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홍(葛洪)은 서진(西晉) 무제(武帝) 태강(太康) 2 년(서기 281 년)에 단양군(丹陽郡) 구용현(句容縣 : 현재 강소성 구용현)에서 태어났다.
갈홍(葛洪)의 선조 갈포려(葛浦廬))는 서한(西漢) 말년에 군대를 일으켜 남양(南陽)의 지주(地主) 유수(劉秀)를 도왔다. 유수는 동한(東漢)을 건립한 초대왕 광무제(光武帝 : 서기 25 년 - 서기 57 년)이다. 광무제는 갈포려에게 전공(戰功)을 치하하며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에 봉하였다.
갈포려의 동생 갈문(葛文) 역시 종군작전에 공로가 컸으며 전쟁으로 인하여 몸에 많은 부상을 입고 오른쪽 눈은 적군의 화살에 맞아 실명까지 하였다. 갈포려는 자기의 친동생 갈문에게도 작위를 내려 달라고 광무제에게 상서하였다. 그러나 갈문은 민간인 자격으로 종군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훈장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갈포려는 작위만 자기가 가지고 봉록(俸祿)은 모두 갈문에게 주었다.
갈포려는 가족을 데리고 남쪽으로 이사하여 구용현에 정착하여 은퇴 후 전원생활을 시작하였다. 갈홍(葛洪)의 조부 갈계(葛系)는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 한바 있으며 오나라의 군장성을 거쳐 안휘성에 있는 수현(壽縣) 현령(縣令)도 지냈다. 갈홍의 부친 갈제(葛悌)는 오나라 중서랑(中書郞)과 중호군(中護軍)과 오군부경(五郡赴警) 등 요직에 있었다. 오나라가 망한 후 진조(晉朝)에서는 갈제를 소능(邵陵 : 현재 호남성 보경현(寶慶縣)) 태수(太守)로 임명하였다.
갈홍(葛洪)은 소년 시절에 생활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기마와 활쏘기와 병정놀이와 무술을 습득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갈홍(葛洪)의 부친 갈제는 남쪽으로 이사한 세력들을 배제해야 된다는 당파(黨派)들의 피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갈제가 정신적 타격을 많이 받고 마음이 상하여 항상 우울한 끝에 병이 생겨 소능태수로 있을 때 죽고 말았다. 갈제는 좋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청렴결백하였으므로 저축해 놓은 돈도 없었다.
일시에 과부가 된 갈홍(葛洪)의 모친은 생활고를 겪기 시작했다. 그때 갈홍의 나이 열 세살 이었다. 갈홍(葛洪)은 그 당시 고생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기한곤졸(飢寒困졸), 궁집경색(躬執耕穡),승성이초(承星履草), 밀물주습(密勿疇襲)"
다시 말하면 "춥고 배고프고 피곤하여 병들었네! 스스로 직접 농사를 짓고 농작물을 거두어 들였다네!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 뜰때 까지 조상들로 부터 물려받은 밭에서 열심히 일했었지!" 라는 뜻이다.
일개 사족(士族)의 자제가 평민 백성의 대열로 갑자기 떨어졌다. 옛날부터 이와같이 액운을 만난 사람들은 오히려 액운이 디딤돌이 되고 촉진제가 되어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갈홍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밭에나가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였다. 이웃 집 밭을 갈아주고 또 땔나무를 만들어 팔아서 생긴 돈으로 늙으신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와같이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란 갈홍은 다른 아이들 보다 빨리 성숙하였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하다가 지치면 산등성이에 앉아서 자신의 장래를 깊이 생각해봤다. 갈홍은 농사나 짓고 땔나무를 만들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다니며 생계를 유지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갈홍은 장차 책을 읽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갈홍(葛洪)의 조부와 부친은 모두 포학명사(飽學名士)였다. 다시 말하면 학식이 풍부한 명사들이었다. 조상들이 보던 책은 집안에 많이 있었는데 도중에 절반은 분실되어 없어졌다. 갈홍은 농한기에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필요한 책을 빌리기 위하여 수 십리 길을 걸어갔다. 빌려온 책들 중에 어떤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책을 빌려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갈홍을 백안시했다. 또 어떤 책들은 파본이 많았다.
갈홍(葛洪)은 인내심을 갖고 한 번 먹은 마음을 끝까지 해내야 된다고 결심했다. 꼭 필요한 책은 땔나무를 시장에 팔아서 번돈으로 종이와 붓과 벼루와 먹을 사서 베꼈다. 종이를 아껴쓰기 위하여 잔글씨로 베꼈다. 이와같이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어 나이 16 세때 효경(孝經)과 논어(論語)와 역경(易經)과 시경(詩經)을 읽을 수 있는 실력이 양성되었다.
가세가 빈곤하므로 생계를 스스로 유지해야 되며 가장 노릇을 해야되고 노모를 봉양해야 되기 때문에 스승을 찾아가 개인지도를 받을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그러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을 깊이 연구하여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았다. 갈홍(葛洪)은 몇 년 사이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모두 통독하였다. 일 만권의 책을 통독하였다. 갈홍이 박학다식하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갈홍(葛洪)이 성년이되어 모친이 별세하였다. 모친을 부친 옆에 안장(安葬)한 후 갈홍(葛洪)은 혈혈단신이 되었다. 갈홍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근심걱정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제 가출하여 더 많은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고대 중국에서 허다한 연단가들이 불로장생(不老長生)과 우화성선(羽化成仙) 방법을 추구하였다. 우화성선이란?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혀 하늘을 나는 선인이 되는 일을 일컫는다.
