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1일 금요일

현장(玄奘)

현장(玄奘)의 속성(俗姓)은 진()이다. 출생년(出生年)은 서기 600 년 또는 서기 602 년 이라는 양설(兩說)이있다.

다음은 구당서(舊唐書)-방기전(方技傳)에 수록되어 있는 일 부분이다.

현장(玄奘)의 부친 진혜(陳惠)는 수() 나라 때 호북성(湖北省) 강능(江陵 : 武漢 서쪽 200km 지점) 현령(縣令)을 지냈다.

현장(玄奘)은 네 명의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현장(玄奘)의 집안은 불교를 신봉하는 집안이었다. 현장(玄奘)의 둘째 형() 진소(陳素)는 낙양(洛陽)의 정토사(淨土寺) 화상(和尙)이었으며 그의 법명(法名)은 첩()이다.

현장(玄奘)은 차형(次兄)을 따라 11 세 때 출가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경문(經文) 연구에 몰두하였다. 현장(玄奘)의 종교열은 대단했으며 강열한 탐구의욕을 지니고 있었다.

현장(玄奘)은 불경을 연구하는 과정 중에 불경의 역본(譯本)이 부족함을 절감한 후 불교의 발원지 천축에 가서 불교의 교의(敎義)를 탐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현장(玄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려서 부터 서역행(西域行) 구법(求法)의 뜻을 세웠다.

그래서 현장(玄奘)은 조정(朝廷)에 출국 신청을 했으나 허가를 얻지 못했다.

() 나라 제 2 대왕 태종(太宗 : 서기 626 서기 649 ) 정관(貞觀) 3 년에 장안(長安) 일대에 심한 기근(飢饉)이 들었다. 당 나라 조정(朝廷)에서는 도속(道俗 : 도사와 속인)을 막론하고 풍년이 든 지방을 찾아가서 각자의 능력대로 밥벌이 하라는 칙령(勅令)이 하달하였다.

현장(玄奘)은 이 기회를 틈타서 장안을 떠나 서역으로 출국하게 되었다. 서기 629 29 세의 현장(玄奘)은 준비물도 별로 없었고 의학 서적 마저도 없이 떠났다.

현장(玄奘)은 신강성(新疆省) 천산남로(天山南路)를 지나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발원지 마게타국(麻揭陀國)의 나란타사(那爛陀寺)에서 각고학습(刻苦學習)하여 명승(名僧)이 되었다.

서기 642 년 인도 불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곡녀성불학토론대회(曲女城佛學討論大會)에서 현장(玄奘)이 주요 강사로 변론하여 인도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곡녀성불학토론대회에 전인도(全印度) 18 개 국왕(國王)들이 참석했으며 소승불교(小乘佛敎)6000 명 고승(高僧)들이 참가하였다.

그 당시 현장(玄奘)110 개 국가를 순방했고 수 만리를 걸었으며 그 기간 동안 고난을 겪고 질병에 걸려 고생도 많았다. 그 당시 현장(玄奘)이 의학지식이 없었다면 생환(生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장의 서역 순방 이전에도 서행(西行) 구법자(求法者)들이 수 십명이 있었는데 여정이 험난하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고 살아서 돌아 온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대부분 중도에서 사망하였다. 다만 남북조 때 동진(東晉 : 서기 317 서기 420 )의 고승(高僧) 법현(法顯)과 지엄(智嚴)이 성공적으로 여정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현장(玄奘)의 생환은 기적이었다. 현장(玄奘)은 서역을 순방하는 동안 그 지역의 의약과 위생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또 현장(玄奘)은 천축인들에게 중국의 의약 지식을 소개했으며 자신의 위생보건 지침도 소개했다는 내용이 대당서역기에 기술되어 있다. 현장(玄奘)은 천축의 의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만 수중에 중국 의적(醫籍)과 약물이 없었기 때문에 의리(醫理)를 설명하고 의료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현장(玄奘)은 서역 순방 17 년 후 정관 19 (서기 645 )에 많은 천축경(天竺經)과 율()과 논()과 불상(佛像)과 사리(舍利) 등을 짊어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현장(玄奘)은 백성들의 대환영을 받고 불경(佛經) 번역에 힘써 20 여년 동안 1335 ()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당태종(唐太宗)과 당고종(唐高宗)은 현장의 기행문(紀行文)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극구 찬양하였다. 현장은 서기 664 2 5 일 원적(圓寂)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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