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宋) 태종(太宗)과 메밀밥 :
송(宋) 나라 때 메밀을「구황량(救皇糧)」이라고 칭했다.
양가장(楊家將)은 청정고상(清正高尚)한 민족정기(民族精氣)의 소유자였다.
송(宋) 나라 제 2 대왕 태종(太宗 : 서기 976 년 - 서기 997 년)과 양가장(楊家將)이 안문관(雁門關) 부근의 산중에서 요군(遼軍)에게 겹겹이 포위당하여 외부와 연락이 끓어졌다. 단식(斷食)할 수 밖에 없었다. 태종(太宗)은 아사지경에 임박하였기 때문에 혼신(渾身)이 무기력(無氣力)하였다.
사병(士兵)들과 말할 것 없이 체력(體力)이 모진(耗盡)하였고 의사도 없었으며 군량미도 모두 바닥이 났으므로 전투력(戰鬥力)이 약해졌다. 이때 이 지역에 살고있는 백성(百姓)들이 교자(蕎子;메밀)로 밥을지어 장사병(將士兵)들을 지원(支援)하였다. 기아(飢餓)에 허덕이던 장사병들이 교자밥을 배불리 먹었다.
태종(太宗)은 교자(蕎子)의 향미(香味)가 매우 좋다고 말하며 교자밥으로 허기를 보충시켰다. 며칠 동안 교자밥을 먹고나서 태종(太宗)은 체력(體力)이 정상으로 회복(恢復)되었고 장사병(將士兵)들의 질병도 치유되었다.
백성들과 군사들은 하늘이 태종을 보우(保佑)하사 교자를 하사하였다고 믿었다. 이때부터 교자(蕎子)를 「구황량(救皇糧)」이라고 칭했다. 원래(原來) 이 지역 백성(百姓)들은 질병(疾病)에 걸리면 메밀로 밥을 지어 먹는 습관이 있었다. 후에 난고(艱苦)한 전투(戰鬥) 끝에 양가장(楊家將)의 군사들은 겹겹이 포위된 벽을 뚫고 나와 요군(遼軍)을 격패(擊敗)하는데 성공하였고 개선가(凱旋歌)를 부르며 조정으로 회군하였다. 태종(太宗)은 이 사건(件事)을 두고 두고 기억하였다. 태종은 「중국제일교(中國第一蕎)」라고 쓴 어서(御書)를 대현지구 백성(百姓)들에게 증송(贈送)하였다. 중국제일교(中國第一蕎)란? 교자(蕎子; 메밀)가 임금을 기아선상에서 구출한 유공(有功)의 감격(感激)을 표현한 문구이다. 태종은 회군한 후 즉시 당지(當地)의 관원(官員)들에게 교자(蕎子)를「공품(貢品)」으로 정하고 매년 상공(上貢)케 하였다. 교자(蕎子)는 특수(特殊)한 질병치료 효과와 신기(神奇)한 색채(色彩)와 더불어 현재 항생제(antibiotic)란 칭호를 갖고 있다. 다음은 고사(故事)의 원문(原文)이다. “楊家將自古有著很高的美譽,有著清正高尚的民族氣節。一次,宋太宗和楊家將被圍困在雁門關,近乎斷食。太宗也因此挨餓,渾身沒力氣。士兵更不用說,體力耗盡,滿營傷號,缺醫少食,戰鬥力銳減。就在這時候,當地百姓拿出蕎子來做飯,支援將士們,飢餓難耐的士兵終於填飽肚子,
太宗更是大讚蕎子香醇味美。連吃幾天後,太宗體力恢復,將士的病也不治而愈,眾人無不驚嘆稱奇,認為這是上天在保佑大宋,於是將蕎子稱為「救皇糧」。原來,當地百姓都以它來煮飯吃,鮮有得病。後來,經過艱苦的戰鬥,楊家將終於突出重圍,擊敗遼軍。凱旋迴朝的太宗並沒有忘記這件事,御書「中國第一蕎」贈送當地百姓,表達對蕎子救皇有功的感激之意,並下令當地官員들將蕎子를作為「貢品」連年上貢。 正因為蕎子的特殊療效和神奇色彩,現如今更有了「土四環素」的稱謂。“
양가장(楊家將)은 송나라 때 중국 북방(北方)을 수호한 충정보국적(忠精报国的) 장군이었으며 항요(抗遼)와 항서하(抗西夏)에 혁혁한 무공(武功)을 세운 장군이다. 안문관(雁門關)은 산서성(山西省) 대현(大峴) 의 서북쪽 20km 지점에 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중요한 요새(要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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