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3일 목요일

양자징인기제곤(楊自懲忍飢濟困)

양자징인기제곤(楊自懲忍飢濟困)
양자징(楊自懲)은 명 나라 때 절강성(浙江省) 영파현(寧波縣)에서 태어났다. 그는 현부 감옥의 옥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인자하고 사람됨이 충실하고 온후하였으며 법을 잘 지키고 공평하고 관대하게 죄인들을 다루었다. 그 당시 현관들은 대단히 엄했었다.관리들은 죄인들의 안건을 심문할 때 항상 엄중한 얼굴 표정을 하고 죄인들에게 매를 때렸다. 옛날 정치는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현부 관공서에서는 법을 실행하고 형도 집행할수 있는 기관이었다. 어느 날 현부에서 한 노인을 구속하였다. 현관은 이 노인을 악종 죄인이라고 말했다. 현관은 경위들에게 이 노인을 무릎을 꿓려놓고 대나무로 구타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노인의 온 몸은 찢겨져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차마 눈뜨고는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죄인이 엄형은 받기 싫다고 불복하니 현관은 화가 치밀어 올라 계속 구타하였다. 양자징(楊自懲)은 노인이 심한 매를 맞고 혼도하기 직전에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더 이상 눈뜨고 볼수 없어 현관 앞에 무릎을 꿇고 이 노인의 죄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요.” 라고 간청하였다. 현관은 이 노인은 법을 위반하였고 인정상으로나 도리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졌습니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고 대답하였다. 양자징(楊自懲)은 현관의 말에 수긍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 노인에 대한 애석한 정이 생겼다면 가엽게 여기는 불쌍한 마음은 기쁨 보다 더 큰 것입니다. 기쁨도 화를 내지 못하게 할진대 어찌 기쁨 보다 더 큰 측은한 마음을 가지셨는데 무엇이 현관님으로 하여금 화를 내게 할수 있겠습니까?” 고 말했다. 현관은 양자징(楊自懲)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고 화를 즉시 풀고 매를 손에서 놓았다. 양자징(楊自懲)의 가정은 매우 빈한하였다. 그래도 그는 타인의 뇌물을 절대로 받지 않았고 횡령하지도 않았다. 죄인들의 양식이 떨어지면 다방면으로 구제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어느 날 몇 명의 새로운 죄인들이 입옥하였다. 감옥내에 양식이 완전히 떨어졌다. 죄인들이 먹을 양식이 아직 감옥에 도착되지 않았다. 그래서 죄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해 줄수 없었다. 양자징(楊自懲)은 새로 들어 온 죄인들이 방에 앉아 한숨 만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련한 마음이 들었다. 다방면으로 죄인들의 식사를 마련해 주려고 생각해 보았다. 양자징(楊自懲)은 자기 집에도 쌀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가서 부인과 상의했다. 부인은 새로 들어 온 죄인들은 어디서 온 죄인들입니까?” 고 남편에게 물었다. 양자징(楊自懲)새로 들어 온 죄인들은 항주에서 왔습니다. 항주에서 영파 까지 150km 를 오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배가 고파 얼굴 색깔이 누렇게 변했고 기운이 없어 보였고 풀이 죽고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 고 부인에게 말했다. 양자징(楊自懲)의 부인은 남편의 말을 듣고나서 동정심이 울어나 자기들이 먹어야 할 쌀로 묽은 죽을 끓여 새로 들어 온 죄인들과 나누어 먹도록 하자고 결정하였다. 그로인하여 양씨 부부는 배를 주렸다. 양씨 부부는 배가 고파 죽기 직전에 직면한 죄인들을 살렸다. 후에 양씨의 자손들은 입신출세하였다. 장자(長子) 수진(守陳)과 둘째 아들 수지(守址)는 이부시랑(吏部侍)의 관직에 각각 임명되었고 장손(長孫) 무원(茂元)은 형부시랑(刑部侍)에 임명되었으며 둘째 손자 무인(茂仁)은 사천성(四川省) 순찰사(巡察使)에 각각 임명되었다. 