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張耳)와 진여(陳餘)
다음은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장이진여전(張耳陳餘傳)에 수록되어 있는 고사(故事)이다.
<<”장이(張耳), 진여(陳餘), 개위명사(皆魏名士). 진멸위(秦滅魏), 현금구양인(懸金購兩人), 양인변성명(兩人變姓名), 구지진(俱之陳), 위리감문이자식(爲里監門以自食). 이상이과태진여(吏嘗以過笞陳餘), 여노욕기(餘怒欲起), 장이섭지(張耳蹑之), 사수태(使受笞). 이거(吏去). 이내인여지상하(耳乃引餘之桑下), 수지왈(數之曰) : ”시오여공언하약(始吾與公言何若)? 금견소욕(今見小辱), 이욕사일리호(而欲死一吏乎?”>>
다시 말하면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모두 위국(魏國)의 명사(名士)였다. 진(秦) 나라가 위(魏) 나라를 멸(滅)한 후 진(秦) 나라에서는 장이(張耳)와 진여(陳餘)의 목을 베어오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방문(榜文)을 돌렸다.
그래서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성명을 바꾸고 함께 진(陳) 나라로 도망쳤다. 두 사람은 호구지책을 위하여 어느 귀족 집안의 문지기로 들어갔다.
진여(陳餘)가 어찌하여 잘못을 저질러 소리(小吏)로 부터 매를 맞았다. 진여(陳餘)는 분노에 가득차 있었으며 소리(小吏)에게 반항하려고 생각했다. 이때 장이(張耳)는 어두움 속에서 진여(陳餘)의 발을 밟았다. 왜냐하면 진여(陳餘)로 하려금 소리(小吏)의 매를 계속 맞게 하기 위해서였다.
소리(小吏)가 떠난 후 장이(張耳)는 진여를 뽕나무 아래로 데리고 가서 ”너와 내가 애당초 한 약속이 무엇이었느냐? 네가 현재 사소한 모욕을 당한 것으로 인하여 너의 목숨과 바꾸려고 하느냐?” 고 꾸짖었다.”>>
는 뜻이다.
장이(張耳 : ? – 서기 전 202 년)는 대량(大梁) 사람이다. 청년 때 위국공자(魏國公子) 신능군(信陵君)의 식객(食客)이었으며 후에 위국(魏國) 외황령(外黃令)에 임명되었다. 외황령(外黃令)은 면장(面長) 정도의 관직이었다.
외황(外黃)은 현재 하남성(河南省) 민권현(民權縣 : 開封 동쪽) 서북 지역이다.
진여(陳餘) 역시 대량(大梁) 사람이며 유학(儒學)을 좋아하였다. 진여(陳餘)는 장이(張耳) 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항우(項羽)가 제후왕(諸侯王)을 분봉(分封)할 때 장이(張耳)는 상산왕(常山王)이 되었다.
그러나 후에 장이(張耳)는 유방(劉邦)에게 자진 투항하여 조왕(趙王)이 되었다. 장이(張耳)가 죽은 후 장이(張耳)의 아들 장오(張敖)가 조왕(趙王)의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다. 장오(張敖)는 유방(劉邦)의 큰 딸 노원공주(魯元公主)의 남편이 되었다. 후에 장오(張敖)의 딸은 유방의 아들 유영(劉盈:漢惠帝)과 결혼하였다. 그래서 장오(張敖)는 서한(西漢)의 제 2 대왕 혜제(惠帝) 유영(劉盈)의 장인이 되었다.
후에 장이(張耳)는 진여(陳餘)와 원수가 되었으며 진여는 한(漢)을 배반했기 때문에 피살 당하였다. 이상의 고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소한 굴욕을 참을 때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다.” 는 교훈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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