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義淨) 스님
의정(義淨)은 현장(玄宗)의 후배이다. 송(宋) 나라 때 찬녕(贊寧)의 저서 고승전(高僧傳) 1 권(卷)에 있는 의정전(義淨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의정속성장(義淨俗姓張), 연십유오즉맹서유구법지지(年十有五卽萌西游求法之志), 앙법현지아조(仰法顯之雅操), 모현장지고풍(慕玄藏之高風). 삼십칠세시방시등주출발(三十七歲時方始登舟出發). 타사전유소준비(他事前有所準備), 경득동지수십인(竟得同志數十人). 수연저사동지재등주지전개파퇴(雖然這些同志在登舟之前皆罷退), 단여현장지신사행불가동일이어(但與玄藏只身私行不可同日而語). 의정왕반이십오년(義淨往返二十五年), 도경삼십여국(途經三十餘國). 재천축유학적이십다년중(在天竺留學的二十多年中), 제연구불학외(除硏究佛學外), 환교심입지고찰료해국사회(還較深入地考察了該國社會), 풍속민정(風俗民情), 의약등(醫藥等), 재전인남해기귀내법전중(在前引南海寄歸內法傳中), 타기재료당지의약위생정황(他記載了當地醫藥衛生情況). 대우조국적의야각(對于祖國的醫藥學), 의정일왕정심(義淨一往情深), 인위이자호(引爲以自豪). 출국지전증경인진연습(出國之前曾經認眞硏習), 비교정통(比較精通). 재천축기간급왕반도중(在天竺期間及往返途中), 타운용의학지식위당지인민치병(他運用醫學知識爲當地人民治病). 경과비교중(經過比較中), 인양국적의약급음식위생습관(印兩國的醫藥及飮食衛生習慣), 타인위(他認爲) : 신주약석(神州藥石), 근경지류(根莖之類), 침구지의(鍼灸之醫), 맥진지술(脈診之術), 첨부주중무가야(瞻部洲中無加也). 장년지약(長年之藥), 유동하언(惟東夏焉). 서방약미여동하부동(西方藥味與東夏不同), 여인삼(如人蔘), 복령(茯苓), 당귀(當歸), 원지(遠志), 오두(烏頭), 부자(附子), 마황(麻黃), 세신(細辛), 약사지류(若斯之類), 신주상약(神州上藥), 찰문서국함불견유(察問西國咸不見有), 비단즉제국개무(飛丹則諸國皆無), 복석즉신주독유(服石則神州獨有).”
다시 말하면 ”의정(義淨)의 속성은 장(張)이고 15 세 때 벌써 서역으로 구법하러 갈 뜻을 세웠다. 의정(義淨)은 법현의 고상한 품행을 경모하였고 현장의 고상한 기풍을 사모했었다.
의정(義淨)은 37 세 때 배를 타고 서역으로 출발했다. 사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의외로 수 십명의 동지가 나타났었다.그러나 막상 배를 타고 출발하려고 할 때 서역 순방을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현장 스님의 여정과는 달리 의정(義淨) 스님은 왕복 25 년 동안에 30여 개국을 순방하였다.
의정(義淨) 스님은 천축에서 만 20 년을 머물면서 불학(佛學) 연구 뿐만 아니라 천축 사회속에 깊숙히 파고들어 천축의 사회 풍속과 민정을 살피고 천축 의약을 연구하였다.
의정(義淨) 스님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천축 의약과 위생에 관하여 서술해 놓았다. 의정(義淨) 스님은 조국의 의약에 관하여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부심을 느꼈기 때문에 서역 출발 전에 착실히 연구하여 비교적 한의약학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래서 천축에 머무는 20여 년 동안 천축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었고 오는 길과 가는 길 도상에서도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의정(義淨) 스님은 중국 의약과 인도 의약 및 음식과 위생습관을 스스로 비교할 수 있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중국의 약석(藥石) 부문과 초약 부문과 침구 의술과 맥진법 등은 첨부주(불경 전설의 4대 부주의 하나)에 없었다. 장수약도 오로지 중국에 만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서역 지방의 약미(藥味)도 중국과 달랐다. 예를 들면 인삼, 복령, 당귀, 원지, 오두, 부자, 마황, 세신 등이다.
이와 같은 중국의 약재들을 서역 지방에서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찾지 못하였다. 금단약(金丹藥) 계통의 약들도 발견하지 못했다. 광물약은 오직 중국에만 있는 약이었다.” 는 뜻이다.
의정(義淨) 스님의 한의약학에 관한 논평은 매우 진귀하고 그의 논술에 의하면 그 당시 중국의 한의약학이 인도의 의약학 보다 우월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의정(義淨) 스님은 당태종(唐太宗) 정관(貞觀) 8 년(서기 635 년)에 출생하였다. 의정(義淨)은 7 세 때(서기 641 년) 제주성(齊州城 : 현재 山東省 濟南市)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토굴사(土窟寺)로 출가하여 선우법사(善遇法師)와 혜지선사(慧智禪師)의 지도를 받았다.
서기 645 년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하여 장안에 도착했을 때 중국의 불교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때 의정(義淨)의 나이 10세 였다. 의정(義淨)은 법현(法顯)과 현장이 서역을 순방하고 귀국한 장거(壯擧)에 큰 영향을 받아 15세 때 이미 서역 순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서기 645 년에 스승 선우법사(善遇法師)가 원적했다. 의정(義淨)은 서기 655 년 21세 때 혜지선사(慧智禪師)로 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후 부터 의정(義淨)은 율장(律藏)을 학습하기 시작하였다.
서기 659 년 혜지선사는 의정(義淨)에게 서역을 순방하여 더 많은 불법을 습득하라고 권유하였다.
의정(義淨)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法傳)에 종교, 역사, 사회, 경제생활, 문화, 풍속, 의약학 등 각 방면의 자료를 수집하여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또 의정(義淨)은 그의 저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당태종 정관 15 년(서기 641 년) 부터 제 6 대왕 무칙천(武則天 : 서기 684년 – 서기 704년) 천수(天授) 2 년(서기 691 년) 까지 무려 40여 년 동안 57 명의 스님들이 구법하기 위하여 인도를 순방한 사적(事蹟)을 선후를 가려서 기록해 놓았다.
57명의 스님들 중에는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백제(百濟)의 스님들도 포함되어 있다. 57명의 스님들의 출생과 호적과 출행노선(出行路線)과 구법상황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의정(義淨)은 불경 번역 뿐만 아니라 외국의 지리와 외교 방면 등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당 나라 현종(玄宗) 선천(先天) 2 년(서기 713 년) 정월(正月) 장안(長安)의 대천복사(大荐福寺) 경내에 있는 번경원(翻經院)에서 향년(享年) 79세로 원적하였다. 의정(義淨) 스님의 시신은 낙양(洛陽) 북쪽에 안장(安葬)하고 영탑(靈塔)을 건립했다. 당(唐) 나라 제 11 대왕 숙종(肅宗 : 서기 756 년 – 서기 762 년)의 칙령에 의하여 의정(義淨) 스님의 영탑을 중심으로 금광명사(金光明寺)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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