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의약학(醫藥學)은 불교(佛敎)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천축(天竺 : 인도의 옛 이름)과 서역 지방의 의저(醫著)와 의술(醫術)과 방약(方藥)과 위생습관 등이 중국으로 전입되어 중국 의약학(醫藥學)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첫째 의술(醫術) 방면을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천축 의술 중 뛰어난 의술 중 하나는 금침발장술(金針拔障術)이다. 금비술(金篦術)이라고도 칭한다. 금침(金針)을 사용하여 백내장(白內障 : Cataract)을 치료하면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남북조(南北朝) 때 한문으로 번역된 천축의 ’대반날반경(大般涅槃經)’8 권(卷)에 보면 ”양의즉이금비결기맹인안막(良醫卽以金篦決盲人眼膜)” 이라고 복명(複明)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하면 ”양의(良醫)가 금침으로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 는 뜻이다.
소량(萧梁 : 서기 502 년 – 서기 557 년) 때 저서 양서(梁書) 22 권(卷) ’태조오왕(太祖五王)’ 에 보면 ”태조제구자회(太祖第九子恢), 유효성(有孝性), 기생모비태비목유질(其生母費太妃目有疾), 구폐시첨(久廢視瞻). 유북도도인혜룡득치차술(有北渡道人慧龍得治此術), 회청지(恢請之). 기지(旣至), 공중홀견성승(空中忽見聖僧). 급혜룡하침(及慧龍下鍼), 활연개랑(豁然開朗). 함위정성소치(咸謂精誠所致).””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양(梁) 나라 太祖(蕭衍 : 서기 502 년 – 서기 549 년)의 아홉째 아들 소회(蕭恢)의 효성은 지극하였다. 회(恢)의 생모 비태비(費太妃)가 안질이 생겨 오랫 동안 볼수 없었다. 양 나라 수도(首都) 건강(建康)의 북쪽 나루터에 혜룡(慧龍)이라고 불리는 도인(道人)이 금비술에 정통하다는 소문을 듣고 회가 초청하였다. 혜룡 도인이 도착하니 별안간 공중에 성승(聖僧)이 나타나 보였다. 혜룡이 침을 놓은 후 회(恢)의 생모(生母) 비태비(費太妃)의 눈 앞이 환해졌다. 모두 정성을 드린 덕택이었다.” 는 뜻이다.
당(唐) 나라 중엽 까지 금비술이 유행했었다. 당(唐) 나라 제 10 대왕 현종(玄宗) 천보(天寶) 11 년(서기 752 년)에 왕도(王燾)가 저술한 외대비요(外臺秘要) 21 권(卷)의 천축경론안편(天竺經論眼篇)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안무소인기(眼無所因起), 홀연막막(忽然膜膜), 불통불양(不痛不痒), 점점불명(漸漸不明), 구력연세(久歷年歲), 수지실명(遂至失明). 영관용상(令觀容狀), 안형불이(眼形不異), 유정당안중앙소주자리(惟正當眼中央小珠子里), 내유기장(乃有其障), 작청백색(作靑白色). 수불변물(雖不辨物), 우지명암삼광(優知明暗三光), 지주지야(知晝知夜). 여차지자(如此之者), 명작뇌류청맹안(名作腦流靑盲眼). 미환시(未患時), 홀각안전시견비승흑자(忽覺眼前時見飛蠅黑子), 축안상하래거(逐眼上下來去). 차의용금비결(此宜用金篦決), 일침지후활약개운이견백일(一針之後豁若開雲而見白日).”
다시 말하면 ”눈은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얇은 막이 눈 앞에 덮혀 흐릿해 져서 물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통증도 없고 가렵지도 않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흐려져서 결국 실명하게 된다. 자세히 살펴 보면 눈의 모양에는 이상이 없고 다만 눈의 중앙에 있는 검정 구슬 모양의 동자 위에 청백색장이 덮힌다. 비록 물건을 잘 구별하지 못하지만 밤인지? 낮인지? 는 구별할 수 있고 명암은 구별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의 눈을 뇌류청맹안(腦流靑盲眼 : Glaucosis)이라고 부른다. 뇌류청맹안이 생기기 전에 갑자기 눈 속에서 아주 작은 파리 한 마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스스로 볼수 있다. 이런 경우 금침 치료가 가장 좋다. 금침 한 방으로 구름이 걷힌 밝은 날을 볼수 있다.” 는 뜻이다.
왕도(王燾 : 서기 670 년 – 서기 755 년)는 이상과 같이 생동감 있는 증상과 형상과 효과를 잘 묘사해 놓았다.
후세인들은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길래 당 나라 중엽(中葉) 이후의 시인들도 금침에 대한 찬송시(讚頌詩)를 읊었다.
두보(杜甫)의 시(詩) 알문공상방(谒文公上方)에 보면
”금비괄안막(金篦刮眼膜), 가중백차거(價重百車渠).”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덮힌 얇은 막을 금침으로 걷어내니 백개의 차거(車渠 : 밤에도 빛을 발하는 반투명적 불교칠보석(佛敎七寶石) 중의 하나) 보다 더 중요하지 아니한가?” 라는 뜻이다.
또 유우석(劉禹錫)의 증안의파라문승(贈眼醫婆羅門僧)이란 시(詩)에 보면
”삼추상망안(三秋傷望眼), 종일곡도궁(終日哭途窮). 양목금선암(兩目今先暗), 중년사노옹(中年似老翁). 간주점성벽(看朱漸成碧), 수일불금풍(羞日不禁風). 사유금비술(師有金篦術), 여하위발몽(如何爲發蒙).”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3 년 동안 눈이 아파서 하루 종일 엄살로 우는 소리내는 구려! 두 눈이 먼저 어두워 지니 중년 늙은이가 되었구료! 붉은색이 푸른색으로 보이고 눈이 부시어 해를 쳐다보지 못하며 바람을 견디지 못하는구나! 스님께 금침을 한 대 맞고나니 눈 앞이 어찌 그리 밝은지 모르겠구나!” 는 뜻이다.
