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8일 수요일

고대 황제들의 진정한 사랑?

고대 황제들의 진정한 사랑?

속어(俗語)에 “고인삼처사첩(古人三妻四妾)” 이란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옛날 사람들은 수 많은 본 아내와 첩을 두었다.” 는 뜻이다.

황제들은 “삼궁육원(三宮六苑)” 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비빈(妃嬪)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고대 남성들은 여성들을 정욕 발산의 대상으로 삼았고 자식을 낳고 생육하는 도구로 삼았다. 고대 남성들 중 진정한 사랑을 갖고 있는 남성들은 소수에 달했다. 특히 황제들은 후비(后妃)들을 장난감 인형 처럼 생각햇었기 때문에 실증이 날 경우 즉시 버렸다.

그러나 소수의 황제들과 후비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고사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무제(漢武帝)와 이부인(李夫人), 당명황(唐明皇)과 양귀비(楊貴妃), 남조(南朝)의 송효무제(宋孝武帝)와 은귀비(殷貴妃), 청(淸) 나라 때 세조(世祖)와 동악귀비(董鄂貴妃) 등이 있다.

송효무제의 총애를 받던 선귀비(宣貴妃) 은씨(殷氏)의 경우 은씨(殷氏)가 사망하고 나서 효무제는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은씨 생각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효무제는 신하들에게 덮개가 있는 관(棺)을 만들지 말고 서랍식으로 된 특수한 관(棺)을 제작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효무제는 은씨의 관을 침실 곁에두고 매번 은씨(殷氏) 생각이 날 때 마다 서랍을 열어 은씨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곤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은씨의 시체를 하장(下葬)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도달 되었을 때 효무제는 눈물을 머금고 은씨의 시체를 하장해버렸다. 효무제는 은씨의 시체를 하장하고 나서 허전한 마음이 지나쳐 정신마저 혼돈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효무제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은씨 부인의 영위(靈位) 앞에 술을 따라 추모의식을 지냈다. 그리고 효무제는 그 당시 제일 유명한 무녀(巫女)를 불렀다. 무녀는 효무제에게 죽은 은씨 부인의 혼(魂)을 불러 온 후 잘 다스려 주어야 된다고 아뢰었다. 효무제는 무녀에게 은씨 부인의 혼을 잘 다스려서 보내 주라고 어명을 내렸다.

또 효무제는 한무제가 이부인을 추모하는 부(賦)를 모방해서 일편의 애도부(哀悼賦)를 무녀에게 지어 달라고 청했다. 그 당시 문사(文士) 사장(謝莊) 역시 효무제와 은귀비(殷貴妃) 사이의 정사(情思)를 글로 써서 효무제에게 바치며 매일 저녁 낭송케 하였다.

청 나라 제 3 대왕 세조(世祖 : 서기 1644 년 – 서기 1661 년)의 총애를 받던 동악귀비가 죽었다. 세조는 동악귀비가 죽은 후 동악귀비를 황후(皇后)로 추서(追敍)해 주었다. 이는 가장 지위가 높은 시호(諡號)였기 때문에 한때 조야(朝野)에서 경탄햇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조는 동악귀비가 죽은 다음 정치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세상 물정에 대하여 관심이 없어졌다.

세조는 삭발(削髮)하고 불문(佛門)으로 들어 갔으며 결국 오대산(五臺山)의 중이 되었다. 청사고(淸史稿)에 보면 동악씨는 연동씨(楝董氏)로 기재되어 있는데 악석대신(鄂碩大臣)의 딸로써 18세에 입궁(入宮)했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세조의 전설로 미루어 보아 세조의 동악씨에 대한 사랑은 진정(眞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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