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求道)를 위하여 입당(入唐)한 조선의 고승(高僧)
중국 당(唐 : 서기618 년 - 서기907년) 나라는 신라(新羅 : 서기57년 - 서기935 년)가 삼국을 통일한 시기를 전후(前後)로 군림한 왕조(王朝)이다.
수 많은 조선의 고승들이 당(唐) 나라에 구법(求法)하러 갔다.
그중 유명한 고승들은 다음과 같다.
의상(義湘), 자장(慈藏), 원측(圓測), 도증(道證), 명랑(明朗), 혜통(惠通), 혜초(慧超), 법랑(法朗), 신행(神行), 도의(道義), 체징(體澄), 혜조(慧照), 혜철(惠哲), 무염(無染), 현욱(玄昱), 도윤(道允), 홍척(弘陟), 범일(梵日), 이엄(利嚴) 등등 이다.
이들 고승 중에는 당 나라에 머무는 동안 현장(玄奘)과 금강지(金剛智)의 역경(譯經) 사업에 동참했으며 당 나라 불교 종파의 조직 활동에 적극 참여했었다.
그리고 당 나라에서 불법을 학습한 후 조선으로 귀국할 때 대량의 불경전(佛經典)과 문물(文物)을 휴대하고 돌아왔으며 귀국한 후 계속 불교경론 연구에 힘썼다.
고승들은 귀국 후 명산에 절을 세우고 조선 민족 특유의 ”오교구산(五敎九山)” 의 불교 종파를 형성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朝鮮)의 오교(五敎)란? 열반(涅槃), 계율(戒律), 원융(圓融), 법상(法相), 법성(法性)을 일컬으며 중국의 교종법통(交宗法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신라의 의상(義湘 : 서기625년 - 서기702년) 스님은 당 나라에 가서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嚴) 스님으로 부터 화엄(華嚴)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강원도 낙산사(洛山寺)와 경상북도 부석사(浮石寺) 등 많은 절을 지어 신라 화엄종에 공헌한 바가 컸다. 저서로는 화엄일승법계도가 있다. 의상 스님은 화엄경 연구에 탁월하였으며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시조가 되었다.
당 나라 제 2 대왕 태종(太宗 : 서기 626 년 – 서기 649 년)으로 부터 상(賞)을 받은 바 있는 자장(慈藏) 스님은 당 나라에서 귀국할 때 불사리(佛舍利)와 불가사(佛家裟)를 신라에 가지고 들어왔다. 자장 스님은 승려들을 통제하는 승려들의 계율(戒律)을 정비하고 당제관복(唐制冠服)을 조선 사람들에게 맞는 관복으로 바꾸어 사용하자고 새로운 의견을 제의하였다. 자장 스님은 통도사(通度寺)와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을 건축했으며 계율종(戒律宗)의 조사(祖師)가 되었다.
원측(圓測)은 현장(玄奘)으로 부터 불법을 배웠으며 당 나라 제 2 대왕 태종(太宗)으로 부터 도첩(度牒)을 받고 종신토록 당 나라에 머물었다. 인도의 유가행파(瑜伽行派) 안혜일(安慧一) 계(系) 학설을 중국에 전파했다. 원측은 구사종(俱舍宗 : 宗祖 世親菩薩의 구사론을 따른 小乘佛敎)과 유식종(唯識宗 : 無着과 世親에 의하여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의 한 갈래) 등 여러 학설에 정통한 스님이었다.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은 신라에 귀국하여 원측의 사상을 신라에 전파하였다. 그리고 도증은 신라 법상종(法相宗)의 이론기초를 확립하였다.
명랑(明朗) 스님은 밀교(密敎)의 고승이다.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축했으며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시조이다. 신인종은 신라 선덕여왕 때 명랑대사(明朗大師)가 개종(開宗)한 종파로써 칠종십이파(七宗十二派)의 하나이다.
혜통(惠通)은 당 나라에 가서 선무외(善無畏)로 부터 밀교(密敎)의 참뜻을 배우고 신라에 돌아와 밀종(密宗)의 교풍(敎風)을 불러 일으켰다. 후세인들은 혜통을 진언종(眞言宗)의 조사(祖師)라고 칭한다.
혜초는 당 나라에 가서 금강지로 부터 밀법(密法)을 배우고 인도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 중요한 역사 문헌(文獻)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편찬하였다.
조선의 구산(九山)이란?
실상(實相), 가지(迦智), 사굴(阇崛), 동리(桐里), 성주(聖住), 사자(師子), 희양(羲陽), 봉림(鳳林), 수미(須彌) 등 선종구산(禪宗九山)을 일컫는다.
신라의 법랑대사는 당 나라에 가서 당 나라의 선종사조(禪宗四祖) 도신(道信)으로 부터 불법을 공부하고 나서 귀국한 후 제일 먼저 도신의 선법을 전파하였다.
