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범중엄( 范仲淹)의 의전(義田)

범중엄( 范仲淹)의 의전(義田)


의전(義田)이란? 의(義)로운 밭(토지)이란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현재의 자선농장(慈善農場)이나 마찬가지 뜻이다.  범중엄( 范仲淹 : 서기 989 년 – 서기 1052 년)은 북송(北宋)의 저명한 정치가요 문학가요 교육가이었다. 그의 명언(名言) 중에 다음과 같은 명언이 있다.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

다시 말하면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우선 순위에 두고 자기 자신의 행복은 그 다음으로 미루어 두어야 한다.” 는 뜻이다.

범중( 范仲淹)이 두 살되던 해에 부친이 돌아가시고 난 후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루에 두끼 식사가 고작이었는데 그것마저 죽으로 연명하였다.  겨울철에는  꽁꽁 얼어붙은 죽을 조각 조각 깨어서 먹었다.

후에 범중엄( 范仲淹)의 모친 마저 죽고 난 후 의지할 곳 없이 천애의 고아가 된  범중엄( 范仲淹)은  인근 절로 들어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절 안에 있는 아주 비좁은 방을 하나 얻어서 지내며 열심히 글공부를 하였다. 공부를 하다가 피곤하거나 지칠 경우 찬 물로 얼굴을 씻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벽에 기대어 앉아서 잠을 청하곤 했다.   5 년 동안 침대에 드러누워 수면을 취해 본 적이 없었다.   

 

범중엄( 范仲淹)의 친구의 아버지가 범중엄이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절간에서 열심히 공부한다는 소식을 듣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범중엄에게 보냈다. 범중엄은 맛있는 음식을 거절하며 먹지않고 되돌려 보냈다. 그러면서  친구에게 하는 말네가 나를 위하여 가져 온 맛있는 음식에 감사하고 너의 친절에 감사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경우 나중에 나의 입맛이 변해져서 그후로는 죽을 먹을 수 없게된다. 미안하다 친구야!”  고 친구에게 말했다.



범중엄( 范仲淹)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정직을 모토로 삼고 생활하였다. 어느 날 범중엄( 范仲淹)은 자기 방안에서 은괴(銀塊)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은잎 한 전도 만지지 않았다후에 범중엄( 范仲淹)은 열심히 글공부를 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으며 그때 부터 범중엄의 정치 경력이 시작되었다. 절에서 함께 생활하던 스님들이 범중엄( 范仲淹)에게 공양(供養)을 드리라고 요청했다범중엄( 范仲淹)은 스님들에게 내가 절에 머물고 있던 방 안의 천정 한 구석에 은괴(銀塊)가 있으니 찾아서 사용하라고 말했다. 스님들은 범중엄( 范仲淹)의 정직성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며 백성들을 위한 정의와 공명정대가 장차 범중엄( 范仲淹)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북송(北宋)의 제 4 대왕 인종(仁宗 : 서기 1022년 - 서기 1063년)은 범중엄( 范仲淹)을 부재상에 임명했으며 관리제도를 정비하여 인재를 양성하며, 무력을 강화하는 개혁조치를 제안했는데 인종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개혁안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으며  이 정치개혁을 경력신정(慶曆新政)이라고 불렀다. 이 정치개혁으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근절시키고 관직에 친척등용을 금하였다.


범중엄( 范仲淹)의 개혁에 자극을 받아 송나라 때의 가장 위대한 개혁가로 불리는 젊은 개혁가 왕안석(王安石: 서기 1021  - 서기 1086 )은 범중엄( 范仲淹)의 개혁을  이어받아 송나라 최고의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



범중엄( 范仲淹)은 정부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근절시키는데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관직에 친척등용을 금하였고 과거시험 제도를 개선시켰으며 토지 배당제를 실시하였고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범중엄( 范仲淹)농촌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농촌경제에 식견이 있는 사람들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관리들의 벽에 부딫혀 실패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보수적 관료들은 범중엄( 范仲淹)의 개혁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잃을 것이 분명하며 손해를 볼 것이 명백해 짐으로 범중엄( 范仲淹)의 개혁을 결사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범중엄은 좌천되고 말았다.