덕육고감(德育古鑒)에 보면 양자징을 칭찬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일 개 옥리(獄吏)가 덕을 쌓고 이와 같은 복을 누렸다. 옛말에 이르기를 공무원이 직책을 잘 수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 잘 훈련되어 있는 공무원이란? 어떤 공무원을 일컫는가? “공무원은 때때로 형벌을 주고 공무원으로 생활하는 동안 가난하지만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죄를 지면 않되고 죄를 받아도 억울하게 생각 말며 바보 처럼 속임을 당하지 말고 약하다고 제지를 받지 말며 하소연 하지도 말고 대성통곡도 하지 말며 다만 공무를 정확하게 집행하는 사람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과 민생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위로는 관계(官界)의 풍조를 알고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어렵고 힘들고 고달프고 고독하고 위태로울 때 관용을 베풀어 주고 상대방을 이롭게 해 주어야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양자징(楊自懲)은 우매한 백성들을 가르쳤고 약한 백성들을 붙들어 주었으며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줄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주었고 원한을 풀수 있게 도와 주었으며 사기 당하지 않게 도와 주었고 뇌물을 헌납하도록 교사 당하지 않게 도와 주었으며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법을 어기지 못하게 도와 주었고 법조문을 왜곡하여 부정을 저지르지 못하게 도와 주었다. 양자징(楊自懲)은 하룻 동안에도 수 십 가지 선행을 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양자징(楊自懲)은 조금씩 적선하여 자연적으로 길일(吉日)과 경사를 만나게 되었고 자손들이 기리 기리 창성하게 되었다.” 고 양자징(楊自懲)을 찬탄하였다.
이상의 고사는 인과응보류편 중 양자징인기제곤(楊自懲忍飢濟困)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楊自懲忍飢濟困楊自懲是浙江省寧波縣人,在縣府的監獄中擔任獄吏。他的存心很仁慈,待人忠厚,辦事守法,尤能公平寬大的管理囚犯。可是當時的縣官很嚴酷,在訊問案件的時候,常常聲色俱厲,甚至嚴刑拷打。因古時的政治,行政與司法是不分的,所以縣府衙門也就是執法行刑的機關。有一天,縣府拘來了一個犯罪的老百姓。縣官認那個犯人惡性很重,命令警衛們押那犯人跪在地上,用竹鞭木棍毆打全身,一時被打得皮破血流,慘不忍睹。犯人受不了嚴刑,表示不服,更引起了縣官的大發雷霆,繼續痛毆。楊自懲看了很是不忍,就跪下來向縣官求情,請求縣官饒恕那犯人。縣官說:「這人違犯法紀,背叛情理,得使人不怒!」楊自懲又叩頭向縣官解釋說:「古人有言,如得其情,哀矜弗喜。喜且不可,可發怒呢!」縣官聽了他的話,很受感動,就把怒火平息下來,停止毆打。楊自懲的家中雖很貧窮,但決不收受他人的饋贈,當然更不會做納賄的貪勾當。並且遇到囚犯缺糧的時候,還多方的設法救濟。有一次,新到了幾個囚犯,已有一天沒有吃飯,因囚犯糧還沒有配到,監獄中也無法立刻供給食。楊自懲目睹那幾個新來的囚犯,餓得奄奄一息,很是可憐。要想設法救濟,可是自己家中也沒有多餘的米,怎麼辦呢?回家與他妻子商量,他妻子問:「囚犯從什地方來?」他說:「幾個都是從杭州解來的新犯,沿途整天沒有吃東西,因此個個都餓得面黃乏力,垂頭喪氣。」他妻子聽了也很同情,夫婦二人決定犧牲了自己炊飯的米,煮成稀粥,分給那幾個新犯同吃。雖然他夫妻因此不能自己吃飽,但奄奄待斃的幾個囚犯,幸而沒有成餓鬼,延續了性命。後來他的子孫都很顯達,長子守陳,次子守址,都做到南北吏部侍的官職。長孫茂元,任刑部侍,次孫茂仁,任四川巡察使,都是一代名臣。德育古鑒讚歎楊自懲有云:「此一獄吏爾,而積德獲福如此。古云:公門中好修行。何也?公門時時刑罰,其間貧而負累,冤而獲罪,愚而被欺,弱而受制,呼天搶地,無可告訴,惟公門人,下得民隱,上知官情,艱苦孤危之際,扶持寬假一分,勝他人方便十分。若能釋貧解冤,愚扶弱;無乘危索騙,無因賄唆打,無知情故枉,無舞文亂法,則一日間可行十數善事,積之長久,自然吉慶日至,子孫昌盛矣。」(取材自德育古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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