주었다. 왜냐하면 왕숙비는 후당(後唐) 명종(明宗 : 서기 926서기 934 )의 부인이었고 석경당은 명종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사실 법적으로는 석경당은 왕숙비의 사위나 마찬가지 이다.


그러나 후진 제 2 대왕 출제(出帝 : 石重貴 : 서기 942 서기 947 )가 왕위를 이어받자 마자 숙비는 궁실에서 나와 낙양(洛陽)으로 이사 하였다. 이때 요() 나라 제 2 대왕 태종(太宗 : 耶律德光(서기 926서기 947 ))의 주선으로 요국(遼國) 대장(大將) 조연수(趙延壽 : ? – 서기 948 )와 영안공주(永安公主)가 결혼하게 되었다.


영안공주(永安公主)는 명종의 딸로써 숙비가 어려서부터 길렀다. 조연수는 명종의 열 세번 째 딸 흥평공주(興平公主)와 결혼 했었는데 흥평공주가 병으로 죽었다. 결국 조연수는 처재인 영안공주(永安公主)와 결혼한 셈이다.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장녀(長女)는 후진(後晉) 고조(高祖) 석경당(石敬瑭)과 결혼하여 명종이 장인이 되었다.


또 신오대사(新五代史)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덕광견명종화상(德光見明宗畵像), 분향재배고비왈(焚香再拜顧妃曰) : 명종여아약위형제(明宗與我約爲兄弟),

이오수야(爾吾嫂也). 이이륵지왈(已而勒之曰) : 금일내오부야(今日乃吾婦也).”


다시 말하면 야율덕광이 명종의 화상을 보더니 분향재배하고 나서 숙비에게 명종과 나는 형제를 맺었오. 그러므로 당신은 나의 형수요. 우리는 이미 묶여있는 사람들이오. 그러므로 당신은 오늘 나의 부인이오!” 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요태종의 말은 숙비를 희롱하는 말 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근거없는 말은 아니다.


원래 호인(胡人)들 사이에는 수계혼제(收繼婚制)가 성행하였다. 대부분 형제 사이에 한 명이 죽을 경우 형수나 제수와 결혼을 허용하는 혼인제도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경우 아버지의 첩 까지 자식과 결혼할 수 있는 별난 혼인제도이다.


유교의 예제(禮制)에 보면 강조숙수격리(强調叔嫂隔離)””반대부자취비(反對父子娶麀)”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수계(收繼)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예법으로써 시동생과 형수는 격리시켜야 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죽었다하여 며느리를 취하지 못하고 아들은 아버지가 죽었다하여 어미를 취하지 못한다.” 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혼인 풍속을 보면 수계혼인은 흔하지 않았지만 상층 통치계급 사회와 호족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이었다. () 나라 때 근친상간(近親相姦)금수행위(禽獸行爲)”로 못밖았다.


한서(漢書) – 제왕정(諸王傳)에 보면 왕실내에서 친속 간에 난윤(亂倫) 행위가 발견된다.


북조(北朝) 시대와 당대(唐代)에 음미난윤적(淫靡亂倫的) 행위가 증가되었었다. 그러다가 명대(明代)에 이르러 법으로 금지했다.


명대(明代)의 법률 규정은 다음과 같다.


형망수수(兄亡收嫂), 제망수제부자(弟亡收弟婦者), 각교(角絞).”


다시 말하면 형이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를 취하거나 동생이 죽었을 때 형이 동생의 부인을 취할 경우 모두 교수형에 처한다.” 는 뜻이다.


오대(五代) 중 후당(後唐)과 후진(後晉)과 후한(後漢)은 모두 서돌궐(西突厥) 부락 출신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호족(胡族)의 수계혼제(收繼婚制)를 보존하고 있었다. () 태종(太宗)이 숙비(淑妃)오부(吾婦 : 나의 부인)” 라고 칭한 것을 보면 그당시에 호족(胡族)의 혼제(婚制) 관념이 유행했다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