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취의성인(吳鳳取義成仁)
다음의 고사는 청 나라 제 6대 왕 고종(高宗 : 서기 1736 년 – 서기 1795 년) 건륭 년간에 일어난 사건이다. 오봉(吳鳳)의 자(字)는 원휘이고 청 나라 강희 38 년 1 월 18일에 복건성(福建省) 평화현(平和縣)에서 태어났다. 오봉(吳鳳)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경서를 읽기 좋아하였다. 오봉(吳鳳)이 어렸을 때 오봉(吳鳳)의 부친 오주(吳珠)와 모친 채씨(蔡氏)는 복건성에서 살다가 대만의 가의현 아리산(阿里山) 밑으로 이사를 갔다. 오봉(吳鳳)은 20세 되던 해부터 아리산(阿里山) 속에 살고있는 야만인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 팔고 또 그곳 물건을 사가지고 밖으로 나오는 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봉(吳鳳)은 미개인들의 언어를 맘대로 구사할 수 있었고 그들의 풍속과 그들의 성질을 어느 누구 보다 잘 알고있었다. 오봉(吳鳳)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다는 것을 미개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개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후에 청 나라 정부에서 아리산(阿里山)의 야만인들의 회유정책의 일환으로써 사용할 통역관을 모집하였다. 오봉(吳鳳)은 그 당시 24 세였다. 오봉(吳鳳)은 통역관 선발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고 정부가 인정하는 통역관이 되었다. 그리하여 오봉(吳鳳)은 아리산(阿里山) 산족(山族)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오봉(吳鳳)은 산족들의 스승이 되어 산족(山族)들의 교육도 담당했고 부모 형제 자매 처럼 산족들을 사랑하였다. 또 친구 처럼 산족(山族)들이 필요한 모든 일을 돌보아 주었다. 낙후되어 있는 아리산 산족들의 질서가 점점 잡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리산 산족들에게 기괴한 풍속이 하나 있었다. 매년 가을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한 사람을 죽여서 머리를 잘라 제사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무서운 풍속이 있었다. 비록 오봉(吳鳳)이 산족(山族)들을 정성스럽게 가르치고 계몽시켰지만 산족들의 오랫 동안 누적되어 온 풍습은 너무 깊이 생활속에 파고 들어서 그러한 습관을 하루 아침에 제거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오봉(吳鳳)은 심사숙고한 끝에 산족(山族)들에게 ”주일귀(朱一貴)의 난이 발생했을 때 당신들은 주일귀를 지지하며 수 많은 한족(漢族)들을 살해하였지요? 얼마나 많은 수급(首級)을 얻었습니까? 얻어 온 수급(首級)들이 지금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고 물었다. 산족들은 지금도 40개의 해골이 남아 있습니다.” 고 대답하였다. 수급(首級)이란? 싸움터에서 떼어 온 적군의 머리이다. 진(秦) 나라 때 적군의 목을 베어오면 일 계급 승진시켜 준데서 연유되었는데 수(首)는 사람의 머리를 일컬으며 급(級)은 계급을 일컫는다. 오봉(吳鳳)은 산족(山族)들에게 ”살인은 가장 나쁜 행위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법으로 살인을 금하고 있습니다. 제발 사람을 죽여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습관은 그만두시요. 그리고 현재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해골을 매년 한 개씩 신에게 제사 지낼 때 마다 제물로 사용하고 다시는 살인하지 마십시요. 만일 위반할 때에는 정부에서 병사들을 파견하여 당신들을 섬멸할 것입니다.” 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산족(山族)들은 오봉(吳鳳)의 말을 듣고 이때부터 시작하여 40년 동안 살인하지 않았다. 건륭 31 년(서기 1766 년) 까지 옛날에 모아 두었던40개의 해골을 모두 다 사용해 버렸기 때문에 남아있는 해골이 한 개도 없었다. 