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
국청사(國淸寺)는 절강성(浙江省) 태주시(台州市) 천태현(天台縣) 불하령(佛霞岺)의 동북쪽에 있다.
국청사(國淸寺)는 산동성(山東省) 태안현(泰安縣)에 있는 영암사(靈岩寺)와 남경(南京) 섭산(攝山)에 있는 서하사(棲霞寺)와 호북성 당양현(當陽縣)에 있는 옥천사(玉泉寺)와 더불어 중국의 4 대 명사(名寺)이다.
국청사(國淸寺)는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발원지이다. 천태종(天台宗)의 창시인은 지의(智顗) 스님이다. 지의(智顗) 스님과 그의 제자 관정(灌頂) 스님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진(陳) 나라 선제(宣帝) 태건(太建) 7 년(서기 575 년)에 그 당시 명성이 높은 지의 (智顗) 스님이 천태산(天台山)에 왔다.
그때 선제(宣帝)는 지의(智顗) 스님을 위하여 천태산에 사원을 짓고 수선사(修禪寺)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측령을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선제(宣帝)는 ” 할시풍현조부세이충중비(割始豊縣調賦稅以充衆費), 견양호민노역이공신수(蠲兩戶民勞役以供薪水).” 라고 어명을 내렸다.
다시 말하면 풍현(豊縣 : 현재 天台縣)의 농지세(農地稅)의 일부를 떼내어 수선사(修禪寺) 건축 비용으로 사용하고 두 사람을 강제 노역시키고 그 두 사람의 월급을 모아서 지의 스님께 드려라.” 는 뜻이다.
지의(智顗) 스님은 수선사(修禪寺)에서 약 10여 년 동안 수행하였다. 지의(智顗) 스님은 진(陳) 나라 제 5 대왕 후주(後主 : 서기 583 년 – 서기 589 년)의 간청에 의하여 금능(金陵)으로 하산하여 불경을 강의하였다.
바로 그때는 진(陳) 나라 말기(末期)라서 시국이 매우 혼란한 때였다. 왜내하면 후주(後主) 숙보(叔寶) 정명(禎明) 3 년(서기 589 년)에 수(隋) 나라 군사들이 남침(南侵)하여 진(陳) 나라의 수도(首都) 건강(建康 : 현재 南京)을 공격한 후 숙보(叔寶)를 생포함으로써 진(陳) 나라는 망하고 수(隋)가 전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이다.
지의(智顗) 스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능을 떠나 여산(廬山), 남악(南岳), 형주(荊州), 양주(楊州) 등지를 행각(行脚)하기 시작하였다.
최후로 수(隋) 나라 제 1 대왕 문제(文帝) 개황(開皇) 15 년(서기 595 년)에 다시 천태산으로 돌아왔다. 결국 10여 년을 행각하다가 천태산으로 다시 돌아 온 셈이다.
지의(智顗) 스님이 천태산(天台山)에 돌아와 둘러보니 수선사(修禪寺)는 황폐되어 있었다. 지의(智顗) 스님은 수선사(修禪寺)를 다시 복건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의(智顗) 스님은 공사는 시작해 놓고 건축 자금 부족으로 건축 도중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적하였다.
지의(智顗) 스님은 임종시(臨終時) 수양제(隋煬帝)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遺書)를 남겼다.
”불견사성(不見寺成), 명목위한(暝目爲恨).”
다시 말하면 ”절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니 한을 품고 눈을 감습니다.” 는 뜻이다.
지의(智顗) 스님이 원적(圓寂)한 후 수양제(隋煬帝)가 지의(智顗) 스님의 유서를 읽어보고 매우 감동하여 사마왕홍(司馬王弘)을 즉시 파견하여 국청사(國淸寺)를 완공케하였다.
결국 수(隋) 나라 제 2 대왕 양제(煬帝 : 廣) 대업원년(大業元年 : 서기 605 년)에 수양제(隋煬帝)의 도움으로 수선사를 복건하여 국청사(國淸寺)라고 칭했다. 국청사(國淸寺)는 건축 당시 천태사(天台寺)라고 불렀으나 수양제(隋煬帝)가 국청사(國淸寺)라고 이름을 하사하여 지금까지 국청사(國淸寺)라고 부르고 있다.
국청사(國淸寺)는 관정(灌頂) 스님이 흥건하여 첫번 째 국청사(國淸寺)의 주지(住持) 스님이 되었다. 관정(灌頂) 스님은 일생 동안 지의(智顗) 스님을 따라 다녔다. 지의(智顗) 스님이 원적한 후 지의(智顗) 스님이 일생 동안 전파한 천태종(天台宗)의 교리(敎理)와 지의(智顗) 스님의 언행(言行)을 책으로 저술하였다.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라고 칭하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법화현의(法華玄義)와 법화문구(法華文句)와 마가지관(摩訶止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국청사(國淸寺)는 천태종(天台宗)의 발원지로 교법을 널리 전파하게 되었다. 관정(灌頂) 스님은 지의(智顗) 스님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천태종(天台宗)은 지의(智顗) 스님이 창립하고 관정 스님이 계승 발전시킨 종파(宗派)이다.
국청사(國淸寺)는 천태종(天台宗)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사원이다. 지의(智顗) 스님의 유해가 묻혀있는 탑원(塔院)을 비롯하여 관정(灌頂) 스님의 묘탑(墓塔)과 수양제(隋煬帝)가 지의 스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축한 수탑(隋塔) 등이 있다.
국청사(國淸寺)는 한국과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모태임과 동시에 일본의 일연종(日蓮宗)의 모태이다.
당(唐) 나라 제 13 대왕 덕종(德宗) 정원(貞元) 20년(서기 804 년)에 일본의 명승(名僧) 전교대사(傳敎大師) 최징(最澄) 스님과 그의 제자 의진(義眞) 스님이 천태산(天台山)을 방문하여 도수(道遂) 스님과 행만(行滿) 스님으로 부터 천태교의(天台敎義)와 보살계(菩薩戒)를 학습하고 나서 일본으로 귀국하여 비예산(比叡山)에 일본 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였다.
한(漢), 진(晉), 육조(六朝) 때 갈현(葛玄)과 갈홍(葛洪)과 도홍경(陶弘景) 등이 천태산(天台山)에서 수도하였고 연단(煉丹)하였으며 왕희지(王羲之), 서하객(徐霞客), 사영운(謝靈運), 주희(朱熹), 맹호연(孟浩然), 육유(陸游), 이태백(李太白), 소동파(蘇東坡), 고개지(顧愷之), 강유위(康有爲), 곽말약(郭沫若), 등박초(鄧朴初)와 같은 명사(名士)들이 천태산을 다녀갔다.
한말(漢末) 때 고승(高僧) 갈현(葛玄)은 천태산 중 도계(道溪)라고 불리는 선산(仙山)에서 연단하였다. 갈현은 연단(煉丹) 전문서적 포박자(抱朴子)의 저자 갈홍(葛洪 : 서기 282 년 – 서기 362 년)의 종조부(從祖父)이다.
천태산(天台山)의 주봉(主峯) 화정산(華頂山)은 해발 1098m 이다. 천태산(天台山)에서 백출(白朮)과 복령(茯苓)과 석곡(石斛) 등 명귀(名貴) 약재 1000여 종이 생산된다. 그중 천태오약(天台烏藥)은 품질이 독특하여 불노장생약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1000m 이상에서 만 자라는 석량(石梁)은 천연 녹색(綠色) 염료(染料)로 사용되고 있다. 절강성 안에 있는 천태산(天台山)과 보타산(普陀山)은 중국 10대 종교 명산(名山)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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