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日本)의 노병(老兵)이 위안부(慰安婦) 희롱 후 인육(人肉) 식용(食用)했다고 진술 :
세계 제 2 차 대전 때 중국의 어느 처녀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어 일개(一個) 하사관(下士官)의 위안부(慰安婦)가 되었다. 색격장(索格庄) 마을에 일본군들이 장기간 주둔하였을 때 군량미보급이 곤란(困難)에 처해 있었다. 하사관은 자신의 중대원들이 기아상태에 있었으므로 자기 자신의 위안부를 죽여 자신이 인육을 먼저 먹고나서 중대원(中隊員)들에게 대대본부(大隊本部)에서 보낸 고기라고 속여 전중대원(全中隊員)들로 하여금 인육을 먹게하였다. 세계 제 2 차 대전 당시 일본군 주둔부대 내에 약 200,000 명의 한국과 중국의 위안부(慰安婦) 여성들이 강제로 끌려와 일본군의 성적인 노예가 됐다고 중국의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발표되었다. 회구의(繪鳩毅 : 原名石渡毅)는 1913년생(年生)이며 1941 년(年)에 일본군에 입대하여 일본군(日本軍) 제 59 사단(師團), 제 54 여단(旅團), 제 111 대대(大隊)의 기관총(機關銃 : machine gun) 중대(中隊) 군조(軍曹 : 下士官)이었다. 1945년 8 월 소련군(蘇聯軍)에게 투항(投降)한 후 그는 소련(蘇聯) 원동지구(遠東地區)로 송치되었고 1950 년 소련정부(蘇聯政府)에서 회구의를 중국정부(中國政府)로 이송하여 무순전범관리소(撫順戰犯管理所)로 압송되었다. 1956 년 제 3 차 관대면죄시(寬待免罪時)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일본(日本)의 「중국귀환자연락회(中國歸還者聯絡會)」상임위원(常任委員)이 되었고 후에 상임위원장(常任委員長)을 역임하였다. 다음은 회구의(繪鳩毅 : 에바토츠요시)의 진술이다.
<<< 내가 28세 되던해에 장야현(長野縣)의 일개(一個) 중학교(中學校)의 담임교사(擔任教師)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세계 제 2 차 대전이 발발하여 교사직을그만두고 좌창연대(佐倉聯隊)의 신병훈련(新兵訓練) 교육을 받고나서 즉시 중국 산동성(山東省)으로 파송되어 침략전쟁(侵略戰爭)에 참여하였다. 나의 최후 계급은 육군군조(陸軍軍曹 : 下士官)이었다. 내가 산동성(山東省) 색격장(索格庄)에 주둔하고 있을 때 중대(重大)한 전쟁범죄(戰爭犯罪)를 저질렀다. 1945 년 6 월,나의 직접 상관인 대대장(大 隊長)의 명령하(命令下)에 30명의 사병들에게 신병교육훈련(新兵教育訓練)을 시켰는데 내용은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는 훈련인 자살훈현(刺殺訓練)이었다. 그때 살아있는 4 명의 중국포로(中國俘虜)들을 죽인 범죄(犯罪)를 저질렀다. 포로(俘虜) 중 일개(一個) 여인(女人)을 나의 위안부로 삼아 내맘대로 희롱하였다. 산동성 색격장(索格庄)에 장기간 주둔하는 동안에 군량미 식량공급이 두절되어 곤란을 겪고 있을 때 나는 나의 위안부를 죽인 후 그녀의 인육(人肉)을 내가 먼저 먹고나서 중대원(中隊員)들에게 대대본부(大隊本部)에서 보낸 고기라고 속히고 전중대원(全中隊員)들에게 먹였다. 일본군대(日本軍隊)는「해방구(解放區)」와「적점구(敵占區)」에서 중국의 팔로군(八路軍) 전사병(戰士兵)들을 무자비하게 사살했으며 그 지역의 수많은 여성들을 강간(強姦)하였다. 일본군부대(日本軍部隊)가 주둔하는 곳엔 항상 위안소(慰安所)가 설치(設置)되어 있으며 한국여인(韓國女人)과 중국여인(中國女人)들이 일본군의 위안부 역할을 주로 종사하였다. 내가 근무하던 부대(部隊)는 산동성 제남시(濟南市)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군인구락부(軍人俱樂部)」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군인(軍人)들의 일용품(日用品)을 팔면서 동시에 수 많은 위안부(慰安婦)들을 항상 대기시켜 두었다. 내가 색격장(索格庄)에 주둔하고 있을때 적점구(敵占區)에서 체포된 15세의 중국 소년(少年)을 살해했는데 이 소년은 체포되자 마자 나의 발을 붙잡고 “저의 홀어머니는 내가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요.!” 라고 말하며 울면서 나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러나 나는 “나도 나의 부모(父母)가 생존해 있지만 일본군대(日本軍隊)의 상관(上官)의 명령(命令)은 곧 일본천황(日本天皇)의 명령(命令)과 동일하다. 상관(上官)의 명령(命令)에 불복종할 경우 나 자신의 생명(生命)과 바꿔야 하기 때문에 너를 살려줄 수 없구나!“ 고 대답한 후 15세 소년을 사살하였다. 기독교(基督教) 교리(敎里)에「愛你的敵人 :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는데 뜻은 이해하지만 실행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국정부(中國政府)와 중국인민(中國人民)들은 일본전범(日本戰犯)들을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나의 바램이 있다. 나는 침략전쟁(侵略戰爭)의 첨병(尖兵)으로써 중일우호(中日友好)의 선두에 서서 일하다가 죽어야겠다는 신념을 갖고있다. 나는 중국(中國)의 청소년(青少年)과 일본(日本)의 청소년(青少年)들이 우호교왕(友好交往)해 주기를 희망한다. 내가 중국(中國) 무순전범관리소(撫順戰犯管理所)에 갇혀있을 때 나의 사상(思想)은 개조(改造)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나는 우체국장(郵遞局長)을 역임하다가 정년퇴직(停年退職) 후(後) 중국귀환자연락회(中國歸還者聯絡會)의 상임위원(常任委員)이 되었고 후에 상임위원장(常任委員長)을 역임하였다. 나는 무순전범관리소(撫順戰犯管理所)의 정원에 사죄비(謝罪碑)를 건립하였고 나의 과거(過去)의 죄를 사죄(謝罪)함과 동시에 전쟁(戰爭)이 다시는 발발하지 않게 해달라는 서원과 중일우호(中日友好)에 적극 노력(努力)할 것을 서원하는 나의 이념(理念)을 비석(碑石) 위에 새겨두었다.
현재(現在) 일본(日本)은 독립국가(獨立國家)이지만 실제로 미국(美國)의 반식민지(半殖民地)이며 일중우호(日中友好) 관계(關係)는 진정(真正)한 세계평화(世界平和)의 기초(基礎)라고 믿고있다. 나는 일본(日本)이 위기에 처할 경우 중국정부(中國政府)가 원조(援助)의 손길을 펼쳐주기 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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