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5일 토요일

불교 종파(宗派)의 일본 전입에 대한 소고(小考)

불교 종파(宗派)의 일본 전입에 대한 소고(小考)

불교는 서기 6세기 경 일본으로 전입되어 현재 천태(天台), 진언(眞言), 정토(淨土), (), 일연(日蓮) 및 나량(奈良)으로 종파가 나누어져 있다. 나량(奈良) 불교 계통은 일본 나량(奈良) 시대(서기 710 서기 749 )에 전입된 종파라서 나량(奈良) 불교라고 칭하며 삼론종(三論宗)과 성실종(成實宗)과 법상종(法相宗)과 구사종(俱舍宗)과 율종(律宗)과 화엄종(華嚴宗) 등이 있다.

삼론종(三論宗)은 가장 먼저 일본으로 전입된 종파이다. 고구려 스님 혜관(慧灌 : 7 세기 初)은 수() 나라로 들어가서 길장(吉藏 : 서기 549 서기 623 ) 스님으로 부터 삼론종(三論宗) 교의(敎義)를 배웠다. 그후 혜관 스님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8 (서기 625 )  왕의 어명으로 일본에 머물며 원흥사(元興寺)에서 삼론종을 전파하였으며 일본 삼론종(三論宗)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후 혜관 스님의 일본 제자들 중 지장(智藏) 스님과 도자(道慈) 스님은 자기들 끼리 당() 나라로 건너가 삼론학설을 배운 후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혜관 스님의 원흥사파(元興寺派)와 일본 스님 지장과 도자 스님이 창립한 대안사파(大安寺派)로 분리하게 되었다.

성실종과 삼론종(三論宗)은 같은 시기에 일본에 전입 되었다. 성실종과 삼론종(三論宗)은 모두 공종(空宗)의 이론에 근거한 종파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삼론종(三論宗) 학자들은 성실종의 이론을 겸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성실종을 삼론종(三論宗)의 부종(附宗)이라고 칭한다.

서기 653 년 일본 스님 도소(道昭 : 서기 629 서기 700 )는 당 나라로 건너가 현장(玄藏)으로 부터 법상종(法相宗) 교의(敎義)를 배운 후 귀국하여 원흥사(元興寺)를 홍법(弘法)의 센터로 이용하였다. 이를 남사전(南寺傳)이라고 칭한다.

또 서기 716 년 일본의 스님 현방(玄昉 : ? – 서기 746 )이 당 나라로 건너가 지주(智周) 스님으로 부터 법상종(法相宗) 교의(敎義)를 배운 후 귀국하여 흥복사(興福寺)를 중심으로 홍법(弘法)하였는데 이를 북사전(北寺傳)이라고 칭한다.

이와 같이 나량 시대는 일본 법상종의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다. 법상종에서 수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법상종은 나량 시대 일본 불교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 법상종의 스님들 중 호명(護命)과 선주(善珠)와 신예(神叡)와 같은 스님들은 법상종의 교의를 깊이 연구하여 훌륭한 저작을 출판해 낸 스님들이다.

구사종과 법상종은 소승유종(小乘有宗)과 대승유종(大乘有宗)으로 각각 불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구사종과 법상종은 같은 시기에 일본으로 전입되었으며 교의상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사종을 법상종의 부종(附宗)이라고 말한다.

화엄종(華嚴宗)은 신라(新羅) 스님 심상(審祥 : ? – 서기 742 )에 의하여 일본으로 전입되었다. 심상(審祥) 스님은 일찍이 당 나라로 건너가 유학하였다. 당 나라의 법장(法藏) 스님으로 부터 화엄종의 교의를 사사(師事)하였다. 심상(審祥) 스님은 서기 740 년 부터 서기 742 년 사이에 일본 금종사(金鐘寺) 도장(道場)에서 화엄종(華嚴宗)의 교의를 개강하신 훌륭한 스님이다. 심상(審祥) 스님의 제자 중에 일승(日僧) 양변(良弁) 스님이 배출되었다.

