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일 일요일

회병(懷丙) 스님의 아이디어

회병(懷丙) 스님의 아이디어

다음은 송사(宋史)-승회병전(僧懷丙傳)에 수록되어 있는 불가고사(佛家故事) 중 하나이다.

<<”하중부부량(河中府浮梁), 용철우팔유지(用鐵牛八維之), 일우차수만근(一牛且數萬斤). 후수폭창절양(後水暴漲絶梁), 견우몰어하(牽牛沒於河), 모능출지자(募能出之者). 회병잉대주실토(懷丙以二大舟實土), 용대목위권형상구우(用大木爲權衡狀鉤牛), 서거기토(徐去其土), 주부우출(舟浮牛出). 전운사장도이문(轉運使張燾以聞), 사자의(賜紫衣).”>>


다시말하면

하중부(河中府)에 부교(浮橋)가 하나 있다. 하중부는 현재 山西省 永濟縣 浦州鎭이다. 영제현는 산서성의 최남단에 위치한 현으로써 황화 강변에 있으며 서안(西安)의 동쪽 140k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이 부교(浮橋)는 여덟 마리의 쇠로 주조(鑄造)한 소를 연결시켜 만든 다리이다. 옛날에 쇠로 주조한 다리를 만들면 수재(水災)를 면할 수 있다는 미신에 의하여 다리도 만들고 쇠로 주조한 소를 강물 속에 던져 넣으며 수신(水神)에게 고사도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쇠로 주조한 한 마리의 소의 무게는 몇 만근()이 넘는다.

송나라 영종(英宗(趙曙)) 치평(治平) 연간(서기 1064 서기 1068 )에 황하유역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황하의 수량이 급증함에 따라 부교가 절단되면서 여덟 마리의 쇠로 만든 소 중에서 한 마리가 강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영종은 공정사(工程師)들을 파견하여 철우(鐵牛)를 인양(引揚) 할 계획을 세우라고 영제현에 명하였다. 그러나 공정사들은 전전긍긍하며 속수무책이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영제현청(永濟縣廳)에서는 강물 밑에 가라앉은 소를 끌어내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고 방문(榜文)을 살포하였다.

이때 회병(懷丙) 스님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고안해 냈다. 회병(懷丙) 스님은 두 척의 큰 배에 흙과 모래와 돌멩이를 가득실었다. 흙을 가득 적재한 배는 흙의 무게 때문에 가라앉기 직전이었다. 회병(懷丙) 스님은 기다란 전보대를 두 배위에 가로질러 놓은 다음 전보대의 양쪽 끝을 동아줄로 꽁꽁 묶어 배가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켜 놓았다. 그리고 나서 사람이 강물 속에 들어가 동아줄로 침몰된 소를 묶어 전보대의 양쪽 끝에 꽁꽁 매달았다.

그 다음 서서히 뱃속에 가득 들어있는 흙을 강물 속으로 퍼내기 시작하였다. 뱃속에 들어있는 흙을 절반 정도 퍼내버렸을 때 부터 침몰된 소는 물위에 둥둥 뜨기 시작하였다.

결국 강물 속에 침몰되었던 소의 인양(引揚) 작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영제현청의 전운사(轉運使) 장도(張燾)는 이와 같은 사실을 조정(朝廷)에 상세히 보고했다.

회병(懷丙) 스님의 공적을 장려하는 의미에서 특별 어명(御命)에 의하여 회병(懷丙) 스님에게 삼품(三品) 이상의 관원(官員)들 만이 입어볼 수 있는 자색관복(紫色官服(紫袍))이 하사(下賜)되었다.” 는 뜻이다.

회병(懷丙) 스님은 송() 나라 때 저명한 화상(和尙)이며 법명(法名)은 회병(懷丙) 이다. 북송(北宋) 때 진정현(眞定縣 : 현재 河北省 正定縣) 태생이다. 회병(懷丙) 스님은 어릴 때 부터 천자총명하였으며 생각이 깊어 여러가지 어려운 공정(工程)의 난제(難題)들을 해결하여 주었다. 지금부터 일 천 여년 전에 물의 부력(浮力)을 이용할 줄 알고 있었던 회병(懷丙) 스님의 지혜는 세인들의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후세 사람들은 회병(懷丙) 스님이 초인적인 지력(智力)을 겸비한 스님이라고 추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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