역대 연단가들 중에 가장 성공한 사람은 갈현(葛玄)과 갈홍(葛洪)이다. 갈현은 갈홍(葛洪)의 종조부(從祖父)이다. 세상 사람들은 갈현을 갈선옹이라고 부르며 갈홍은 세상 사람들이 소갈선옹(小葛仙翁)이라고 불렀다. 갈현의 자(字)는 효원(孝元)이며 삼국시대 동오(東吳)의 단양(丹陽) 사람이다. 언제 태어났는지 모르며 또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전설에 의하면 갈현은 도교의 성선(成仙)을 배웠으며 그가 간직하고 있던 비술(秘術)을 제자 중 정은(鄭隱)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정은 역시 저명한 학자였다. 정은은 도가수련지술에 정통한 80 여세의 신체 건강한 도학자였다. 80여 세의 정은은 검은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으며 술을 두 말(斗)을 마셔도 취하지 않했고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해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갈홍은 정은을 뵙고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백가전적(諸者百家典籍)을 공부했다. 정은의 제자는 50 명이나 되었으며 그중 갈홍은 특별히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정은은 자신의 일생동안 배우고 닦은 지식을 갈홍에게 전수하였다. 정은은 자기가 비장하고 있던 200여 권의 서적을 아무때나 볼 수 있게 갈홍에게 허락하였다. 갈홍은 이때부터 도가의 수련지술(修煉之術)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정은은 갈홍(葛洪)의 종조부 갈현으로 부터 이어받은 연단비술(煉丹秘術)을 또다시 갈현의 종손(從孫)인 갈홍에게 전수했다. 그 당시 소갈선옹 갈홍의 명성은 대단했다.
갈홍(葛洪)의 자字는 치천(稚川)이며 호(號)는 포박자(抱朴子)이다. 갈홍(葛洪)의 학술은 종조부 갈현 보다 훨씬 우수했다. 갈홍(葛洪)은 포박자와 신선전(神仙傳) 및 시(詩)와 부(賦)와 잡문 등 일 백 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갈홍은 종조부 갈현과 마찬가지로 신선술을 좋아했으며 반평생을 연단에 소비했다. 그리하여 갈홍은 연단의 대가가 되었다. 갈홍(葛洪)은 연단을 통하여 체험하고 깨달은 지식과 업적을 모두 포박자에 기록해 놓았다. 그중 내편(內篇)은 신선토납(神仙吐納)의 방법을 수록한 지침서이다. 신선토납이란? 도가의 수련술의 일종으로써 입으로 더러운 기氣를 토吐하고 코로 신선한 기(氣)를 마시는 법을 말한다.
갈현과 갈홍(葛洪)은 모두 전기적(傳奇的)인 인물이다. 진서(晉書)의 갈홍전(葛洪傳)과 명대(明代) 왕세정(王世貞)이 편찬한 열선전전(列仙全傳) 중에 보면 갈현과 갈홍의 전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그들에 대한 몇 가지 고사를 골라 소개한 것이다.
갈현은 어려서 부터 도가의 신선술을 사랑했다. 도가의 연단술을 배우기 위하여 도관(道觀)을 찾으러 명산대천을 헤매고 돌아 다녔다. 전설에 의하면 신선과 같은 인물 좌자(左慈)를 따라 다녔다고 한다. 좌자는 삼국지 중에 나오는 이야기 즉 술잔을 조조(曹操)에게 던지며 장난친 사람이다. 갈현은 좌자로 부터 석실단경(石室丹經)과 육갑신술(六甲神術)을 배웠다. 갈현은 좌자 스승과 함께 관중(關中)과 강남(江南)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 많은 진기한 이야기와 놀라운 소문과 일화를 만들어 냈다.
관중은 섬서성(陝西省) 위하(渭河) 유역 일대를 일컬으며 위하는 황화(黃河)의 한 지류(支流)이다.
전설에 의하면 갈현이 처음 도를 닦을 때는 소문이 그다지 빨리 퍼지지 않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갈현의 진기한 소문이 오왕(吳王) 손호(孫皓)의 귀에 들어갔다. 오왕은 갈현이 술을 한 잔 마시면서 한편으로는 법술(法術)을 펼치는 사람이라고 황궁내에 소문을 퍼뜨렸다.
갈현은 행동이 번개처럼 매우 빨랐다. 금방 입속에 밥을 한 덩이 집어넣고 꿀떡 삼켰는데 다시 입밖으로 나와 있었다. 또 삽시간 사이에 수 백마리의 노랑 벌떼들이 날아 다닌다. 구경하고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앉는다. 그래도 훈련이 잘된 벌떼들은 구경꾼들을 쏘지 않는다. 잠시 후 갈현은 입을 크게 벌리고 서있다. 그러면 벌떼들이 갈현의 입속으로 한 마리 한 마리씩 순번을 잘 지켜가며 날아 들어간다. 그러면 갈현은 한 입 가득히 입속에 들어있는 벌떼들을 꼭꼭 씹어서 삼킨다. 갈현은 벌들을 밥으로 생각하고 먹는 모양이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고 서 있던 오왕 손호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갈현에게 상금을 하사하였다.
이후부터 오왕 손호는 외출이나 유람을 떠날 때 항상 갈현을 불러 함께 금마차를 타고 떠났다.
어느 날 오왕 손호는 갈현을 불러서 양자강에서 물놀이 하며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기 위하여 함께 떠났다. 오왕 손호의 신하들은 신하들과 함께 한 배에 타고 오왕은 갈현과 한 배에 탔다. 어느덧 항구 세개를 지나게 되었다. 홀연히 모진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수 많은 작은 배들이 침몰되었다. 이때 갈현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오왕은 "갈선옹은 도술을 하는 사람임으로 이렇게 위급한 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며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고 못내 아쉬워하며 탄식했다.
