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6일 수요일

명(明) 나라 사종(思宗) 주유검(朱由檢)

명(明) 나라 사종(思宗) 주유검(朱由檢)
북경의 경산공원(景山公園) 안에 있는 수황정(壽皇亭) 부근에 홰() 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다.
관광객들 마다 이 홰나무 고목(古木) 앞에 멈추어 유심히 살펴보고 지나 간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368 년 전 명 나라의 마지막 황제 사종(思宗) 주유검이 목매어 자결한 홰나무이기 때문이다.
사종(思宗)은 명 나라 제 14 대왕 광종(光宗) 주상락(朱常洛)의 다섯 째 아들이다. 천계(天啓) 7 (서기 1627 ) 사종의 형(兄) 명 나라 제 15 대왕 희종(熹宗) 주유교(朱由校)가 병으로 죽고나서 형종제급(兄終弟及)의 관례에 의하여 사종(思宗)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 당시 사종(思宗)의 나이 17 세 이었다.
명 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사종의 7 대 할아버지 영종(英宗) 정통(正統) 연간(서기 1436 서기 1449 )으로 거슬러 올라 가야 한다.
영종은 동북지역(옛 고구려 지방)의 행정 관리 기구인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해체함으로 인하여 광활한 동북 지역의 통제권을 상실하였다.
동북 지역에는 여러 소수 민족이 살고 있었다.
흑룡강 유역의 야인여진족(野人女眞族)과 송화강과 목단강 유역의 해서여진족(海西女眞族)과 건주연진족(建州女眞族) 등이 있었다.
명 나라 조정의 동북 지역 통치 역량이 약해 짐에 따라 고비 사막 남북 지역에 살고있는 몽고족들이 남침하여 내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야인여진족들은 몽고족에 떠 밀려 남쪽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건주여진족과 해서여진족들도 점차적으로 남쪽으로 떠 밀려 내려와 살게 되었다.
이들은 수령의 영도하에 소자하(蘇子河) 연안의 혁도아랍(赫圖阿拉 : 현재 遼寧省 新賓縣 근처) 까지 밀려 내려와 살게 되었다.
사종의 할아버지인 제 13 대왕 신종 만력 연간(서기 1573 서기 1619 )에 건주여진족 내에서 걸출한 인물 누루하치(奴爾哈赤)가 나타났다.
누루하치의 할아버지 각창안(覺昌安)과 아버지 탑극세(塔克世)는 모두 충성을 다하여 명 나라를 위해서 일한 변방 관리들이었다.
누루하치는 젊었을 때 명 나라 조정의 요동 지구 총사령관 이성량(李成梁)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누루하치는 한편으로는 열심히 책을 읽어 실력을 쌓고 또 한편으로는 한족(漢族)들과 잘 사귀어 두었다.
누루하치는 특별히 삼국지와 수호전에 관심을 갖고 탐독하였다. 누루하치는 원래 지모가 출중하고 무예에 재주가 뛰어났으며 한어(漢語)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만력 11 (서기 1583 ) 2월 전쟁중에 누루하치의 조부와 부친은 잘못으로 인하여 명 나라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격분한 누루하치는 큰 타격을 받고 복수심에 불타기 시작하였다.
누루하치는 명군(明軍)에서 탈퇴하여 혁도아랍(赫圖阿拉 : 현재 遼寧省 新賓縣 근처)로 돌아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머물고 있던 13부개갑(副鎧甲)에서 병사들을 모집하고 건주여진족 내부의 통일 사업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명 나라 조정에 대하여 시종 공손하게 복종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누루하치는 심지어 매년 한 번씩 친히 북경을 방문하여 명 나라 조정에 조공을 바치고 돌아왔다.
명 나라 조정에서는 누루하치를 용호장군(龍虎將軍)에 봉하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 누루하치를 믿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동안 누루하치의 세력은 점점 강대해져 갔다.
누루하치는 30 년 동안 남정북벌 정책을 펴서 만력 43 (서기 1615 ) 건주여진족은 말할 것도 없고 여진족 전체를 통일시켰다.
누루하치는 군사력을 계속 증강시킴과 동시에 여진족 사회 내부에 개혁을 단행하였다. 누루하치는 팔기제를 창립하였다.
일 우록(牛錄 : 大箭(큰 화살))300명으로 구성하고 5 우록을 합쳐서 갑라(甲喇 : 1500)라고 칭했으며 5 갑라를 합쳐서 고산(固山 : 7500)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각급의 수령을 액진(額眞)이라고 칭했다.
처음에 누루하치는 4() 만을 창설하고 나서 후에 팔기(八旗)로 증가시켰다. 이것을 팔기제도(八旗制度)라고 부른다.
()에 편입되어 있는 사람들은 민간인들로써 유사시에는 군대로 편입되고 평화시에는 농사를 지었다.
누루하치는 팔기제도를 통하여 여진사회의 단결을 강화하였다.
누루하치는 인재들을 선발하여 의정대신과(議政大臣) 형사 소송 기구도 마련했으며 액이덕니(額爾德尼) 등에게 명하여 몽고 문자에 여진어의 발음을 가미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이 문자가 후에 노만문(老滿文)이 되었다.
누루하치는 금과 은을 채광하여 제련법을 발전시켰으며 백성들에게 양잠업을 장려하여 사직업(絲織業)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누루하치의 영도하에 계속 발전을 거듭하였다.