법랑대사의 제자 신행(神行)은 신수(神秀)의 제자 보적(普寂)의 문하생(門下生) 지공(志空)으로 부터 북종선(北宗禪)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조선에서 홍인(弘忍)과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을 전파하였다.
도의와 혜철과 홍척(弘陟)은 마조(馬祖)의 제자 서당지장(西堂地藏)으로 부터 선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 조선에 남종선(南宗禪)을 전파하였다.
그외에 혜조와 무염과 도윤과 현욱과 범일과 이엄 등은 당 나라에 가서 선법(禪法)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남종선법을 전파함으로써 조선 선종의 형성에 공헌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선종 각파의 형성과 발전은 당 나라에 가서 구법(求法)하고 돌아 온 조선의 고승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중국 선종(禪宗)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를 갖고 있다.
신라의 고승 홍척(弘陟)은 당 나라에 가서 서당지장으로 부터 선(禪)을 공부했다. 신라에 돌아 온 후 홍척(弘陟)대사는 실상사(實相寺)를 건립하고 선법(禪法)을 전파하여 실상산파(實相山派)를 형성하였다.
도의(道義) 스님은 당 나라에 가서 서당지장(西堂地藏)으로 부터 선법을 배우고 신라에 귀국하여 체징(體澄)에게 선법을 전파했다.
체징은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를 건축하고 스승 도의(道義)의 종풍(宗風)을 부흥시켰다. 도의(道義)의 종풍은 후에 가지산파(迦智山派)를 형성하였다.
범일(梵日)은 당 나라에 가서 마조의 제자 염관제안(鹽官齊安)으로 부터 사사(師事)하고 신라에 돌아와 굴산사(崛山寺)를 건립하고 문하에 수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사굴산파(阇崛山派)를 형성하였다.
혜철은 맨 처음엔 화엄(華嚴)을 공부했으나 후에 서당지장(西堂地藏)으로 부터 선(禪)을 공부하여 동리산(桐裏山)에서 선풍을 일으켰으며 동리산파(桐裏山派)를 형성하였다.
무염은 마조의 후계자 마곡보철(麻谷寶徹)로 부터 선을 공부하고 신라에 귀국하여 성주사(聖住寺)에 머물면서 열심히 전교했으며 후에 성주산파(聖住山派)를 형성하였다.
도윤은 마조의 제자 남천보원(南泉普原)과 징효절중(澄曉折中)으로 부터 사사한 후에 신라로 귀국하여 사자산사(師子山寺)를 건립하고 사자산파(師子山派)를 형성했다.
혜조(慧照)는 마조의 문하생 신감(神鑑)으로 부터 남종선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 도헌(道憲 : 一名 智憲)에게 전교했다. 도헌은 법랑을 계승했었다. 그후 신행법맥의 준범(遵範)의 제자 혜은(惠隱)으로 부터 선을 공부한 후 희양산(曦陽山)에 봉암사(鳳巖寺)를 건립하고 선법(禪法)을 전파하며 희양산파(曦陽山派)를 형성하였다.
현욱(玄昱)은 마조의 문하생 장경(章敬)으로 부터 선(禪)을 배웠다. 현욱의 제자 진경심희(眞鏡審希)는 봉림사(鳳林寺)를 건립하고 선풍(禪風)을 불러 일으켰으며 봉림산파(鳳林山派)를 형성하였다.
이엄(利嚴)은 당 나라에 가서 운거도웅(雲居道膺)의 문하에서 6 년 동안 선(禪)을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이엄(利嚴)을 스승으로 모시고 선을 배웠다. 고려 태조는 수미산(須彌山)에 이엄(利嚴)을 위하여 광조사(廣照寺)를 지어 주었으며 이엄(利嚴)은 수미산파(須彌山派)를 형성하였다.
수 많은 조선의 고승들이 입당(入唐)하여 불법을 배워 귀국한 후 불교를 전파하고 발전시켰으며 불법외에 의학과 산학(算學)과 역학(曆學)과 율학(律學)과 문학과 건축기술과 미술과 공예 등 각 방면의 기술을 습득한 후 귀국하여 조선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조선의 고승들이 당 나라의 건축술을 배워 귀국한 후 건 축과 조각과 회화(繪畵) 등에 현저한 발전을 이룩했다.
그중 신라 예술의 극치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경주(慶州) 토함산(吐含山)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신라 통일 후에 건립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신라인들의 위대한 예술 착작성에 감탄하였다.
마조(馬祖)는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 : 서기 709 년 – 서기 788 년)라고도 부른다. 마조는 선종(禪宗)의 조사(祖師)이다.
마조의 용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모기이(容貌奇異), 우행호시(牛行虎視), 인설과비(引舌過鼻), 족하유이륜문(足下有二輪紋)”
다시 말하면 ”마조의 용모는 괴상하였다. 소(牛)의 걸음에 호랑이 눈초리요, 혀가 보통 사람들 보다 훨씬 길어서 자기 혀로 코끝을 빨아 먹을수 있었으며 다리엔 두 개의 수레바퀴 무늬가 있었다.”는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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