화엄종(華嚴宗)은 그 당시 일본의 황실 귀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성무(聖武) 천황(天皇)은 화엄종(華嚴宗)을 신봉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긴 천황이었다. 그리하여 서기 749 년에 성무 천황은 기타 여러 종원(宗院)에서도 화엄경(華嚴經) 만은 반드시 강해(講解)해야 된다는 칙령(勅令) 까지 내린 천황이었다. 그리고 성무 천황은 일본의 중앙사원(中央寺院)인 동대사(東大寺)를 화엄종(華嚴宗)의 본사(本寺)로 정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서기 754 년 일본 스님들의 초청으로 당 나라의 고승(高僧) 감진화상(鑑眞和尙 : 서기 688 서기 763 )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로자나대불(毘盧遮那大佛) 앞쪽과 대불(大佛) 측면과 하야약사사(下野藥師寺)와 관세음사(觀世音寺)의 계단(戒壇 : 스님들이 계()를 받는 단())을 새로 건축하고 남산율종을(南山律宗)을 전파하였다.

나량 6 ()이 일본에 전파된 후 일본 정부에서는 불교를 일종의 시정(施政) 사상으로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에서는 사원을 건축하고 불상(佛像)을 제조하며 송경(誦經)과 사경(寫經) 등 각 방면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각 종파에서도 중국의 각 종파의 고유한 교의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더욱 크게 발전시켰다.

서기 804 년 최징(催澄 : 서기 767 서기 822 )과 공해(空海 : 서기 774 서기 835 ) 스님이 당 나라로 건너가 구법(求法)한 후 귀국하여 최징(催澄)은 비예산(比叡山)을 중심으로 일본 천태종을 창립하였다. 공해(空海) 스님은 동사(東寺)와 고야산(高野山)을 중심으로 진언종(眞言宗)을 전파하였다.

최징(催澄)의 천태종과 공해(空海)의 진언종(眞言宗)은 일본 평안시대(平安時代 : 서기 794 서기 1192 )의 대표적인 종파가 되었다. 이들은 각기 교의(敎義) 해석과 교리(敎理) 전파에 전념하였다. 일본의 천태종은 중국의 지의() 천태종 법계(法系)인데 일념삼천(一念三千)과 삼체원융(三諦圓融)의 이론을 전파하였다.

진언종(眞言宗)은 밀교(密敎)의 즉신성불(卽身成佛) 사상(思想)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일본의 천태종이나 일본의 진언종(眞言宗)은 밀교의 사상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두 종파를 구별하기 위해서 공해(空海) 스님의 진언종(眞言宗)을 진언밀종(眞言密宗)이라고 부르고 최징(催澄) 스님의 천태종을 태밀(台密)이라고 칭한다.

12 세기 이후 불교와 고대로 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일본 민간 신앙과 일상 생활의 풍속등이 결합되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하여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일본 사람들에게 교의(敎義)가 간단한 신종파(新宗派) 만이 계속 발전하게 되어 있었다.

선종(禪宗)의 임제(臨濟)와 조동(曹洞)의 이종(二種)은 중국 송() 나라 때 일본으로 전입되었다.

서기 1175 년 일본 스님 법연(法然 : 서기 1133 서기 1212 )은 관경소(觀經疏)를 저작했고 일본 정토종(淨土宗)을 창립하였다. 정토종(淨土宗)은 일 만 가지 선행(善行)을 모두 버리고 오직 염불 한 가지 만 해도 누구든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들어 갈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일심(一心)으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시종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우기 만 하면 임종시 서방정토(西方淨土)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법연 스님이 정토종(淨土宗)을 창립한 이래 크게 발전하여 정토종(淨土宗)과 정토진종(淨土眞宗)과 시종(時宗)3 대 계법(系法)을 형성하였다.

시종(時宗)은 일편(一遍 : 서기 1239 서기 1289 ) 스님이 창립하였으며 일편 스님은 아미타경(阿彌陀經)을 중시했다.

임제선(臨濟禪)과 조동종(曹洞宗)은 영서(榮西 : 서기 1141 서기 1215 ) 스님과 도원(道元 : 서기 1200 서기 1275 ) 스님에 의하여 전입되었다. 영서(榮西) 스님은 서기 1168 년과 서기 1187 년 두 차례에 걸쳐 송 나라에 유학하였다. 그리하여 영서(榮西) 스님은 중국 임제선종(臨濟禪宗) 황룡파(黃龍派)를 전승(傳承)했고 일본 성복사(聖福寺)와 건인사(建仁寺)를 창립했으며 밀종(密宗)도 겸하여 수행하였다. 조동종(曹洞宗)의 종조(宗祖) 도원(道元) 스님은 송 나라 천동산(天童山) 장옹여정(長翁如淨) 스님으로 부터 사사(師事)했다. 도원(道元) 스님은 일본 영평사(永平寺)를 중심으로 전교(傳敎)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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