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칙천과 선종(禪宗) 오조(五祖)
한(漢) 나라 때 불교가 중국에 전입된 후 제왕들이 성지(聖旨)를 내려 불교를 보호했기 때문에 불교는 흥성하였다.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女皇帝) 당(唐) 나라 제 6 대왕 무칙천(武則天) 역시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고승(高僧)들을 우대하였다. 그 결과 불교 선종(禪宗)이 흥성하였다. 무칙천은 선종(禪宗) 오조(五祖) 홍인(弘忍)을 가장 존경하였다.
신당서(新唐書)에 보면 무칙천이 자칭 황제라고 칭한 후 대운사(大雲寺)를 각처에 건립하라고 칙령을 내렸다. 또 대운경(大雲經)을 천하에 반포하였다.
대운경은 인도의 고승 담무참(曇無讖)이 북량(北凉)에서 번역한 불경인데 대략 서기 421 년 과 서기 433 년 사이에 번역되었다고 한다. 북량은 십육국(十六國) 중 하나로써 서기 397 년과 서기 439 년 까지 존재했던 나라이다.
무칙천이 천수(天授) 원년(元年: 서기 690 년)에 전국에 대운경을 반포했는데 대운경은 이미 260 년 동안 중국내에 존재해 있었다.
당 나라 때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가 연합하여 강론하였다. 그런데 강론할 때 마다 유가에서 제일 먼저 단상에 올라가 강론하였다.
그런데 무칙천이 임금이 된 후부터 불가에서 제일 먼저 강론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이때부터 유학자들의 위치는 불교의 스님들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후(武后)는 궁중에 특별 강의실을 마련하고 고승들을 초청하여 불경을 강론케 하였다.
무후(武后)는 선종(禪宗) 오조(五祖) 홍인(弘忍)을 여러 차례 궁중으로 불러 불경 강의를 부탁했으며 홍인은 물론 홍인의 제자들도 궁중의 무단출입을 허용해 주었다.
홍인의 제자들에겐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궁중문을 개방해 주었다.
홍인의 제자는 지선(智詵)과 신수(神秀)와 현약(玄約)과 혜안(慧安) 등 이었다.
그중 신수(神秀)는 가장 출중한 스님이었다. 신수(神秀)는 무후(武后)와 제 7 대왕 중종과 제 9 대왕 예종(睿宗)의 국사(國師)를 역임하였다. 신수(神秀)의 문하생도 많았다. 당실(唐室) 내에서 우대해 주었으며 신수(神秀)는 선종 북파(北派)에 속해 있었다.
남방의 혜능 역시 선종 오조(五祖) 홍인의 제자이며 선종 남파를 발전시켰다. 신수(神秀)는 혜능(慧能)을 조정에 추천하였으나 혜능은 일신상의 병환으로 인하여 사양했다. 혜능은 무후(武后)와 대면한 적은 없었으나 선종 남파 역시 당실(唐室)에서 소중하게 여겼다. 무후(武后)는 선종 남파의 스님들도 오조(五祖) 홍인의 제자와 똑같이 우대해 주었다.
홍인 선사(禪師)의 속성(俗姓)은 주씨(周氏)이고 호북(湖北) 사람이다. 홍인은 13 세 때 선종(禪宗) 사조(四祖) 도신(道信)을 배알(拜謁)했으며 30 년 동안 수습고행(修習苦行)하였다.
불교 선종은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쪽에서 중국으로 전입한 불교의 한 파로써 사조(四祖) 도신(道信) 때 까지도 창성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홍인대사에 이르러 연정습고(硏精習苦)하여 선풍(禪風)을 선양(宣揚)하였다. 홍인 대사 때부터 선종은 조야(朝野) 상하(上下)에서 모두 접수하여 존숭을 받았다. 홍인 대사의 제자들 중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서 신수 대사는 북방을 담당하고 혜능(慧能) 대사는 남방을 담당하여 불법을 대흥(大興)시켰다.
선종의 영향을 받아 송(宋) 나라 때 명리학(名理學)이 탄생하였는데 무칙천이 성지(聖旨)를 내려 불교를 보호한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명리학은 양송(兩宋) 때부터 명(明) 나라 때 까지의 유학을 일컫는데 도학(道學)이라고도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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