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桑葚果)의 전설(傳說)——
기원전(紀元前) 205 년(年) 춘하지교절(春夏之交節)에 유방(劉邦)은 56 만(萬)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항우(項羽)의 노소팽성(老巢彭城 : 현재 강소성 서주(徐州))를 공격하기 위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당시 항우(項羽)의 군대는 3 만(萬) 명의 정병(精兵)뿐이었다. 유방은 별이 빛나는 밤에 서주(徐州)를 돌습(突襲) 하였다. 항우(項羽)의 선두 지휘하에 유방(劉邦)의 병사들과 군마(軍馬)들의 시체가 황야에 즐비하게 깔려 있었고 혈류(血流)는 강을 이루었다. 유방을 포함한 10여 명의 패장(敗將)들과 잔병(殘兵)들은 서주(徐州) 밖 10여 km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황상욕(黃桑峪)의 일개 음암(陰暗)한 산굴(山洞) 속에 피신하고 있었다. 산굴 속에서 몇일 피신하고 있는 동안 유방(劉邦)에게 질병이 생겼다. 두통(頭痛)이 극심하였으며 천선지전(天旋地轉: 하늘과 땅이 빙빙돌다)하였고 대변(大便)이 건결(乾結)하였으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때는 성하(盛夏)의 시절이었다. 황상욕(黃桑峪)에는 뽕나무(桑樹)가 밀집되어 있었으며 뽕나무 마다 새까맣게 잘익은 오디(桑葚)가 주렁 주렁 매달려 있었다. 장사병(將士兵)들은 굶주린 배를 오디(桑葚)로 채웠으며 기갈(饑渴)을 면했다. 유방(劉邦) 자신도 오디(桑葚)로 굶주린 배를 채워 기갈을 면했다. 몇일이 지난 후 유방(劉邦)의 두통(頭痛)은 완전 치유되었고 대변(大便)도 통창(通暢)되었으며 혼신(渾身)에 역량(力量)이 충만(充滿)됨을 스스로 느꼈다. 장사병(將士兵)들도 오디를 따먹고 나서 정력(精力)이 충패(充沛)되었으므로 유방(劉邦)은 산굴 속에서 밖으로 나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려 진용(陣容)을 재정비하여 제업(帝業)을 성취하였다. 이때부터 황상욕(黃桑峪)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황산욕는 「황장욕(皇藏峪)」이라고 개명(改名)되었다. 황장욕이란? 황제를 숨겨준 산골짜기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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