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9일 목요일

양귀비(楊貴妃)의 원통(寃痛)

양귀비(楊貴妃)의 원통(寃痛)
일부 당사(唐史) 연구 학자들에 의하면 당 나라가 흥성했다가 점점 쇠망하게 된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관건은 양씨(楊氏) 일가의 총애였다고 말한다. 그중 양귀비의 음탕이 가장 큰 영향을 입혔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와 양귀비의 사적을 기록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기인된 것 같다.
현대 학자들이 양귀비를 보는 관점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양귀비가 음란하고 쾌락적이며 방탕한 탕녀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양귀비의 억울함을 해명하고 있는 학자들도 적지 않게 있다. 그 이유는 어디서 왔을까?
장한가에 보면 운빈화안금보요(
華顔金步搖), 부용장난도춘소(芙蓉帳暖度春宵), 춘소고단일고기(春宵苦短日高起), 종차군왕부조조(從此君王不早朝), 후궁가려삼천인(後宮佳麗三千人), 삼천총애재일신(三千寵愛在一身……”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구름 같은 머리, 꽃 같은 얼굴, 흔들거리는 금장식, 부용화 그려진 커튼 안에 따스한 봄밤, 짧은 봄 밤이 못내 아쉬워 해가 중천에 뜰 때 까지 일어나기 싫어졌으니, 현종은 이때부터 아침 조정(朝廷) 나들이가 싫어졌네! 후궁에 아름다운 미녀 3000! 3000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있네!” 라는 뜻이다.

장한가는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시()이다.
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보면 경위양비(更謂楊妃) : ”소록산입금중(召祿山入禁中),이금수위대강보(以錦繡爲大襁褓), 이록산(裏祿山), 사궁인이채여여지(使宮人彩輿舁之). 자시(自是), 록산출입궁액불금(祿山出入宮掖不禁). 혹여귀비대식(或與貴妃對食), 혹통소불출(或通宵不出), 파유추성문어외(頗有醜聲聞於外), 상역불의야(上亦不疑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또 양귀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안록산이 궁궐 출입을 금지 당하고 있을 때 양귀비는 비단으로 만든 포대기로 안록산을 싸서 꽃수레 속에 집어 넣고 여러명의 궁녀들이 마주 들었다. 이때 이후로 안록산은 궁중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때로는 양귀비와 식사도 같이 하고 안록산은 밤늦게 까지 궁을 따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쁜 추문이 나돌았었지만 현종은 조금도 양귀비를 의심하지 않았다.” 는 뜻이다.
백거이의 장한가와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는 양귀비의사적을 살펴 보면 양귀비는 탕부임에 틀림없다. 장한가는 시가(詩歌)이며 문학작품이므로 저자의 상상력이 내포될 수 있고 글을 과장 시킬수 있는 성분이 다분하다. 그래서 역사적인 사료로 간주할 수 없다. 또 자치통감(資治通鑑)과 록산사적(祿山事蹟)과 천보유사(天寶遺史) 등도 모두 버금가는 보조적 역사 기록일 뿐이다.
그리고 청() 나라 때 문학가요 사상가인 원매(袁枚 : 서기 1716 서기1799 )의 양비세아사(楊妃洗兒事)는 신구당서(新舊唐書)에 전혀 기록이 없다. 사마온공(司馬溫公 : 서기 1019서기1086)의 자치통감 속에 수록되어 있는 양비세아사 역시 천보유사(天寶遺史)에서 퍼서 수록해 놓았을 뿐이다.
사적(史籍)에 기록된 것을 보면 양옥환(楊玉環)27(서기 745 ) 때 귀비로 책봉되었다. 그때 현종은 61세의 할아버지였다. 61세의 할아버지인 현종은 정신적인 반려자로써 양귀비를 택하였고 색욕추구(色慾追求)는 그 다음이었을 것이다. 양귀비가 현종을 11 년간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양귀비가 죽임을 당할 그 당시 현종은 72세의 진짜 할아버지였다. 그때 양귀비는38세였다.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양귀비가 태어나면서 부터 빼어난 용모를 갖고 태어났으며 능가선무(能歌善舞)했기 때문이다. 또 양귀비는 현종과 같은 노인들의 속 마음을 누구 보다 잘 이해하고 현종의 눈빛 만 보아도 현종이 무엇을 원하는지 척척 알아 맞추었기 때문에 현종을 살뜰히 보살펴 줄수 있었다.
사적(史籍)에 기록된 것을 보면 안록산(安祿山)”복수과슬(腹垂過膝), 중삼백삼십근(重三百三十斤)”, 여차치비이위풍화절대적양비소애(如此癡肥以爲風化絶代的楊妃所愛), 야난상상(也難想像), 자치통감소재(資治通鑑所載), 역공비실록(亦恐非實錄).”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안록산의 몸무게는 330 ()이었으며 살이 뒤룩 뒤룩쪄서 아래 뱃가죽이 축 늘어져서 거의 무릎에 와서 닿을 정도였다. 그리고 안록산의 말씨는 품위가 없었고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를 지니지 못했으며 타고난 재주와 재능도 없었기 때문에 양귀비 스타일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자치통감에 수록되어 있는 양귀비에 대한 사적은 아마도 진실이 아닌 것 같다.” 는 뜻이다.

330
()165kg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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