그래서 산족(山族)들은 오봉(吳鳳)에게 ”40개의 해골을 모두 다 사용해 버렸으니 다시 살인하여 신에게 사람의 목을 제물로 바치게 하여 주십시요. 허락하여 주십시요.” 라고 간청했다. 오봉(吳鳳)은 절대로 살인해서는 않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후 3 년이 지났다. 이때 흉년이 들어 산족(山族)들은 먹을 양식이 부족하였다. 산족들은 사람의 목을 신에게 바치지 않고 제사를 올렸기 때문에 재해를 만난 것이다고 믿고 다시 오봉(吳鳳)을 만나 사람의 목을 베어 제사를 올리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오봉(吳鳳)은 매우 난처하게 생각하였다. 오봉은 눈물을 흘리며 산족(山族)들을 향하여 ”살인은 극도로 나쁜 행위입니다. 현재 당신들이 기어코 살인하여 사람의 목을 신에게 드리는 제삿상에 올려놓고 싶으면 내일 점심 때쯤 나의 사무실 근처에 붉은색 옷을 입고 붉은 색 모자를 쓴 사람이 나타날 것인데 그 사람의 목을 베어 신에게 드리는 제삿상의 제물로 사용하십시요!” 라고 말했다. 그 이튿 날 정오에 산족(山族)들은 칼과 활과 창을 들고 오봉(吳鳳)의 사무실 근처로 모여 들었다. 정말로 빨강색 옷을 입고 빨강색 모자를 쓴 사람이 나타났다. 산족(山族)들은 일제히 활을 쏴서 죽인 다음 시체 옆으로 다가가서 목을 자르려고 목에 칼을 댔다. 산족(山族)들은 시체의 목을 자르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시체의 얼굴을 살펴봤다. 바로 자기들이 존경하는 오봉(吳鳳) 통역관의 시체였다. 산족(山族)들은 함께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통곡 소리는 온 산천에 울려 퍼졌다. 산족들은 오봉(吳鳳)을 추모하며 애통하였다. 이때 이후로 사람의 목을 베어 제사를 지내는 아리산 산족(山族)들의 풍습은 영원히 사라졌다. 오봉(吳鳳)은 산족(山族)들의 살인 제사를 없애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였다. 자기 몸을 내어주고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위대한 오봉(吳鳳)의 정신은 불교의 보살도(菩薩道)에 부합된다.
이상의 고사는 인과응보류편 중 오봉취의성인(吳鳳取義成仁)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吳鳳,字元輝,福建省平和縣人,生於清康熙卅八年正月十八日,自幼聰敏過人,讀書明大義。童年就跟著他的父親吳珠,母親蔡氏,從福建老家遷到臺灣來,居住在嘉義縣阿里山下。二十歲以後,與阿里山的生番做買賣,因此對於生番的風俗習慣,語言性情,都很熟悉,相處十分融洽,因為吳鳳的做人誠謹篤實,所以極為番人所敬仰。後來政府為了安撫生番,招募通曉番語的人擔任通事,這時吳鳳年已廿四歲,應徵為阿里山的通事,管理高山族的同胞。吳鳳本著愛民便民的精神,像父母一樣的愛護山胞,像師長一樣的教育山胞,像朋友一樣的幫助山胞,把一個原來很混亂的落後地區,治理得很有秩序。山地有一種牢不可破的壞風俗,每年秋季祭神的時候,一定要殺一個人,把人頭作為供神的祭品,雖經吳鳳諄諄開導,但山胞們積習已深,還是不能革除,因此想出了一個變通辦法,問山胞們說:「朱一貴變亂的時候,你們跟從叛逆,一共殺了多少漢人,得到多少首級?現在髑髏還存在嗎?」山胞們回答現在還存四十餘個首級髑髏,吳鳳就曉諭他們說:「殺人是最大的惡事,國家法律所嚴禁,以後絕對不許再有殺人祭神的事,你們既然無法革除習俗,姑准把舊存的四十餘髑髏,每年用一個祭神,不准再殺人,如有故違,政府將派兵聚殲你們。」山胞們聽從吳鳳的意旨,從此四十餘年沒有殺人的暴行。可是四十餘年過去,到了乾隆卅一年,舊存的人頭已用完,山胞又請求恢復殺人祭神的舊例,經吳鳳苦苦勸諭而止其妄殺。過了三年,適值饑荒,山胞們認為是沒有殺人祭神而遭的天譴,大家聲勢洶洶的再向吳鳳請求獵取祭神的人頭,吳鳳知道這次沒有辦法禁止,心上萬分難過,哭著對山胞們說:「殺人是極壞的事,現在你們一定要殺人,明天中午到我辦公處所的附近,見到一個穿紅衣戴紅帽的人,把他殺掉就是了。」第二日的中午,山胞們拿著刀槍和弓箭,到了吳鳳辦公地方的附近,真的看到了一個紅衣紅帽的人,一時弓箭齊發,把那個人射死,大家走近,正想把那人頭顱割下的時候,仔細一看,原來就是他們平日最敬愛的吳通事,山胞們悔恨交加,悲慟萬分,痛哭之聲,震動林谷,他們為了悼念吳鳳,從此就把殺人祭神的多年惡俗,自動的永遠革除了。吳鳳革除殺人惡俗,甘願犧牲自己,這種捨己救人的精神,完全與佛教的菩薩道相合,其身後的善報,流芳百世,固然顯而易見,上升善道,也是毫無疑問的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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