하룻 밤이 지나갔다. 태풍은 잠잠해 졌다. 오왕과 신하들은 배위에서 강물 위를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홀연히 갈선옹이 파도를 타고 물위에서 헤엄쳐서 오고 있는것이 눈에 띄었다. 갈선옹은 배위로 올라왔다. 얼굴에 땀이 흠뻑 젖어있었다.
갈선옹은 오왕을 향하여 "지난밤 오자서(伍子胥가 나를 강제로 머물었다 가라고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오자서의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이제야 오는 길 입니다. 폐하께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고 폐하의 여정을 지체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고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갈현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사마염(司馬炎)이 오나라를 멸하였다. 동탁(董卓)의 난(亂) 후 90 년 동안 중국은 분열, 할거, 혼전시대를 겪어 오다가 드디어 사마염에 의하여 3 국이 통일되었다. 그리고 사마염은 서진(西晉)을 세우고 초대왕 무제(武帝 : 서기 265 년 - 서기 290 년)로 군림하였다. 갈현은 갑자기 망국민(亡國民)이 되었다. 갈현은 외로이 떠있는 구름과 같은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갈현은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명산대천에 도달되면 거기 머물면서 시를 읊었다.
어느 해 갈현은 관중(關中)의 화음현(華陰縣)에 도달되었다. 나이 어린 서생(書生)을 만났다. 서생은 처녀의 집으로 데릴사위가 되어 들어갔다. 갈선옹은 자신의 법안(法眼)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았다. 원래 그 처녀는 사정(蛇精)이다. 서생은 그 처녀를 측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처녀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농부가 되었다. 매일 서생은 들에나가 소를 몰고 밭을 갈았다.
갈현은 서생이 밭을 모두 다 갈때 까지 기다렸다. 점심때가 가까웠다. 서생은 밭을 다 갈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갈선옹은 밭안으로 들어가며 큰 소리로 서생을 부르며 "어이! 여보게! 젊은이! 자네는 지금 상당히 위험한 상태에 있네!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가?" 라고 말했다.
젊은 서생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위험이요! 내가 보시다시피 이렇게 펄펄 살아있지 않습니까? 아무런 재앙도 병도 없습니다. 위험은 무슨 위험이 나에게 임했단 말씀입니까? 아마도 선생께서 밭 가운데서 나를 바라보시기 때문에 잘못 본 것일 것입니다." 고 대답했다.
갈선옹은 "나는 관상을 볼 줄 모른다. 그러나 네가 데릴사위로 들어갔다는 사실과 너의 새댁이 사람이 아니고 사정이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금후 너의 새댁이 몇 사람을 더 잡아 먹을지 모른다. 모두 데릴사위 만 잡아 먹는다." 고 서생에게 말했다. 서생은 갈현의 말을 듣고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 졌다. 그리고 잠시동안 서생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못했으며 갈선옹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갈선옹은 서생이 자기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또 서생 앞으로 다가서며 "내 말이 믿어지지 않지? 그러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나는 네가 너의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증거를 보여 주겠다." 고 말했다.
갈선옹은 서생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우물가로 갔다. 갈선옹은 서생에게 우물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물속을 들여다 보라고 말했다. 서생은 무섭기도 하고 놀라서 우물 속을 들여다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없어 한 번 쳐다보고 겁에 질려 넋을 잃었다. 우물속에 백골白骨 만 쌓여 있었다. 머지않아 우물의 절반이 백골로 채워 질 것 같았다.
서생은 갈선옹을 향하여 무릎을 꿇어 앉아 머리를 땅에대고 계속 절하며 목숨 만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갈선옹은 서생에게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고 타일렀다. 그리고 갈선옹은 서생이 거처하고 있는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부인을 놀라게하여 도망치게 할 필요도 없고 법술을 써서 곤란을 극복하면 된다고 말했다. 서생은 갈선옹의 명령에 순종할 뿐이었다.
서생은 갈선옹을 살그머니 집으로 안내하였다. 서생의 부인은 커튼을 치고 방안에서 한참 잠을 자고 있는 중이었다. 부인이 덮고 자고있는 솜 이불을 살짝들어 올리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갑자기 큰 뱀이 자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들어 내 놓고 성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대단히 무서웠다. 큰 뱀 옆에는 작은 뱀 한 마리가 보였다.
갈선옹은 우선 부적을 써서 뱀을 진정시켰다. 뱀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진정시켜 놓은 다음 칼을 휘둘러 큰 뱀을 두 토막을 냈다. 이때 수 십마리의 작은 뱀들이 한데 엉켜 나오기 시작했다. 큰 뱀의 새끼들임이 틀림없었다. 갈선옹은 후한이 없게하기 위하여 작은 뱀들을 하나 하나씩 모두 죽여버렸다. 온 방바닥은 피로 물들여져 있었으며 뱀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서생은 뱀을 죽이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한쪽으로 피해 있었으며 놀라서 절반은 죽어 있었다.
갈선옹은 "너의 재난은 이제 물러갔다. 그러나 너와 요사스러운 뱀과 이미 오랫동안 접촉했기 때문에 너의 체내에 뱀의 독이 남아있다. 내가 너를 치료해 주마. 내 처방은 너를 살려줄 것이다." 고 말했다. 갈선옹은 말을 마치자 마자 붉은 부적 한 장을 그려주면서 복용하라고 말했다.
부적을 복용하고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생은 복통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생은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서생은 즉시 설사를 했다. 대변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지렁이 비슷한 뱀의 시체가 나왔다. 서생은 또 한번 놀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생의 몸은 경쾌해지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서생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또 어느 해 갈선옹은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같은 배안에 여러명의 상인들도 함께 승선하였다. 상인들은 갈선옹이 도인들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갈선옹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바랑 속에 부적이 많이 들어 있었다.