당(唐) 나라 후기(後期) 부터 금비술(金篦術)은 한의학에 융합되었다. 왜냐하면 초기의 금비술(金篦術)은 비교적 서투르고 거칠고 조잡했으며 시술 중이나 시술 후에 합병증도 나타났고 치유 성공율도 저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고 역대 의가에서 임상 경험을 통하여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한의안과(漢醫眼科)에서 금비술(金篦術)은 일종의 특기(特技)가 되었다.
1975 년 모택동이 백내장에 걸려 두 눈이 모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서양의 의술로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나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당시 안과 전문의사 당유지(唐由之)의 금비술(金篦術)에 의하여 모택동의 한 쪽 눈의 시력을 되찾았다. 또 한 쪽 눈의 금비술(金篦術) 시술을 받지못하고 모택동은 그 이듬해 죽어 버렸다.
금비술(金篦術)은 신체가 허약한 노인들과 심장병 환자들과 당뇨병 환자들에게도 가능한 복명술(復明術)이다.
고대 천축의 의술 중 금비술(金篦術) 뿐만 아니라 외과 수술의 수준은 높았다.
동한(東漢) 때 한문으로 번역된 ’고녀저역인연경(桍女祇域因緣經)’ 에 보면 ”유의왕기역적개로(有醫王祈域(耆域)的開颅), 부복술(剖腹術), 병용신고(幷用神膏), 여아국한말화타적의술유사(與我國漢末華佗的醫術類似).”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명의 왕기역의 두개골 절개 수술과 개복 수술과 신고의 사용 등은 동한말 화타의 의술과 비슷하다.” 는 뜻이다. 사실 화타가 일찍이 천축의 외과 수술을 익혔었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당 나라 때 단성식(段成式)의 저서 유양잡조(酉陽雜俎) 1 권(卷)에 보면 역시 범승(梵僧)이 코속에서 길어나는 군살을 도려 낸 다음과 같은 의안(醫案)이 수록되어 있다.
”당순종영정공원805년시(唐順宗永貞(公元805年時), 장안동시재주왕포지녀환유기질(長安東市財主王布之女患有奇疾). 차녀방령십사오(此女芳齡十四五), 염려총오(艶麗聰悟). 불행기양비공내각유식육생출(不幸其兩鼻孔內各有息肉生出), 수괘어외(垂掛於外), 형여조협자(形如皂莢子), 근여마선(根如麻線), 장촌허(長寸許), 촉지통입심수(觸之痛入心髓). 기부편구명의(其父遍求名醫), 파전수백만(破錢數百萬), 치지무효(治之無效). 홀일일(忽一日), 유범승걸식(有梵僧乞食), 인문포(因問布) : ”지군여유이질(知君女有異疾), 가일견(可一見), 오능지지(吾能止之). 포문대희(布聞大喜), 즉연승진지(卽延僧診之). 승내취약(僧乃取藥), 색정백(色正白), 취입병녀비중(吹入病女鼻中). 소경(少頃), 장식육적거(將息肉摘去), 근출사허황수(僅出些許黃水), 병무소고(幷無所苦). 포수지백금(布酬之百金), 범승불수(梵僧不受), 유걸소적식육(惟乞所摘息肉), 진중이거(珍重而去).”
다시 말하면 ”당 나라 제 14 대왕 순종 영정 (서기 805 년) 때 장안의 동쪽에 왕포라고 불리는 부자가 살았는데 방년 열 너 댓살 된 딸이 이상한 병에 걸려 있었다. 곱고 아름답고 영리하며 똑똑한 딸이 불행하게도 양쪽 콧구멍 속에서 군살이 길어 나와 코 밖으로 보기 흉하게 늘어 뜨려져 있었다. 코속에서 길어 나온 군살은 외형상으로 쥐엄나무 열매의 씨 처럼 생겼으며 군살의 뿌리는 삼실(麻絲)과 같고 길이는 일 촌(寸) 쯤 되는데 만지면 무지하게 아팠다. 왕포는 자기 딸을 위하여 백방으로 명의를 찾아가 치료해 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고 수 많은 금전 만 낭비했다. 갑자기 어느 날 범승(梵僧)이 걸식하러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범승(梵僧)은 왕포에게 ’당신 딸이 괴상한 병에 걸려있는 것을 압니다. 제가 치료할 수 있는지? 제에게 한 번 보여 주십시요.’ 라고 물었다. 왕포는 매우 기뻐하며 범승에게 ”즉시 집안으로 들어와 내딸을 진찰해 보십시요.” 라고 범승(梵僧)에게 말했다. 범승은 진찰한 후 하얀 가루 약을 처녀의 코속에 불어 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코속의 군살이 떨어졌다. 단지 누런 콧물 만 흘러 나올 뿐 처녀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왕포는 범승(梵僧)에게 보수로써 많은 돈을 주었다. 그러나 범승(梵僧)은 거절하며 ”당신 딸의 코속의 군살을 떼어내 준 댓가는 내가 걸식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베푼 걸식을 더 진기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떠나갑니다.” 고 왕포에게 말했다.
이 고사(故事)에서 범승(梵僧 : 고대 인도의 승려)의 의술이 얼마나 고명한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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