범중엄( 范仲淹)은 정년 퇴직 후 그동안 정부 관료시 벌어놓은 재물을 사용하여 대토지를 구입하였으며 실직자들을 고용하여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직장을 창출함과 동시에 농장을 자선농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선농장(慈善農場)의 수익금은 빈한한 가정 형편으로 인하여 공부하고 싶어도 공부 할수 없는 젊은이들을 공부시키는 장학금으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수익금은  연로한 노인들을 위하여 사용했다범중엄( 范仲淹)이 죽은 후에도 범중엄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자선농장(慈善農場)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서 동일하게 운영되었다.


범중엄( 范仲淹)은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풍수설(風水說)에 의하면 조상의 무덤자리는 후손들의 번영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후손들의 번영을 끔찍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반드시 도가(道家)를 찾아가서 후손들의 번영에 가장 좋은 묘자리를 찾아 달라고 요청한다.

 

범중엄( 范仲淹)은 어떤 사람이 도인을 찾아가서 묘지를 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말을 들었다.  도인(道人)은 " 묘지 자리가 하나 있는데 큰 돌들이 사람의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화살의 형상과 비슷한 묘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풍수설에 의하면 이곳에 묘자리를 쓰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후손의 번영은 고사하고 후손이 완전히 끊어집니다고 말했다.  


범중엄( 范仲淹)은 도인의 말을 엿듣고 나서  관리들에게 정말 듣기 거북한 말이다고 생각하면서 후손이 끊어짐은 자기 자신의 문제일 뿐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범중엄은 그 땅을 자신의 묘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사들였다


사람들은 범중엄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후대를 포기하면서 그 땅을 매입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과연 정직한 범중엄( 范仲淹)이다고 범중엄( 范仲淹)을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범중엄의 후손이 끊이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범중엄( 范仲淹)이 죽고나서 장례식을 치루는 날 백성들의 기도의 응답이 성취되었다고 한다. 범중엄( 范仲淹)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있는 도중에  하늘에서 청천벽력이 울려 퍼지며 무덤 주변에 흩어져 있던 크고 작은 모든 돌들이 갑자기 우뚝 일어서서 하늘을 찌를듯 서 있었다. 풍수설에 의하면 이와같은 전조(前兆) 증상은 후손들이 상서로울 길조(吉兆)의 전조라고 한다.



범중엄( 范仲淹)은 오랫동안 관료로 일하면서 정직하고 검소한 생할을 하였고  푼푼이 모은 돈과 재물을 모두 사회에 헌납하였다. 그리고 범중엄( 范仲淹)은 남은 돈으로  땅을 사들여 자기 자신을 위한 호화로운 저택을 건축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의(義)로운 농장으로 사용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가정형편이 빈한하여 공부를 하고 싶어도 공부를 할 수 없는 젊은이들의 장학자금으로 사용했으며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한 복지사업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범중엄( 范仲淹)의 장례식은 매우 간소하게 치루어 졌다그러나 백성들은 그를 추모하고 평생의 업적을 기리며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특별히 범중엄( 范仲淹)의 의전(義田)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해 온 농민들은 범중엄( 范仲淹)의 장례식을 치른 후 사흘 동안 금식하며 범중엄( 范仲淹)의 살아생전의 은덕을 흠모하였다.

범중엄( 范仲淹)이 살아생전에 근무했던 각처의 백성들은 범중엄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나서 범중엄( 范仲淹)의 사당(祠堂)을 건립해 주었으며 동상을 세워 주었다.


송(宋) 나라 때 백성들 사이에 유행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범중엄( 范仲淹)! 송나라 궁정(宮廷)에 평화가 깃들게 하여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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