어떤 상인이 갈선옹을 향하여 재미있는 질문을 던졌다. "도장(道長)님! 부적이 얼마나 영험한지 저희들에게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한 번 시험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하고 말했다.
갈선옹은 선뜻 "좋다!" 고 대답했다.
말을 마치자 마자 갈선옹은 부적을 한 장 바랑속에서 꺼내어 강물 위로 던졌다. 부적은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또 한 상인은 웃으며 "도장님! 저게 무엇이 희기(稀奇)한 것입니까? 누구든지 부적을 강물 위에 던지면 모두 강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흘러 내려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지요!" 라고 말했다.
갈선옹은 미소를 지으며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또 한 장의 부적을 바랑(鉢囊) 속에서 꺼내어 강물이 흐르는 반대 방향으로 던졌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부적이 강물이 흐르는 반대 방향으로 물결을 제치며 거슬러 올라갔다. 배위에 타고 있는 모든 상인들은 두 눈을 크게뜨고 부적을 쳐다보며 "과연 이상하군!" 하고 소리쳤다.
갈선옹은 또 한 장의 부적을 강물 위에 던졌다. 그랬더니 강물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하더니 부적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부적은 물결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지도 않고 물결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지도 않았다. 모든 상인들은 아연실색하여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어안이 벙벙하였다.
잠시 후 갈선옹은 손가락 한 개를 강물속에 집어 넣었다. 그랬더니 물결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던 부적과 물결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던 부적이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각각 이동하기 시작했다. 강물위에 떠있던 세 개의 부적이 모두 갈선옹을 향하여 모이기 시작했다. 갈선옹은 부적 세 개를 모두 강물위에서 건져내었다.
배에 타고있던 모든 상인들은 찬탄해 마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갈선옹을 세상에서 보기드문 활신선이라고 우러러보며 경탄하였다. 후에 갈선옹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전설에 의하면 갈선옹은 선계(仙界)로 등입(登入)했으며 그의 부적법(符籍法)과 연단술은 그의 제자 정은(鄭隱)에게 전수되었다고 한다. 정은은 다시 그의 모든 기술을 갈선옹의 종손(從孫) 갈홍에게 전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갈홍의 연단술은 더욱 더 발전하여 한층 더 빛나게 되었다. 갈홍의 명성과 행적은 일 천 칠 백년 이래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갈홍은 소년 시절에 자기 조국 오나라가 망했다. 그리고 갈홍이 열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운이 중도에 몰락하여 집안살림이 형편없었다. 또 한편 정치상으로 나라는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생활은 궁핍했기 때문에 갈홍의 정신상태는 소극적이며 비관적이었다. 그래서 일반 농민들과 같은 빈궁한 생활은 시작되었다. 갈홍은 학문을 좋아하여 배우기에 힘썼다. 항상 낮에는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만들어 지게에 짊어지고 내려와 시장에 내다 팔아서 용돈을 만들어 집안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남은돈으로 종이와 붓과 벼루와 먹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밤새는 줄 모르고 독서하고 붓글씨도 썼다. 그 결과 갈홍은 유가의 학설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점점 그의 명성은 온 세상에 퍼져 허다한 고관대작들 까지도 갈홍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晉)나라 혜제(惠帝) 태안(太安) 년간(서기 302 년 - 서기 303 년)에 갈홍의 나이 21 세의 젊은 청년이었다. 갈홍은 문학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방면에도 통달하였다. 이때 마침 양주(揚州)의 석빙(石冰)과 장창(張昌) 등이 백성들을 모아 의거를 일으켰다. 강회지역에서 일어난 진조(晉朝)에 대한 반정부 봉기였다. 강회(江淮)지역은 강소성과 안휘성 일대를 일컫는다. 반란의 피해는 말 할수 없이 컸다.
조정에서 오흥(吳興) 태수(太守) 고비(顧秘)를 대도독(大都督)으로 임명하여 반란을 진압하라고 어명이 내려왔다. 고비는 군병을 소집하여 적들을 토벌해야 할 긴박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고비는 갈홍을 의군(義軍)의 도위(都尉)로 임명하였다. 도위는 정삼위(正三位)에서 종사위(從四位) 까지의 무관(武官)을 일컫는다.
갈홍은 군병(軍兵)을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 첫째는 군법을 어길 수 없었고 둘째는 석빙 집단들이 자기가 살고있는 고향을 소란시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갈홍의 고향에서 수 백명의 군병이 소집되었다. 전투 중 갈홍의 뛰어난 전략이 나타났다. 일차 정부 관군과 석빙의 반란군들이 맞닥뜨렸다. 갈홍이 지휘하던 관군이 석빙군을 대파 시켜버렸다.
갈홍의 군대는 삼엄한 경비를 하며 행군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군의 복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부대에서는 군병들이 재물에 만 신경을 쓰고 전투에는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군병들이 흩어져 소집이 않되어 많은 사상자를 냈다. 단지 갈홍의 군병들 만 임전태세를 완비하여 적군을 모조리 살퇴시켰기 때문에 다행히 관군의 참패를 겨우 면했다. 기타 모든 장군들은 갈홍의 용병술(用兵術)에 탄복하였다. 그후에도 갈홍의 군대는 여러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서 매번 승리를 거두고 석빙의 아들을 생포하여 참수형에 처하였다.
갈홍(葛洪)은 탁월한 지략을 작전에 응용하였다. 유년 시절 기마와 활쏘기와 병정놀이 등으로 부터 훈련이 잘 되었으며 행동이 민첩하였다. 그리고 그의 용감성은 당해낼 자가 없었다.
