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4일 화요일

화타(華佗)의 진료 기록 몇 가지

화타(華佗)의 진료 기록 몇 가지

화타(華佗)의 자()는 원화(元化)이고 또 다른 이름은 부()이다. 패국초현(沛國 : 현재 安徽省 毫縣 : 開封 동남방 175km 지점) 사람이다. 화타(華佗)는 양생법에 통달했으며 개방배약(開方配藥)에 정통한 명의였다.

화타(華佗)는 약물의 분량과 비례(比例)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울이 필요 없었다. 화타(華佗)는 환자들에게 약물 복용시 주의사항과 복용 방법등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복약 후 치료 효과도 영험하였다.

뜸을 사용하여 환자를 치료할 때도 한 개의 혈()이나 두 개의 혈()을 취하여 7, 8 장 뜸을 뜨면 즉시 효험이 나타났다.

침자(針刺) 치료시에도 한 두 혈()을 취하여 침자했으며 화타(華佗)는 환자들에게 찰침후창마적감각응당전도도신체모처(扎針後脹麻的感覺應當傳導到身體某處), 도료취고소아(到了就告訴我).” 라고 반드시 말했다.

다시 말하면 침을 찌른 후 저리듯이 얼얼한 감각이나 마비 감각이 신체의 어느 부위로 전도될 것이니 그때는 나에게 말해 주시오.” 라는 뜻이다.

환자가 마비 감각이 있습니다 고 말할 때 화타(華佗)는 즉시 발침했으며 병정도 즉시 호전되었다.

병독(病毒)이 인체내의 어느 부위에 집결되어 있어 침과 약이 미치지 못할 경우 화타(華佗)는 칼로 절개하였다. 절개하기 전에 화타가 직접 조제한 마비산(麻沸散)을 환자에게 복용시키고 나서 술에 취한 사람 처럼 지각이 없을 때 환처를 칼로 절개하여 병독을 제거시켰다.

장중(腸中)에 병독이 있을 경우 복부를 절개하여 장을 세척했다. 그리고 절개한 부위를 실로 봉한 후 고약을 발라 주었다. 4, 5 일 후에 병은 치유되었으며 1 개월 이내에 정상으로 건강은 회복되었다.

감능(甘陵 : 현재 山東省 臨淸縣 東)에 살고 있는 산부(産婦)가 임신 6 개월에 심한 복통이 생겼다. 화타는 진맥 후 태이경사료(胎已經死了)!”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태아가 어미 뱃속에서 이미 죽었다.” 는 뜻이다.

집안 사람으로 하여금 태아가 어느 곳에 있는지 손으로 어미의 배를 쓰다듬어 보라고 말했다. 화타(華佗)는 태아가 좌측에 있으면 남아(男兒)이고 태아가 우측에 있으면 야아(女兒)이다고 말했다. 어미의 배를 더듬어 본 집안 식구는 왼쪽입니다.” 고 화타(華佗)에게 말했다.

화타(華佗)는 즉시 탕약을 달여 산모에게 복용시켜 사태(死胎)를 추태시켰다. 과연 화타(華佗)의 말대로 남아(男兒)였다.  산모의 건강도 호전되었다.

일개 군태수(郡太守)가 병이 들었다. 화타(華佗)는 군태수(郡太守)를 화내게 하면 병이 치유된다는 것을 알았다. 화타(華佗)는 군태수(郡太守)로 부터 상당히 많은 치료비를 먼저 받고 치료해 주지 않았다. 얼마후 치료 시간을 약속해 놓고도 치료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군태수(郡太守)에게 한 바탕 욕을 하고 꾸짖으며 치료를 포기해야 겠다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군태수(郡太守)는 매우 화가나서 부하들을 시켜 화타를 체포하여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군태수(郡太守)의 아들은 화타(華佗)의 치료법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화타(華佗)의 체포 명령을 취소시켜 달라고 말하였다. 군태수(郡太守)는 분노가 극치에 달한 후 검정색 피를 한 사발 토하고 나서 병이 치유되었다.

어느 사대부(士大夫)가 화타(華佗)를 찾아 왔다. 화타(華佗)는 사대부(士大夫)를 진맥한 후 니적병근흔심(的病根), 응부복치료(應剖腹治療). 연이근거니적건강상황(然而根據的健康狀況), 야불과재활상십년(也不過再活上十年), 저개병불회상해니적생명(這個病不會傷害的生命). 인착병통십년(忍着病痛十年), 수명야도료(壽命也到了), 불필특지거위차부복(不必特地去爲此剖腹).”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병근이 매우 깊은 곳에 있어 수술을 해야됩니다. 당신의 현재 건강상태로 미루어 보아 수술을 받아도 10 년 밖에 살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병은 당신의 생명과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병통(病痛)을 참아가며 10 년을 살 것인가? 아니면 수술울 받고 병통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10 년을 살 것인가? 당신이 결정해야 됩니다.” 는 뜻이다.

사대부(士大夫)는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지긋 지긋한 병통을 생각하면서 수술을 받기로 마음을 굳혔다. 사대부(士大夫)는 화타(華佗)의 수술을 받고나서 병통없이 10 년을 살다가 화타(華佗)의 말대로 죽었다.

() 태조(太祖) 조조(曹操 : 서기 155 서기 220 )가 화타를 불러 자신의 주치의로 사용 할 때 조조(曹操)는 신경성 두통병에 걸렸다. 매차 발병할 때 마다 심계항진(心悸亢進)과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침침해 졌다. 화타(華佗)는 격유혈(隔兪穴)에 침 한방으로 조조의 두통을 치유하였다.

화타(華佗)는 외과수술의 시조이다. 화타(華佗)는 마비산(麻沸散)을 스스로 만들어 환자들에게 복용시켜 전신 마취를 시킨 후 수술을 실행하였다. 마비산(麻沸散)의 조성(組成)은 알길이 없으나 현대의 과학자들이 고증(考證)한 바로는 대략 낭탕( : 사리풀)  만타라(曼陀羅) 등으로 조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한다.

그 당시 화타(華佗)의 외과수술은 서양의 외과수술에 비하여 1600여 년이나 앞섰다.

화타(華佗)는 조조에게 살해당했다. 그래서 화타(華佗)의 고명한 의술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한 것을 한의학계에서는 매우 아쉬워 하고 있다.

조조(曹操)의 아들 조충(曹沖)이 중병에 걸려 죽었다.

조조(曹操)는 사랑하는 아들의 시신 앞에서 오회살화타(五悔殺華타), 영차아강사야(令此兒强死也).!” 라고 한탄하며 통곡했다 고 한다.

다시 말하면 화타(華佗)를 죽인 것을 후회 하노라! 화타가 현재 살아있다면 내 사랑하는 아들을 살렸을 텐데! 내가 화타(華佗)를 죽임으로써 내 아들이 비명횡사(非命橫死)하고 마는구나!” 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흉악하고 횡포한 봉건 통치자들이 과학 기술 발전의 철천지 원수이었다. 오늘 날에도 세계 도처에서 이와 똑 같은 사실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문명이 발달한 나라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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