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일 일요일

여성들의 남장(男裝) 고사(故事)

여성들의 남장(男裝) 고사(故事)
여성들이 남장(男裝)한 역사는 유구하다.
안자춘추(晏子春秋)-잡편(雜篇)에 보면 제영공시국중부인다위남자복이열공불능금(齊靈公時國中婦人多爲男子服而靈公不能禁)”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제 나라 영공 때 수 많은 부인들이 남자 옷 차림을 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영공은 금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는 뜻이다.
명사(明史) 270 ()에 수록되어 있는 진양옥전(秦良玉傳)에 보면 진양옥시명말인(秦良玉是明末人), 형제개작고관(兄弟皆作高官),질아개시명장(姪兒皆是名將). 타본신시석주선무사마천승적처자(本是石柱宣撫使馬千乘的妻子). 천승생시(千乘生時), 타이융장통병조전(已戎裝統兵助戰), 천승사료이후(千乘死了以後), 타대령기직(代領其職), 병통기중(幷統其衆).”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진양옥은 명 나라 말기 여자인데 형제들 중에 고관들도 있었고 조카들은 모두 명나라 명장이었다. 진양옥은 본래 석주의 선무사 마천승의 부인이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그녀는 무장하고 군대를 통솔하여 전쟁에 출정하였으며 남편이 죽고나서 남편의 직위를 물려받아 군대를 통솔하였다.” 는 뜻이다.
선무사란?
전후(戰後) 지구나 수해 지구나 한해 지구의 순찰과 감시를 위하여 정부에서 파견된 고급 군관(軍官)을 일컫는다.
또 명사(明史) 310 ()에 보면 원말명옥진거촉(元末明玉珍據蜀), 위위남자복(僞爲男子服),혼적민간(混跡民間), 기이피구입오(旣而被驅入伍), 전전칠년(轉戰七年), 인막지기처녀야(人莫知其處女也). 후종옥진파운남환우기숙부(後從玉珍破雲南還遇其叔父), 속귀성도(贖歸成都), 시개장이행(始改裝而行). 동시종군자(同時從軍者), 막불경이(莫不驚異).”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 나라 말기에 명옥진은 남장을 하고 촉()에 웅거하며 진면목을 숨기고 민간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군에 입대하여 남정들과 어깨를 겨누며 7 년 동안 참전한 용사였다. 사람들은 명옥진이 처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명옥진은 종군 후 운남에서 숙부를 만나 진상을 밝히고 다시 성도(成都)로 돌아와 여장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나서 당시 함께 7 년 동안 군대 생활을 했던 동료들이 모두 놀랬다.” 는 뜻이다.
이는 처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남장을 하고 7 년 동안 군대 생활을 한 고사이다.
또 신당서(新唐書)-최영전(崔寧傳)에 보면 영자촉입조(寧自蜀入朝), 유기제관수성도(留其弟寬守成都), 양소림승간이정기수천습지(楊小琳乘間以精騎數千襲之), 관전력굴(寬戰力屈). 영첩소효과(寧妾素驍果), 즉출가재십만모용사득천인(卽出家財十萬募勇士得千人), 설부대자장이진(設部隊自將以進), 양소림대구이거(楊小琳大懼而去).”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최영이 촉()을 방위하다가 조정에 들어가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동생 최관으로 하여금 성도를 지키게 하였다. 그때 양소림은 기회를 틈타서 수 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성도를 습격하였다. 최관의 전력은 굴복했다. 이때 최영의 첩() 소효과는 즉시 재산을 털어 천 여명의 용사들을 모집하여 이끌고 양소림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양소림의 군대는 대경실색하고 물러섰다.” 는 뜻이다.
또 태평광기(太平廣記)에 보면 지덕원년(至德元年), 위주부인후사양등삼인(衛州婦人侯四孃等三人), 자혈알어군전(刺血謁於軍前), 원입의영토적(願入義營討賊). 위주후사양(衛州侯四孃), 활주당사양급청주왕이양삼인입영조토사사명지란(滑州唐四孃及靑州王二孃三人入營助討史思明之亂).”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당 나라 제 11 대왕 지덕 원년(서기 756 )에 위주 부인 후사양 등 세 명의 여자들은 혈서를 써서 군부 앞에 보이며 군대에 입대하여 적을 소탕하겠다고 장담했다. 위주 후사양과 활주 당사양과 청주 왕이양 등 세 명의 여자들은 군에 입대하여 사사명의 난을 평정하는데 일조(一助)하였다.” 는 뜻이다.
사사명(서기 703 서기 761 )은 당 나라 무장으로 서기 755 년부터 서기 763 지 당 나라를 뒤흔든 안록산의 난에서 부장으로 활약했다.
여자들이 남장을 하고 군대에 입대하여적과 싸운 사건 외에 남장을 하고 관료가 된 사건도 비일비재하였다.
태평광기에 보면 장찰적처자여찰양상근(張察的妻子與察樣貌相近). 찰사후(察死後), 타교장위칭시찰적제제(喬裝僞稱是察的弟弟), 재곽자의막하주관(在郭子儀幕下做官), 이경천지어사대부적(而更遷至御史大夫的).”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장찰의 부인과 장찰은 얼굴 모양이 서로 비슷하였다. 남편 장찰이 죽은 후 장찰의 부인은 남장으로 변장하고 나서 장찰의 남동생이라고 속였다. 그리고 곽자의 막부의 관리가 되었으며 후에 어사대부의 자리 까지 승진하였다.” 는 뜻이다.
곽자의(서기697 서기 781 )는 당 나라 장군이자 정치가로써 안사의 난과 번진의 난을 평정하는데 막대한 공을 세웠다.
어사대부란? 백관(百官)을 감찰(監察)하던 부승상(副丞相)의 관직이었으며 오늘 날 대한민국의 감사원장직과 비슷한 관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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