제 2 차 전투에서 갈홍은 너무 깊숙이 적진 속으로 쳐들어 갔다. 적군의 기마병들이 갈홍(葛洪)을 포위하여 추격하고 있었다. 갈홍(葛洪)은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다. 갈홍(葛洪)은 말을 타고 도망가며 활을 세게 잡아당겨 쏘았다. 갈홍(葛洪)을 추격하던 적군 두 명과 말 한 필이 갈홍(葛洪)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갈홍(葛洪)은 구사일생으로 적군들의 포위망을 뚫고 살아났다.
석빙 반란평정 전투 중 갈홍(葛洪)의 전공(戰功)은 혁혁하였다. 그래서 고비는 조정에 상서하여 갈홍(葛洪)을 복파장군(伏波將軍)에 봉하여 주었고 동시에 큰 재물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기타 장군들도 상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장군들은 상금을 타가지고 모두 자기집으로 돌아가 저축해 두었다. 오직 갈홍(葛洪) 만 상금의 일부를 부하 장병들에게 골고루 분배해 주고 또 일부는 가정 형편이 곤란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최후로 남은 비단 열 필은 시장에 내다 팔아서 고기와 생선을 사가지고 돌아와 안주를 만들고 술을 사서 전투에 참가했던 장병들을 모아놓고 전승 축하파티를 열어 주었다. 갈홍은 재물을 가볍게 보고 자신의 재물을 내어 의로운 일을 했다는 미담(美談)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석빙란을 평정한 후 갈홍(葛洪)은 군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비는 갈홍(葛洪)에게 고향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만류헸으나 갈홍(葛洪)은 극구 반대하였다. 고비는 갈홍(葛洪)이 벼슬길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갈홍(葛洪)의 학식과 군사방면에 뛰어난 재능으로 인하여 갈홍은 얼마든지 관운을 타고 형통할 수 있었으나 그는 학문연구에 몰두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이때부터 갈홍(葛洪)은 학문연구와 독서에 열중할 수 있는 조건이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청빈한 생활이었지만 갈홍은 종일 문을 닫고 정신없이 미친듯이 방안에서 책 읽기에 만 열중하였다.
갈홍(葛洪)이 살고있는 집은 사람사는 집과 같지 않았다. 앞 마당에는 잡초 만 무성하게 우거져 있고 나뭇가지로 엮어만든 울타리는 모두 망가져 있었고 신발과 모자는 더러워졌고 옷차림을 제멋대로 하고 다니며 의복은 찢어져 있고 옷차림은 항상 그 모양 그 꼴이었다. 의복은 모두 구식의복이며 의복을 바꾸어 갈아입는 법이 없었다. 옷깃도 크고 허리띠도 크며 옷소매는 폭이 좁고 너무나 몸에 꼭 맞았으며 두루마기는 길어서 땅에 질질 끌고 다니고 어느때는 두루마기가 너무 짧아서 종아리와 무릎이 다보였다. 도대체 옷차림에 대하여 신경을 전혀 쓰지 않했다.
갈홍(葛洪)은 그 당시 유행하는 투계(鬪鷄)와 경마와 장기와 바둑과 씨름 등 오락에는 추호도 흥미가 없었다. 이따금 친구들이 강제로 데리고가서 구경을 시킬 때 갈홍은 한 쪽에서 졸고 있었다. 갈홍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행동 역시 괴팍하였다. 말은 솔직하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잘 휩쓸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멀리했다. 사람들은 갈홍의 이와같은 어리석은 짓을 보고 갈홍은 세상 모든것을 초월한 사람이다고 말했다. 그는 오직 자유롭게 독서를 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는 사람이라고 모두들 인정했다. 어떤 사람들은 갈홍(葛洪)을 교만하여 모든 것을 멸시하고 세속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갈홍은 권세있는 자에게 나아가 아부하며 빌붙어 먹는 사인(士人)들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갈홍(葛洪)은 백성들을 마음대로 마구 짓밟는 관리들을 제일 미워했다. 갈홍은 스스로 다음과 같은 자계(自誡)를 만들었다.
"차마지적(車馬之跡), 불경귀세지역(不經貴勢地域); 편자지서(片字之書), 불교재위지가(不交在位之家)"
다시 말하면 "수레와 말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는 돈푼이나 있고 권세있는 집근처는 얼씬도 하지마라. 또 책좀 읽었다고 학식이 풍부한 척 거드름 피우는 집안 사람들과 사귀지마라." 는 뜻이다.
그러므로 갈홍은 선비와 지식인들과 유생과 지위가 높고 명성이 높은 관리들을 증오하였고 비방하였다. 고향 사람들은 갈홍의 거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를 심지어 괴인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갈홍을 선량한 괴인이라고 생각했다. 집안에 열 흘간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으면 절반은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향 사람들이 병들어 있으면 세심하게 진찰하여 약값도 받지않고 치료해 주었다. 수 많은 궁핍한 사람들이 갈홍의 은혜를 입었다.
고향 사람들은 갈홍을 포박지사(抱朴之士)라고 부른다. 포박지사란? 명예나 사리사욕이 없이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꾸밈이없이 검소하게 사는 선비를 일컫는다. 갈홍은 사람들이 자기를 포박자라고 부르면 매우 기뻐하였다. 효자(孝子)에 보면 "견소포박(見素抱朴), 소사과욕(少私寡欲)" 이란 구절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명예나 사욕이 없이 자기의 본분을 지켜 소박하게 살라." 는 뜻이다.
