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6일 월요일

동주(東周) 여성들의 어리석고 고지식한 정조관념

동주(東周) 여성들의 어리석고 고지식한 정조관념


동주(東周 : 서기전 770 서기전 249 )시대 여성들은 비교적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남녀 사교의 자유가 있었고 여성들의 정조관념도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이 시경(詩經) 300여 편 중 상중(桑中)과 목과(木瓜) 등에 묘사되어 있다.


또 사기(史記) 중 주대조정음연(周代朝廷飮宴)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동주 시대 부녀자들의 정조관념은 강제적인 역량은 없었다. 그리하여 음란(淫亂)과 사통(私通)의 풍기(風氣)가 매우 왕성하였다.


좌전(左傳) – 정공오년(定公五年)에 보면 초소왕적여아계천(楚昭王的女兒季芊), 피난시증피일개명규종건적소신배부이도(避難時曾被一個名叫鐘建的小臣背負而逃), 후래소왕요파계천출가시(後來昭王要把季芊出嫁時), 계천불긍가급타인(季芊不肯嫁給他人), 인위여자불능화제이개남자접촉(認爲女子不能和第二個男子接觸), 자기기이피종건배부과(自己旣已被鐘建背負過), 편비종건불가(便非鐘建不嫁). 소왕지호의종타이파타가급종건(昭王只好依從而把嫁給鐘建).”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초 나라 소왕의 딸 계천은 피난 갈 때 종건이란 소신의 등에 업혀서 도망갔다. 피난에서 돌아 온 후 소왕은 계천을 시집 보내려고 하였다. 계천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아버지께 말했다. 계천은 여자는 제 2 의 남자와 몸을 접촉하면 않되며 나는 이미 피난 갈 때 종건의 등에 업혔었기 때문에 몸을 종건과 접촉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종건과 결혼해야 합니다.” 고 아버지께 말했다. 소왕은 딸의 말에 따라 종건과 결혼시켰다." 는 뜻이다.


또 열녀전(列女傳)에 보면 제후적여아가급위군위부인(齊侯的女兒嫁給衛君爲夫人), 단상미입문(但尙未入門), 위군이거세료(衛君已去世了). 소이수연유료혼가지명(所以雖然有了婚嫁之名), 병무남녀혼구지실(幷無男女婚媾之實), 저시보모권제후여아반회양가(這時保母勸齊侯女兒返回孃家), 파제혼약료사(罷除婚約了事), 가시(可是), 타부답응(不答應), 유재위국수상(留在衛國守喪), 삼년지상과후(三年之喪過後), 위군제제청구타동포공처(衛君弟弟請求同庖共處), 각피타거절(却被拒絶). 주대잉성행제취수적습속(周代仍盛行弟娶嫂的習俗).”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제후(齊侯)의 딸이 위군(衛君)과 결혼하게 되었다. 제후의 딸이 신랑 될 위군의 집에서 거행되는 결혼 식장에 도착되기 직전에 신랑 될 위군이 죽어 버렸다. 비록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소문은 나 있지만 신랑이 없는 결혼식이 될 것이므로 위군의 보모(王世子를 가르치고 保育하는 여자)는 제후의 딸에게 친정으로 돌아가십시오! 혼약(婚約)이 없었던 것으로 해드리겠습니다.” 고 말했다. 제후의 딸은 보모의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제후의 딸은 '위() 나라의 상례(喪禮)에 따라 삼년상(三年喪)이 지날 때 까지 위군의 집에 머물며 함께 생활하다가 삼년이 지난 후 위군의 남동생의 요청에 따라 위군의 남동생과 결혼하겠습니다.' 고 대답하였다. 이와 같이 제후의 딸은 위군의 보모의 권고를 거절해 버렸다. 주대에 형()이 죽을 경우 형의 남동생과 결혼하는 풍속이 성행되었다.” 는 뜻이다.


이상에 열거한 두 고사(故事)에서 동주(東周)의 여성들은 정조관념이 매우 강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너무나 우매하고 완고한 면도 엿보인다.


또 열녀전(列女傳)에 다음과 같은 정강의 고사가 실려있다.


초소왕부인정강유일천수소왕출유시(楚昭王夫人貞姜有一天隨昭王出遊時), 소왕파타유재고근수변적참대(昭王把留在靠近水邊的), 홀연강수맹창(忽然江水猛漲), 소왕파인거접타(昭王派人去接), 이면조치엄몰적위험(以免遭致淹沒的危險), 단인사자수중몰유휴대소왕적부신(但因使者手中沒有携帶昭王的符信), 소이타즘야불긍이개참대(所以她怎也不肯離開), 등도사자회거나래소왕부신적시후(等到使者回去拏來昭王符信的時候), 홍수이엄몰참대(洪水已淹沒), 정강역이장신노해료(貞姜亦已葬身怒海了).”


다시 말하면 초 나라 소왕 부인 정강이 어느 날 소왕을 따라 여행을 갔다. 소왕은 자기 부인 정강을 강() 근처에 있는 높은 누각에 머물게 하였다. 강물의 수위(水位)가 갑자기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소왕은 강물이 넘쳐 누각을 덮칠 경우 부인이 익사할 것을 대비하여 급히 신하를 파견하여 정강을 구출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너무 갑자기 닥친 일이라서 신하는 임금의 편지를 갖고 가지 않았다. 소왕이 보낸 신하가 정강의 누각에 도착되었다. 정강은 신하에게 폐하께 속히 돌아가서 편지를 갖고 오라.” 고 말했다. 정강은 신하가 소왕의 편지를 갖고 올 때 까지 누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급기야 홍수가 누각을 덮쳐 누각은 강물 속으로 들어가고 정강은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는 뜻이다.


또 좌전(左傳)에 보면 다음과 같은 백희(伯姬)의 고사(故事)가 실려 있다.


송백희가중발생화재적시후(宋伯姬家中發生火災的時候), 부모강호외출(傅母剛好外出),

백희인위(伯姬認爲) "부모부재(傅母不在), 소불하당(宵不下堂)", 소이영사야부독자도출(所以寧死也不獨自逃出),

등도부모간래접타시(等到傅母赶來接), 타이장신화굴료(已葬身火窟了).”


다시 말하면 보모가 잠간 동안 외출한 사이에 송백희의 집에 불이 났다. 백희는 보모 없이는 밤에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홀로 도망치지 못하고 편안하게 죽고 말았다. 보모가 서둘러 집에 도착해 보니 백희의 시체는 불구덩이 속에 들어 있었다.” 는 뜻이다.


정상과 백희의 지조와 절개는 보기 힘든 경우이다. 이와 같이 고지식하고 우직함이 또 다시 되풀이 되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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