만력 44 (서기 1616 ) 정월에 누루하치는 혁도아랍에서 자신을 한( : Khan)이라고 칭하고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는 천명(天命)이라고 정했다.
만력 46 (서기 1618 ) 4월에 누루하치는 조부와 부친의 한()을 포함한 7대한(七大恨)을 이유로 내걸고 장병들을 모집해 놓고 훈계하고 맹세를 다짐하며 명 나라 공격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다.
만력 47 (서기1619 ) 사종(思宗)의 할아버지 신종은 누루하치의 세력이 강대해짐을 발견하고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신종(神宗)은 후금을 멸하기 위하여 11 만 명의 군대를 소집하여 양호(楊鎬) 사령관의 지휘하에 누루하치의 군대를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양쪽 군대는 살이호(薩爾: 현재 遼寧省 撫順의 동쪽)에서 격전을 벌였다. 누루하치의 군사들의 맹열한 공격으로 인하여 명 나라 군사들이 분산하는 바람에 명 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누루하치는 계속 공격하며 남하하여 7, 8 년 사이에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을 포함한 70여 개의 성()을 함락하였다.
사종(思宗)의 큰 형 명 나라 제 15 대왕 희종(熹宗 : 서기 1621서기 1627) 천계 5 (서기1625)에 누루하치는 서울을 심양(瀋陽)으로 옮기고 성경(盛京)이라고 개명하였다.
천계(天啓) 6 (서기 1626 ) 누루하치가 병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누루하치의 아들 황태극(皇太極)이 한위(汗位)를 물려 받았다.
그 다음 해에 명 나라 희종 역시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명 나라 사종(思宗) 주유검이 황제의 보좌에 앉게 되었으며 연호를 숭정(崇禎)이라고 칭했다. 나이가 어린 황태극(皇太極)은 누루하치의 위업을 이어 받아 계속 명 나라를 공격하였다.
그 당시 사종(思宗)은 원숭환(袁崇煥) 대장을 요동 지역에 파견하여 요동에 군대를 주둔시켜 요동지역을 지키게 하였다. 원숭환(袁崇煥)은 군사적 책략에 탁월한 재능을 겸비한 장군이다. 그는 요동 지구의 농민들을 모집하여 군대에 편입시켜 방비선을 구축하고 황태극(皇太極)의 공격진로를 일시 차단시켰다.
숭정 2 (서기1629) 10월에 황태극(皇太極)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공격할 때 원숭환(袁崇煥)의 군대가 녕(寧)과 금(錦)과 산해관(山海關)에 주둔하고 있으므로 뚫고 통과하기 어려우므로 내몽고쪽으로 우회하여 희봉구(喜峰口)를 통하여 북경성으로 직진 하려고 하였다.
원숭환(袁崇煥)의 군대는황태극(皇太極)의 군대를 쏜살같이 추격하였다. 황태극(皇太極)은 환관 한 명을 포로로 사용하여 사종(思宗)에게 가서 원숭환과 황태극(皇太極)이 사전에 밀약이 있었다고 헛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의심이 많은 사종(思宗)은 정말로 알아듣고 원숭환을 체포하여 능지처참시켰다.
그로 인하여 사종(思宗)은 황태극(皇太極)의 군대를 쳐들어 오라고 장성을 헐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순정9 (서기 1636 )에 황태극은 국호를 청()이라고 개명하였다. 또 여진족을 만족(滿族)이라고 개명하였으며 연호를 숭덕(崇德)이라고 칭했다.
숭정11(서기 1638 : 淸崇德3) 황태극(皇太極)은 군대를 이끌고 하북성과 산동성을 공격하여 50여 성(4)을 함락시키고 46만 여명의 백성들을 얻었으며 금()과 은() 일 만() ()을 획득하였다.
사종(思宗)은 황태극의 살기등등한 공세를 보면서 매우 불안하고 초조하였다.
숭종14(청숭덕 6 : 서기 1641 ) 황태극은 재차 금주를 공격하였다.
사종(思宗)은 계요(蓟遼)총독(總督) 홍승주(洪承疇)로 하여금 13만 군대를 이끌고 황태극(皇太極) 군대와 맞서 싸웠다.
숭정15 년 송산성(松山城)전투에서 홍승주(洪承疇)는 포로로 잡혀 산해관 밖앝에 있는 성은 오직 영원성(寧遠城) 만 남아 있었다.
홍승주(洪承疇)는 결국 황태극에게 투항하였으므로 황태극이 중원을 공격하는데 유익한 길잡이가 되었다.
숭정15 10월에 황태극은 계주(: 현재 천진 계현())을 공략하여 하북성과 산동성을 침략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태극(皇太極)은 삼부십팔주(三府十八州) 67 ()을 함락하여 모두 88 ()을 차지했으며 금과 은 수 십만 냥() 55 () ()의 말과 양과 소와 낙타를 획득하였고 36 만 명의 포로를 얻었다.
숭정16 (서기 1643 ) 4 월에 청() 나라 군대(軍隊)이 물러 갈 때 군대들의 행열이 30여 리()에 뻗쳐 있었으며 청군들이 로구교(蘆溝橋)를 통과하는데 열흘이 걸렸다.
사종(思宗)은 이러한 정황에서 아무런 대책이 없었으며 출병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사종의 군신들은 두 눈으로 빤히 보면서 청군들이 늠름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활개짓 하며 성큼 성큼 물러가는 것 만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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