영흥(永興) 원년 (서기 304 년) 갈홍은 낙양을 향하여 출발했다. 낙양은 그 당시 서진(西晉)의 수도였다. 낙양은 북방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갈홍은 낙양으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찾으러 올라갔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까지 구하지 못한 책들을 구해서 읽고 학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 낙양으로 갔다. 바야흐로 문풍(文風)이 한창 흥성하고 있는 낙양에 도착되어 독서를 하기 시작했으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세상은 자기 맘대로 되지않아 갈홍이 낙양에 도착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팔왕지난(八王之亂)이 발생했다. 갈홍은 서진 왕실 내에서 종친(宗親)끼리 서로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보고 천하가 태평할 날이 앞으로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혀 버렸다. 갈홍은 서주(徐州), 예주(豫州), 형주(荊州), 양주(襄州), 광주(廣州 )등지로 돌아 다녔다. 갈홍은 전란으로 인하여 전란의 고통을 맘껏 맛보며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래서 갈홍(葛洪)은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갈홍(葛洪)은 광주(廣州) 지사(知事)로 부임해 있는 친구 혜함(嵇含)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 광주 남해현(南海縣)의 태수 포현(鮑玄)은 유명한 연단가 겸 의학가였다. 갈홍(葛洪)은 우선 광주지사인 친구 혜함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광주로 향하여 갔다. 혜함은 갈홍(葛洪)이 군사막료(軍事幕僚)에 임명되는 것을 말렸다. 갈홍 역시 관직에 오르는 것을 싫어하였다. 갈홍(葛洪)은 잠시 동안 쉬고 싶었다. 후에 혜함은 출정하여 싸우다가 피살 당했다.
갈홍(葛洪)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연단하며 양생이나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홍(葛洪)은 종조부 갈현의 제자 정은으로 부터 연단술을 배우기는 했지만 한 번도 실험 실습해 볼 만한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갈홍(葛洪)은 이제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갈홍(葛洪)은 포현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포현 역시 당대의 대학자였으며 특히 의학과 도가금단내연지술(道家金丹內煉之術)에 정통하였다. 포현은 또 관상을 잘 볼줄 아는 사람이다. 포현은 갈홍(葛洪)을 보고나서 그릇이 크고 무겁고 용모가 아주 훌륭하다고 믿었다. 포현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갈홍(葛洪)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갈홍(葛洪)은 연단의 실험 실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포현은 연단학문상으로 볼때 보통은 아니었다. 포현은 갈홍(葛洪) 역시 연단 방면에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는데 오직 실험 실습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포현은 장래 자기의 모든 의술과 연단기술을 갈홍(葛洪)에게 전수해 주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갈홍은 자격이 충분히 있는 유일한 청년이라고 결정했다.
그래서 포현은 자기의 무남독녀 외딸을 갈홍(葛洪)의 아내로 맞게 해주었다. 포현은 동시에 자기 의학방면의 지식과 비전을 모두 갈홍(葛洪)에게 전수하였다. 포현은 갈홍(葛洪)을 연단가 겸 의술의 대가로 양성시켰다. 갈홍(葛洪)은 포현의 학술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갈홍(葛洪)과 그의 처 포고는 서로 사랑했고 금슬이 좋았으며 서로 학술 연구에 몰두하였다.
대략 동진(東晉) 성제(成帝 )함화(咸和) 초년 서기 326 년에 동진은 이미 중원(中原)을 잃고 강남에 비교적 온정을 찾았다. 그래서 갈홍은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조정의 전권(專權) 인물이었던 호부상서(戶部尙書) 왕도(王導)가 갈홍을 주부(主簿)직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갈홍은 호부상서에 속해 있으며 군사막료로써 호부상서의 고문관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일시적으로 갈홍은 사양하기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갈홍은 완강히 거절하였다. 조야 인사들은 모두 갈홍은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관직은 없었지만 갈홍을 국사 결정에 고문으로 이용하려고 했으며 대저작(大著作)에 공동 서명할 때 맨 처음 서명하는 직책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조정에서는 갈홍을 국사편찬 책임자로 임명하려고 하였다. 갈홍은 모두 가까스로 거절했다.
갈홍은 취직에는 아무 생각이 없고 오직 적당한 지방에 가서 연단 실험 실습을 하는 것이 제일 큰 소원이었다. 이때 갈홍은 교지(交阯 : 현재 귀주성(貴州省) 보정(普定)의 동쪽지방)에 있는 어느 산 속에서 단사(丹砂)가 생산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갈홍은 조정에 구루현(句漏縣) 현령으로 임직시켜 달라고 청했다. 구루현은 광서성의 한 작은 현이다. 광서성은 서남쪽으로 월남과 국경선을 함께 가지고 있는 성이다. 구루현 내에 구루산이 있는데 교지에서 뻗어 내린 산맥에 자리잡고 있다.
그 당시 동진의 셋 째 임금 성제(成帝 : 사마연(司馬衍))황제는 갈홍의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큰 공적을 세운 갈홍(葛洪)이 자기 몸을 굽혀 변방의 가장 작은 현의 현령에 종사하겠다고 하니 이치에 맞지 않다고 조정에서 모두들 왈가왈부하여 임명이 취소되었다. 그래서 성제는 갈홍에게 구루현 현령직의 허가를 취소했다.
갈홍(葛洪)은 성제에게 "소인이 구루현 현령이 되는 것이 좋아서도 아니며 또 부귀를 탐내서도 아닙니다. 다만 그 지방에서 연단에 필요한 단사(丹砂)가 생산되므로 만일 소인이 열심히 연단을 실험 실습하여 성공한다면 수 많은 사람들을 불로장생하게 할 수 있고 연년익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 재차 아뢰었다.
