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일 토요일

이씨조선과 명(明) 나라의 의학교류


이씨조선과 명() 나라의 의학교류


이씨 조선 정부는 의약을 매우 중시했으며 명 나라의 명의들을 초청하여 진병(診病)은 물론 한의학을 가르치게 하였다.


또 한편 조선의 학생들을 명()나라에 보내어 한의학 수업을 시켰다. 학생들은 명 나라에 가서 한의학 수업을 마친 후 귀국할 때 한의학 서적 등을 수집하여 귀국하였다.


이씨조선에서는 중국 약재(藥材) 수입을 격려하는 한편 약재(藥材)의 향약화(鄕藥化)” 를 추진하였다.


이씨 조선 때 명 나라와 의약 교류는 매우 활발하였으며 이씨 조선 의학과 명 나라 의학의 융화현상이 나타났다.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서기 1368서기 1398) 때 민( : 현재 福建省)에 살고있던 양종진(楊宗眞) 도사(道士)는 고려에 가서 의술을 펼쳤다. 명태조 홍무(洪武) 12 (서기 1352 ) 고려(서기 918서기 1392) 정부에서는 양종진 도사에게 의전(醫典) 대접을 해주었다.


명나라 제 3 대왕 성조(成祖) 영락(永樂) 5 (서기 1407) 9 월에 이씨조선의 왕자가 명나라로 갈 때 판전의감사(判典醫監事) 양홍달(楊弘達)이 왕자를 모시고 따라갔다.


명나라 제 4 대왕 仁宗 洪熙 원년(서기 1425 ) 7 월 명나라에서 사신들과 태의(太醫) 장본립(張本立)과 요동(遼東) 명의 하양(何讓)을 이씨조선에 보내어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병을 진찰하고 치료해 주었으며 조선의 명의들과 세종의 병세를 논하고 치료대책을 논했으며 의방(醫方)을 조선 명의들에게 전수해 주었다.


명나라 제 5 대왕 선조(宣祖) 선덕(宣德) 2 (서기 1427) 명나라에서는 사신들과 명의 왕현(王賢)과 단동(丹東) 명의 권인박(權因博)을 조선에 보내어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질병 치료를 위한 의방(醫方)을 연구해 보라고 명하였다.


명나라 제 9 대왕 헌종(憲宗) 성화(成化) 2 (서기 1466)에 이씨조선에서는 권인박에게 내의원(內醫院) 주부(主簿) 직을 주었으며 후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권인박은 서기 1487 년 조선에서 사망하였다.


명 제 14 대왕 신종(神宗) 만력(萬曆) 26 (서기 1598) 4 월에 명나라 의관(醫官) 반계(潘繼)와 기주(期周) 등은 이씨조선 선조대왕의 초청으로 조선에서 의료 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악전서(景嶽全書)에 보면 장개빈(張介賓)은 장년 시절 조선에 머물러 있은 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의학가들의 도움으로 조선의 향약(鄕藥)과 중국약의 감별 및 질의 응답과 한약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명 제 3 대왕 성조(成祖) 영락(永樂) 19 (서기 1421 ) 10 월에 조선에서는 황자후(黃子厚)를 명나라에 보내어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는 한약들을 대량으로 수입해 갔다.


영락 21 (서기 1423 ) 과 憲德 5 (서기 1430 ) 두 차례에 걸쳐서 조선정부에서는 노중례(盧重禮) 등 한의사들을 명나라에 보내어 명나라 태의원 어의 주영중(周永中)과 고문중(高文中)과 초약(草藥)의 진위(眞僞) 감별에 대하여 질의 응답을 하여 배워갔다.


서기 1617 년 조선의 한의학자 최순립(崔順立) 등이 의약숙제(醫藥宿題)를 풀기 위하여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한의학자들과 질의 응답을 했는데 문답(問答) 내용이 의학의문(醫學疑問)이란 책으로 편찬되었다.


