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8일 금요일

최치원(崔致远)

최치원(崔致远 : 서기 857 年-서기 951 年)의 자(字)는 고운(孤云)이며 후에 자(字)를 해운(海云)으로 바꾸었다.



신라금성(新罗金城 : 현재 한국경상북도 경주시(庆州市))에서 태어났으며 경주 최씨(庆州崔氏)의 시조(始祖)이다.



서기 869 년 열 두살 때 당(唐) 나라로 유학갔다. 5 년 후인 열 일곱 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进士)에 급제(及第)하였다.



서기 877 년 스무 살 때 선주(宣州 : 상해의 서쪽 270km)의 표수현(溧水县) 위(尉)에 임명되었다. 위(尉) 벼슬은 황제가 임명했다.



그 당시 당 나라내에 12 위(尉)가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사단장 급이다.



최치원은 황소(黄巢)의 난 토벌에 참여하였다. 고병(高騈)이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로 있을 때 최치원에게 명하여 토황소서(討黃巢書)란 격문(檄文)을 쓰게하였다.



토황소격문은 계원필경집 1 권(卷) - 격서(檄書)에 수록되어 있다.



당 나라 때 절도사는 지방군정장관(地方軍政長官)으로써 3 권(權)을 장악한 막강한 권력자였으므로 일개 소왕국(小王國)의 국왕이나 마찬가지였다.



당(唐) 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십국(五代十國)의 건립자(建立者)들의 절대 다수가 절도사들이었다.



그후 서기 881 년에 최치원은 회남절도사(淮南节度使 : 강소성 양주(扬州) 일대)의 종사관에 임명되었다.



서기 884 년(28 세)에 신라(新罗)로 귀국하여 시독(侍读) 겸(兼) 한림학사(翰林学士)를 역임했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郎)과 지서서감(知瑞书监) 등에 임명되었다.



후에 도성(都城)을 떠나 대산군수(大山郡守)와 부성군수(富城郡守)를 역임했다. 그 당시 신라말(新罗末) 혼란기(混乱期)였으므로 그는 관직(官職)을 사임하고 가야산(伽耶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최치원(崔致远)은 수많은 우수한 한시(汉诗)와 문학(文學) 작품(作品)을 펴냈다.



고려(高丽) 현종(显宗) 때 문창후(文昌侯)에 봉해 졌으며 현재 부산(釜山)의 명승지(名胜地) 해운대(海云台)는 최치원의 자(字)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최치원은 수 많은 저서를 집필하였으나 오직 계원필경집(桂苑笔耕集) 20 권(卷) 만 현존하고 있다.



최치원의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 双女坟传记
  • 《讨黄巢檄文》
  • 《四山碑铭》
  • 《鸾郎碑序文》
  • 《时务十余条》

다음은 계원필경집(桂苑笔耕集)의 서문(序文(에수록되어 있는 저작(著作)들인데 분실되었다.

  • 《私试今体赋》五首一卷
  • 《五言七言今体诗》共一百首一卷
  • 《杂诗赋》共三十首一卷
  • 《中山覆蒉集》一部五卷 (任溧水县尉时作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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