갈홍(葛洪)이 하는 말을 성제가 듣고 귀가 솔깃하였으며 그럴듯하게 여겨져 마음이 갈홍에게 쏠렸다. 성제는 한참 동안 생각 한 끝에 갈홍을 구루현 현령에 임명하였다. 갈홍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부인과 자식을 앞세우고 남하하였다. 이때 갈홍의 나이 50여 세 였다. 갈홍의 가족이 광주에 도착되었다. 광주에서 서쪽으로 구루현을 향하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갈홍(葛洪)의 장인 포현은 남해현(南海縣) 태수를 지냈었다고 전에 갈홍에게 말했다. 포현이 남해현 태수를 지낼 때 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그중 광주지사 등악등嶽)은 갈홍의 장인과 가장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갈홍(葛洪)에게 추천해 주었다. 등악은 역시 갈홍과도 친구사이였다.
장인 어른의 친구들이 모두 갈홍이 구루현령으로 임명되어 가는 것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구루현은 미개하고 황량하며 문화가 낙후되어 외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인적이 보기 드문 지방으로 연단만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갈홍(葛洪)은 그러한 권고들은 아예 귓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사랑하는 처자식을 자기 자신의 고집에 말려들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갈홍(葛洪)은 재삼 재사 고려한 후 광동성내에 있는 나부산맥(羅浮山脈) 내에서 연단에 적합한 지방을 찾고 있었다. 마침 한 곳을 발견하여 정착하고 연단실험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동진 성제 함화 8 년(서기 333 년)이었다. 갈홍(葛洪)의 일생을 보면 4 분의 3 은 산림속에서 생활했다. 나부산 속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도 논도(論道)와 연단(煉丹)과 행의(行醫)는 갈홍에게 있어서 절대불가분의 삼대(三大)사업이었다.
나부산은 광동성의 증성현(增城縣)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홍콩의 북쪽 200km 지점에 있다. 두 개의 산이 모여 있는데 하나는 나산(羅山)이라고 부르고 또 하나의 산은 부산(浮山)이라고 부르는데 두 개의 산을 합쳐서 나부산이라고 칭한다.
갈홍은 나부산 속에서 연단을 실험하여 얻은 결과를 포박자에 기록해 놓았다. 포박자는 총 16 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단부분을 "금단(金丹)", "선약(仙藥)", "황백(黃白)"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해 놓았다.
금단 부분의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부단지위물(夫丹祉爲物), 소지유구(燒之愈久), 변화유묘(變化愈妙), 황금입화(黃金入火), 백연불소(百鍊不消), 복차이물(服此二物), 연인신체(鍊人身體), 고능영인불로사(故能令人不老死)"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무릇 단을 만드는 광물을 가열하여 오래 구우면 구울수록 변화가 더욱 더 묘하다. 황금을 불속에 넣고 구우면 백번 정제하여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 두 가지 광물을 복용하면 신체가 단련되어 능히 불로사한다." 는 뜻이다.
갈홍(葛洪)이 말하는 금은 황금을 녹힌 액을 말하며 갈홍(葛洪)이 말하는 단(丹)은 단사(丹砂)를 달구어 만든 단(丹)을 말한다. 단을 만들 때 아홉 번 정련한 단은 구환단(九還丹)이라고 부른다. 또는 구전금단(九轉金丹)이라고도 부른다.
포박자에 보면 "일전지단(一轉之丹), 복지삼년득선(服之三年得仙); 이전지단(二轉之丹), 복지이년득선(服之二年得仙); 삼전지단(三轉之丹), 복지일년득선(服之一年得仙); 사전지단(四轉之丹), 복지반년득선(服之半年得仙); 오전지단(五轉之丹), 복지백일득선(服之百日得仙); 육전지단(六轉之丹), 복지사십일득선(服之四十日得仙); 칠전지단(七轉之丹), 복지삼십일득선(服之三十日得仙); 팔전지단(八轉之丹), 복지십일득선(服之十日得仙); 구전지단(九轉之丹), 복지삼일득선(服之三日得仙)"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한 번 단련한 단을 삼년간 복용하면 신선이 되고 두 번 연단한 단을 2 년간 복용하면 선인이 되고 세 번 연단한 단을 일년간 복용하면 선인이되며 네 번 연단한 단을 반년동안 복용하면 선인이되고 다섯 번 연단한 단을 일 백일 동안 복용하면 선인이되고 여섯 번 단련한 단을 40 일 동안 복용하면 선인이되고 일곱 번 연단한 단을 30 일 복용하면 선인이 되고 여덟 번 연단한 단을 10 일 동안 복용하면 선인이 되고 아홉 번 연단한 단을 3 일 동안 복용하면 선인이된다." 는 뜻이다.
구전금단(九轉金丹)은 또 태청신단(太淸神丹)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태청의 관천신경(觀天神經)에서 부터 나왔다. 태청은 도교의 세 신선 즉 태청(太淸), 옥청(玉淸), 상청(上淸)을 일컫는다. 갈홍(葛洪)의 연단은 약물과 의료가 융합되어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금궤약방(金匱藥方)과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과 같은 의약서적에 기록해 놓았다. 이 두 권의 의약서적은 한의학의 역대 의학가와 본초학가들의 필독서(必讀書)였다.
신비한 부분 이외에도 갈홍은 한의학계에서 최초의 가장 성공한 과학자 또는 화학자라고 볼 수 있으며 그 당시 노벨상이 있었더라면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느 해 갈홍(葛洪)은 홀연히 광주지사 등악(鄧嶽)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속에 보면 "나는 멀리있는 명사(名師)를 뵙기 위하여 떠나야 됨으로 이제 자네와 이별해야 되겠네! 마지막으로 친구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떠나야겠으니 빨리 내가 있는 곳으로 와주면 고맙겠네!" 라는 부탁의 내용이었다.
