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수홍(玉泉垂虹)” 과 “옥천표돌(玉泉趵突)”
옥천수홍(玉泉垂虹)은 "옥천 샘물 위에 항상 무지개가 드리워 있다." 는 뜻이며 옥천표돌(玉泉趵突)은 "옥천의 샘물이 뛰어 솟아 오른다." 는 뜻이다. 북경(北京)의 서부(西部)에 서산(西山) 지맥(支脉) 증에 옥천산(玉泉山)이 있다. 옥천산(玉泉山)은 북경(北京) 이화원(颐和园) 서측(西侧)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상(山上)에 옥천(玉泉)이 있으므로 옥천산(玉泉山)이란 이름을 얻었다. 옥천산은 해발(海拔) 100m이다.수 십개의 취록색(翠绿色) 산봉우리들이 첩첩이 겹쳐있기 때문에 천원(泉源)이 밀포(密布)되어 있으며 풍경(风景)이 수려(秀麗)하다.
옥천산(玉泉山)의 남록(南麓)에 옥천(玉泉)이 있으며 청(清) 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는 옥천을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 이라고 사명(賜名)했다. 영락(永乐) 19 년(서기 1421년), 명(明) 나라 제 4 대왕 성조(成祖 : 서기 1403 년 – 서기 1424 년) 때 수도를 순천부(順天府 : 현재 北京市)로 천도한 후 부터 옥천산(玉泉山)의 천수(泉水)는 황제(皇帝)와 황실(皇室)의 전용(专用) 음용수(饮用水)로 사용되었다. 매일 새벽에 옥천수를 적재한 운수차(运水车)가 옥천산(玉泉山)으로 부터 출발하여 서직문(西直门)을 통과하여 황궁(皇宫)에 도달된다 옥천표돌(玉泉趵突)은 옥천(玉泉)의 정경(情景)을 표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금(金) 나라 때 통치자(统治者)들은 옥천산(玉泉山)에 황가(皇家)의 원림(园林)을 만들어 즐겼다. 금(金) 나라 제 6 대왕 장종(章宗 : 서기 1189 년 - 서기 1208 년) 때 옥천산(玉泉山) 남쪽 기슭에 “부용전(芙蓉殿)”을 건립하였으며 부용전 앞에있는 샘물 속에서 뿜어 나오는 천수의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햇빛에 반되어 무지개가 형성(形成)되기 때문에 “옥천수홍(玉泉垂虹)” 이란 이름을 얻었다. 금 나라 때 옥천산은 “연경팔경(燕京八景)”의 하나였다.
금(金), 원(元)、명(明)、청(清) 시기(时期)에 옥천산(玉泉山)은 황가(皇家)의 별장이었으며 우량(优良)한 수질(水质)로 인하여 옥천수는 궁정(宫廷)의 어용(御用) 천수(泉水)로 사용되었다. 청(清) 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가 옥천산(玉泉山)에 올라가 보니 산동성 제남(济南)의 표돌천(趵突泉)과 같이 샘물이 물속에서 솟아올라오므로 “옥천표돌(玉泉趵突)” 이라고 써서 어비(御碑)를 건립하였다. 이로 인하여 “연경팔경(燕京八)” 의 하나인 “옥천수홍(玉泉垂虹)”은 “옥천표돌(玉泉趵突)” 로 개명(改名)되었다. 옥천산(玉泉山)의 출수량(出水量)은 점점 감소(减少)되고 천안압력(泉眼压力)이 하강(下降)되므로 인하여 물이 샘의 밑바닥으로 부터 예전처럼 솟아 올라오지 않으므로 “수홍(垂虹)”은 자연 소실되어 버렸다. 무지개가 샘물 근처에 드리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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