이씨조선에서는 한의학 의서 출판에 힘썼다. 이씨조선 년간에 출판된 고반촬요(考班撮要)에 보면 서기 1430 년부터 서기 1585 년 사이에 황제소문, 영추, 81난경, 직지방, 성혜방, 득효방, 상한류서, 의학정전, 맥경, 연의본초 등 70여 종이 출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씨조선에서는 중국 고대 의서의 정리와 연구에 힘썼으며 중국 한약의 향약화(鄕藥化)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방유취(醫方類聚)와 동의보감과 수양총서유취(壽養叢書類聚) 등이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은 이씨조선의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유효통(兪孝通)과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盧重禮)와 전의감부정(典醫監副正) 박원덕(樸元德) 등을 주필로 하여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기초위에 중국 고대 의서를 날줄()로 삼고 조선의 전통 의서를 씨줄()로 삼고 태평성혜방과 성제총록과 부인양방 등에서 자료를 모아 931 ()의 병증(病症) 10706 ()의 의방(醫方) 1479 ()의 침구방(鍼灸方)과 약재는 증류본초(證類本草)의 순서대로 모두 630 ()이 수록되어 있다.


의방유취는 이씨조선 집현전 부교리(副校理) 전예몽(全禮蒙)이 편찬한 의서이다. 중국 고대 의서 152 ()와 이씨조선 의서 어림찬요(禦林纂要)를 정리하고 인용하여 모두 266 () 264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국과 조선 의방(醫方) 50000여 개가 수록되어 있다.


동의보감은 이씨조선 태의(太醫) 허준(許浚)이 선조대왕(宣祖大王)의 어명에 따라 71 종의 고대 중국 의서와 3 ()의 조선 의서를 참고하여 모두 25 () 25 ()을 편찬하였다. 내용을 보면 내경(內景), 외형(外形),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 5개 방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과 중국의 의약 기초 이론과 병증의방(病症醫方)과 약물방제와 침구 등을 전면적으로 종합해 놓았다. 서기 1613 11월 이씨조선 내의원에서 간행하였다.


또 이창정(李昌廷)은 중국 의서(醫書) 삼원연수서(三元延壽書)를 재정리하고 자신의 의료 경험을 추가하여 수양총서유취(壽養叢書類聚)를 서기 1620 년에 편찬하였다.


세종대왕은 중국의 법의제도(法醫制度)에 근거하여 무원록(無冤錄)을 이과(吏科)와 율과(律科)의 과목으로 채택했다. 세종대왕은 서기 1438 년 무면록에 주()를 달아 편찬한 신주무면록(新注無冤錄)을 전국에 반포하고 국가법율서(國家法律書)로 사용했다. 그후 이씨조선에서는 서기 1483 년 의옥집(疑獄集)과 당음비사(棠陰比事)를 법의험증(法醫驗證) 참고서(參考書)로 사용했다.


그리고 세종대왕 때 소문, 장자화방, 소아약증직결(小兒蒻證直訣), 창진집(瘡疹輯), 상한유서(傷寒遺緖), 외과정요(外科精要), 부인대전, 산과직지방(産科直指方), 동인경(銅人經), 응고맥경(凝固脈經), 대전본초(大全本草) 등을 의학 과목으로 채택하였다.


이씨조선에서는 중국 한약재를 대량으로 수입해 갔다.


세종은 약재등물(藥材等物), 수뢰중국이비지(須賴中國而備之), 무역불가단절(貿易不可斷絶).” 이라고 어명을 내렸다.


다시 말하면 약재는 마땅히 중국에 의지해야 하며 잘 갖추어 비축해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중국과 무역을 절대로 끊어서는 않된다.” 는 뜻이다.


그후 조선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인삼, 송자, 오미자, 호로, 호골(虎骨), 녹용, 녹각, 녹포 등을 수입해 왓으며 명나라에서도 제 6 대왕 영종 정통 3 (서기 1438) 과 제 10 대왕 효종 홍치 2 (서기 1489) 조선의 청구에 따라 사신을 조선으로 보내어 마황(麻黃)과 감초와 갈충(蝎蟲) 등 약종자(藥種子)를 증여(贈與)했다. 이후 이씨조선에서는 중국의 한약 종자를 재배 번식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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