등악은 갈홍(葛洪)이 보낸 편지를 손에들고 읽어보자 마자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갈홍을 만나지 않으면 영원히 갈홍(葛洪)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광주에서 부터 123km 떨어진 나부산 까지 급히 쫓아갔다. 때는 정오 쯤 되었다. 등악은 갈홍이 누추한 단간 초가집 속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갈홍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등악은 초가집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갈홍은 이미 좁고 긴 평상위에 정좌하고 병없이 죽었다. 얼굴색은 산 사람과 똑같았다. 그러나 호흡은 정지되고 다시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갈홍(葛洪)은 동진(東晉) 목제(穆帝) 승평(升平) 5 년 (서기 362 년)에 종년 81 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갈홍(葛洪)이 죽고 난 후 그와 관계된 사람들 즉 갈홍의 부인과 아들과 제자들이 신화와 같은 많은 전설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은 우선 갈홍(葛洪)은 죽지 않았으며 우화등선(羽化登仙)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갈홍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갔을 때 갈홍(葛洪)의 시체는 이미 없어졌고 관속에 갈홍의 수의(壽衣) 만 남아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이와같은 전설이 증명되었다.
당나라 때 최위(崔煒)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남해 개원사(開原寺)에 놀러갔다. 할머니 한 분이 걸식을 하고 있었다. 최위는 연로한 할머니가 걸식하는 것이 측은하게 보여 은(銀) 한 덩어리를 주었다. 그리고 최위는 할머니의 생활이 개선되기를 희망하였다. 노할머니는 최위에게 "당신의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보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초약(草藥)을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으로 췌우(贅疣 : 혹, 사마귀)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우(新疣)이거나 구우(舊疣)이건 한 번 뜸을하면 말끔히 없어집니다. 초약이 나에게 현재 조금밖에 없습니다. 받으십시요. 이 초약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아무때나 필요하면 쓰시오" 라고 말했다.
최위는 그 약초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와 수 많은 췌우환자들을 치료하였다. 그러나 그 초약을 자기에게 준 할머니가 누구인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못했다. 얼마후에 어떤 사람이 최위에게 "그 초약을 당신에게 준 그 노파파(老婆婆)는 갈홍의 부인 포대고(鮑大姑)입니다." 고 말해 주었다. 최위가 이 사건을 잠시동안 생각해 보니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 처럼 들렸다. 왜냐하면 진(晉)나라 때 부터 당나라 때 까지 적어도 250 년은 지났는데 진조(晉朝) 초년부터 계산하면 300년 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포대고의 고사(故事)는 불교의 야호선(野狐禪)에서 내려온 말이다.
갈홍이 나부산에서 연단할 때 성씨가 황(黃)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항상 갈홍 옆에서 잠자는 시간 만 빼고 떨어져 본 일이 없을 정도로 갈홍의 시중을 열심히 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산속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 세상과 절연된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황야인(黃野人)이라고 불렀다. 갈홍이 죽은 후 선단(仙丹)을 조금 남겨 놓았는데 나부산 석주(石柱) 사이에 있었다. 황야인이 한 알 주어서 복용해 보았다. 그 결과 황야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나부산 임야(林野) 속에서 신출귀몰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나부산에 놀러 갔다. 해가 저물었다. 산속에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려 길을 잃고 헤매었다. 산속에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나부산은 매우 거친 산이며 집도 한 채 없는 깊은 산이다. 다행히 거처할 만한 산굴을 발견하였다. 하룻밤을 산굴속에서 묵어야만 했다. 한 밤중이 되었다. 휘영청 밝은 달이 하늘에 떠있는 고요한 밤이다. 어떤 사람이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발가벗은 나체였다. 실오라기 하나 몸에 걸치지 않했다. 산굴 밖에 우뚝 서 있다. 청초한 용모였다.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모두 희었다. 그리고 온 몸에는 여리고 부드러운 긴털이 나 있었다. 그는 분명히 야인은 아니고 선인일 것이다고 추측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노인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노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오직 크게 웃는 웃음소리 뿐 말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웃음소리는 호랑이가 길게 포효하는 소리와 같고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와도 같았다. 웃음소리는 산천초목을 진동시켰다. 입에서 맘대로 나오는 시를 읊는다.
"운래만령동(雲來萬嶺動), 운거천알색(雲去天一色); 장소양삼성(長笑兩三聲), 공산추월백(空山秋月白)"
다시 말하면 "구름은 수 많은 재를 넘어오고 구름이 모두 지나가고 나니 푸른 하늘은 아름답기만 하구나!
크게 두 세번 웃는 소리! 인적이 드문 쓸쓸한 산위에 밝은 가을달은 세상을 밝게 비추누나!"
라는 뜻이다. 눈깜짝 할 사이에 그 노인은 자취를 감추었다. 별인(別人)이 산속에서 나오면 별인에게 지난 밤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아침 새벽에 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황야인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황야인은 갈홍(葛洪)의 옆에서 시중들던 갈홍(葛洪)의 제자였다.
갈홍(葛洪)은 의학과 시부(詩賦)와 지리(地理)와 잡담(雜談)과 병사(兵事)와 방기(方技) 등 60여 종에 걸쳐 일 백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의학방면에서 복식방(服食方) 4 권, 신선복식방(神仙服食方) 10 권, 태청신선복식경(太淸神仙服食經) 1 권, 옥함전방(玉函煎方) 5 권, 금궤약방(金匱藥方) 100 권, 주후구졸방(肘後救卒方) 3 권 등을 저술했다. 그러나 오직 주후구졸방 한 권 만 현존하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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