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9일 일요일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곡양구탑(曲陽狗塔)

하북성(河北省) 곡양현(曲陽縣) 문덕향(文德鄕) 왕대북촌(王臺北村)의 백초(白草) 언덕에 고탑(高塔)이 하나 서있는데 이 탑은 동한(東漢 : 서기 25 년 - 서기 189 년) 광무제(光武帝 : 서기 25 년 - 서기 57 년)의 의로운 개를 위하여 건립된 탑으로써 곡양구탑(曲陽狗塔)이라고 칭하는데 다음과 같은 광무제 유수(劉秀)와 관련된 고사(故事)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西末年,王莽篡权,改国号为新朝,而其荒淫无道,新朝上下官吏皆虎作,助纣为虐,天下哀鸿遍野。推翻王莽的治便在河南南起兵,之后被王莽的大王朗一路追天,到曲阳县王台北村南的白草坡上,便藏在草中。时值秋末,白草坡上的草已,一点即燃。追兵一找不到秀,就始放火山。
眼看秀即葬身火海,突然王台北村跑来狗,只见它附近的一水塘中,然后再湿淋淋地秀身边滚,把其周的枯草弄湿。就这样,那条黄狗周而始,一次次地在枯草上翻于制止住烈火的蔓延,而保住了秀的性命,但那条黄狗却因累而死去。秀十分感激这条性的犬,将它埋葬在白草坡上才离去。帝以后,念念不忘那条义犬的救命之恩,就令曲阳当地石匠在那白草坡上修建了一座高塔,以示对义犬永久念,而那白草坡也被后人称为狗塔坡。曲阳县在西汉时就是有名的雕刻之,那狗塔全部是用地出白玉及瓦精雕筑成,共13,高50米,塔形呈平面八角形,每四面均有券,塔身各高度及塔自下而上逐层递减,收分得体。狗塔底座四面的板上,雕刻着的犬,栩栩如生,引人入。狗塔第一的外壁上刻有光武帝为义自撰的祭文,塔一至四的石壁上刻有浮雕壁:第一犬救惊险场面,赞颂犬舍死救人的精神;第二荆轲刺秦王面,表了燕国侠荆轲不畏强暴、舍死报国的英雄气概。第三秀大面,曲石雕人通自己的艺术构精湛的雕刻技,使活生生的然于石之上,以此表光武帝秀推翻王莽、天下服的正;第四雨耕,此浮雕刻的是夫赶着耕牛在清风细雨中作的面,表帝之后,人安居乐业风调、五谷丰登的社会现状狗塔的那些浮雕作品,构图严谨,布局匀称,刀工细腻,形象逼艺术高,代表着当时雕刻人的技水平。
狗塔是中最早的念碑式大型石雕建筑物之一,也是中国东汉时期石雕艺术成就高的建筑物。令人痛惜的是,座矗立了近千年的狗塔因年久失修在上世六十年代倒塌,但光武帝感恩筑狗塔传说片古老的土地上。" 
다시 말하면서한 말년 왕망이 정권을 탈취한 후 국호를 신()이라고 칭했다. 왕망은 황음무도한 정치를 했으며 조정의 상하 관리들은 모두 왕망의 앞잡이가 되어 왕망을 도왔기 때문에 도처에 이재민이 가득했다.
이때 유수는 하남성 남양에서 왕망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거를 일으켰다. 유수는 왕망의 대장군 왕랑을 죽이고 나서 곡양현 왕대북촌의 남쪽에 있는 백초언덕의 풀속으로 도망쳐 숨어 있었다.
때는 늦가을 이라서 백초 언덕의 풀들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유수를 뒤쫓아 오던 왕망의 군대들은 유수가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머지 산에 불을 질렀다. 이제 곧 유수의 몸은 불바다 속에 묻혀있을 찰라였다.
이때 돌연히 누런 큰개 한 마리가 뛰어와서 근처에 있는 연못속으로 들어가 뒹굴더니 온 몸에 물을 묻혀 유수의 주위에 있는 마른 풀에 물을 척척하게 발랐다. 결국 불길은 유수가 숨어있는 곳을 덮치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유수는 살아 남을 수 있었고 황구는 지쳐서 그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유수는 의로운 황구를 그 자리에 묻어주고 무사히 백초언덕을 떠났다. 유수가 동한을 건립하고 초대왕 광무제로 군림한 후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준 황구의 생각이 계속 머리속에 떠올라 곡양현의 석공(石工)들에게백초언덕에의견(義犬) 황구(黃狗)위한석탑을높이세우라고어명을내렸다.
그후부터사람들은백초언덕을구탑언덕이라고칭했다.
곡양현은서한조각의고향이었으며구탑은당지에서생산되는백옥(白玉)벽돌과기와를사용하여건축되었으며13 층으로높이는50m 이다. 탑의모양은팔각형이고매층마다4 면에아치형문을냈으며위로올라갈수록탑의높이와탑경(塔徑)점점좁아진다.
구탑의가장부분에백개의여러모양의개를살아있는처럼생동감있게조각하였기때문에사람들을끌어당기게만들어주고있다.
구탑의층에는광무제유수가의견(義犬)위하여친히제문(祭文)있다. 탑의1 층에서4 까지석벽에아름다운벽화도그려져있다.
1 층에는의견(義犬)유수를구해주는아슬아슬한장면이묘사되어있고사람들로하여금의견이자기몸을희생시켜사람을구해의견을칭송하게만들어주고있다.
2 층에는 형가다진왕(荆轲刺秦王)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 나라의 협객 형가(荆轲)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하여 보여 준 영웅적인 기개가 담겨있는 그림이다.
3 층에는 유수가 곤양에서 전투하는 장면을 묘사해 놓았다. 이는 석공들이 심혈을 기울여 생동감있게 유수가 왕망 정권을 전복시키는 장면이다.
4 층에는 전원우경도라고 칭하는데 청풍세우(淸風細雨) 중에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장면인데 유수가 왕이 된 후 백성들은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오곡이 풍성한 사회상을 잘 묘사한 그림이다.
구탑의 조각은 구도가 빈틈없고 합리적으로 배치되었으며 실물과 똑 같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 곡양의 석공들의 탁월한 조각 기예(技藝)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곡양구탑은중국에서가장오래된대형건축물하나이며동한시대의조각예술이훌륭했었다는것을나타내주고있다.
그러나거의2000동안면모를유지해오던구탑은1960대에수리를잘못하여애석하게도무너져버리고말았다. 그러나광무제의황구에대한은혜에감사하여건립한구탑의전설은지금도살아서탑이있던바로자리에남아있다.”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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