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賢母)
고사(故事) (4) 구양수(歐陽脩)의
어머니
”북송적구양수(北宋的歐陽脩),
유현모교육(有賢母敎育).
구양수모정씨(歐陽脩母鄭氏), 조과(早寡),
생활청고(生活淸苦),
인무금전매지필(因無金錢買紙筆),
고상절로적적경이위필(故常折蘆狄的梗以爲筆),
화지상적사교육구양수사자(畵地上的沙以敎育歐陽脩寫字).
수야능각고역학(修也能刻苦力學),
이준모훈(以遵母訓).”
다시 말하면 ”북송 때
구양수(서기 1007 년 – 서기 1072
년)는 현모의 교육을 받았다. 구양수의 어머니 정씨는 일찍 과부가 되었다.
생활이 매우 궁핍하였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구양수에게 종이와 붓을 사줄 수 없었다. 그래서 구양수의 어머니는
갈대와 물억새 줄기로 만든 붓으로 재(灰) 위에 글씨를 써가며 구양수에게 글씨 연습을
시켰다. 또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려주고 글씨를 써서 연습 시켰다. 구양수는 어머니의 교훈을 따라
열심히 공부하였다.”는뜻이다.
구양수는 송 나라 때 문학가요 정치가요 사학가요
시인(詩人)이었으며 호(號)는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고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다. 문집에오
대사기(五代史記) 구양수문충공집, 육일시화,
귀전록(歸田錄) 등이 있다.
혹자는
”취옹지의(醉翁之意), 부재주(不在酒),
재호산수지간야(在乎山水之間也).” 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구양수의
호(號) 중에 취옹의 의미는 구양수가 술에 취하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산수자연에 취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는 뜻이다.
구양수가 서기 1045
년 안휘성 제주(滁州)
태수(太守)로 좌천되어 있을 때 부근에 있는
랑야사(琅玡寺)
지선(智仙) 스님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지선 스님은
정자(亭子)를 건립하고 나서 완공식 날 구양수를 초청했고 구양수는
정자(亭子)의 완공을 축하해 주었다. 지선 스님은 정자의 이름을
취옹정(醉翁亭)이라고 명명했다.
천고(千古)에 명성을 떨치는
취옹정기(醉翁亭記)는 그때 쓴 글이다.
맹모삼천(孟母三遷)과
악모자자(岳母刺字)와 구모화적(歐母畵荻)의 고사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인상적인 고사이다.
구양수는 열 살 때 당 나라 대문호 한유(韓愈)의
문집(文集) 잔본(殘本)을 구할수 있는 기회를 얻어
탐독함으로써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송대(宋代) 문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되었다.
”천고문장사대가시한유구소(千古文章四大家是韓柳歐蘇)”
란 말이 전해 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언제 까지나 변치않을 문장의
사대가(四大家)는 당 나라 때의 한유와
유종원(柳宗元)과 북송(北宋)의 구양수와 소동파를
들수 있다.” 는 뜻이다.
후세인들은 구양수를 북송 문단의 영수(領袖)요
송대(宋代) 산문(散文)의 기초를 닦아놓은
문인이라고 평하고 있다. 구양수는 일생 동안 500여 편의 산문을 썼으며 문단의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소동파는 구양수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논대도사한유(論大道似韓愈),
논본사육지(論本似陸贄),
기사사사마천(紀事似司馬遷),
시부사이백(詩賦似李白).”
다시 말하면
”정도(正道)를 논한 것은 한유와 비슷하고 상소문 등은 육지와 비슷하며
사실(史實)과 사적(事蹟)의 기록은
사마천(司馬遷)과 비슷하고 시부(詩賦)는
이태백(李太白)과 비슷하다.” 는 뜻이다.
구양수가 네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죽었다. 그후 어머니의 교훈을 받들어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어 송인종(宋仁宗) 천성(天聖)
8년(서기 1030 년) 23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과거시험에 장원(壯元) 급제하였고 이듬해 서기 1031 년
락양(洛陽) 유수(留守)로 임명되었다.
일본 나량현(奈良縣)
천리대학(天理大學) 부속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는
구양문충공집(歐陽文忠公集) 속에 구양수가 왕안석(王安石)을 비롯하여 친구들에게 보낸
96통의 서한이 수록되어 있다.
구양수는 일생 동안 세 차례나 결혼하였다.
첫째 부인 서부인(胥夫人)은 구양수의
은사(恩師) 서언(胥偃)의 딸인데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었었는데 병사했다. 5 년 후 다시 아들을 하나 얻었었는데 역시 요사하였다.
구양수가 28세 때 집현원학사
간의대부(諫議大夫) 양대아(楊大雅)의 딸과 두번 째
결혼했는데 부인은 18세 때 사망하였다.
세번 째 부인은 설씨(薛氏)인데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 호부시랑(戶部侍郞)
설규(薛奎)의 넷째 딸 인데 슬하에 양발(陽發),
양혁(陽奕), 양변(陽辯)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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