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6일 토요일

강유(姜維)와 당귀(當歸)

강유(姜維)와 당귀(當歸)



동한(東漢) 왕조가 멸망한 후 위(魏), 촉(蜀), 오(吳) 삼국(三國)이 정립되었는데 삼국 중 촉(蜀)이 가장약한 나라였다.



서기 234 년(建興 12 년) 제갈량(諸葛亮)의 군대가 오대원(五大原 : 현재 陝西省 郿縣)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제갈량은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제갈량 사후(死後) 촉군(蜀軍)은 강유(姜維 : 서기 202 년 – 서기 264 년)의 통수(統帥)하에 있었고 11 차례 위(魏)를 공격했으나 공적을이루지 못했다.



서기 263 년(景耀 6 년) 사마소(司馬昭 : 서기 211 년 - 서기 265 년 : 司馬炎의 아버지)는 종회(鍾會)와 등애(鄧艾)를 파견하여 촉(蜀)을 침공하였다.



종회(鍾會)는 10 만 군대를 거느리고 등애(鄧艾)는 3 만 군사를 거느리고 음평도(陰平道 : 현재 甘肅省 文縣)을 출발하여 면죽(綿竹 : 현재 四川省 德陽)에서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諸葛瞻)을 살해하고 성도(成都)를 공격 촉(蜀)의 후주(後主) 유선(劉禪 : 서기 223 년 – 서기 263 년)을 투항시켰다. 이로써 촉(蜀)은 위(魏)에 의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 촉(蜀)의 강유(姜維)는 투항하기 싫고 전쟁을 하여 이길 능력도 없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강유(姜維)는 종회(鍾會)에게 붙잡혔고 거짓으로 투항하였다. 그리고 강유는 종회(鍾會)와 등애(鄧艾)와 사마소(司馬昭) 간의 모순을 지켜보며 촉국(蜀國) 재건을 노리고 있었다. 그 이듬 해 서기 264 년 종회(鍾會)는 위를 모반할 계획을 세웠다. 강유(姜維)는 거짓으로 종회(鍾會)와 결합하고 기회를 틈타 촉국(蜀國)을 재건하려 했으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강유는 살해 당하였다. 이때 강유(姜維)의 나이 62 세 였다.



강유가 검각(劍閣 : 현재 四川省 劍閣 : 성도 북쪽 190km)을 수호하고 있을 때 강유(姜維)의 어머니는 남몰래 편지를 써서 강유(姜維)의 불충(不忠)과 불효(不孝)와 불의(不義)를 꾸짖었다.



강유(姜維)는 모친의 편지를 읽어보고 나서 마음이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이리 저리 궁리한 끝에 강유(姜維)는 절묘한 방법을 찾아냈다.



한약의 이름 속에 자신의 포부를 담았다. 강유(姜維)는 두 가지 한약을 선택했다. 한 꾸러미의 원지(遠志)와 또 한 꾸러미의 당귀(當歸)를 어머니에게 보냈다.



강유(姜維)의 어머니는 아들이 보낸 두 개의 한약 꾸러미를 보자 마자 아들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촉국(蜀國)을 재건해 보겠다는 결심이 아들의 가슴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 강유(姜維)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 강유(姜維)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나라를 다시 되찾아야겠다는 구국(救國)의 일념(一念) 뿐이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이상은 한약을 편지 대신 모친에게 부쳐 자신의 뜻을 표현한 유명한 강유(姜維)의 고사(故事)이다.



또 최표(崔豹)의 저서 고금주(古今注)에 보면 ”고인상리이작약(古人相離以芍藥), 상초이문무(相招以文無). 문무일명당귀(文無一名當歸), 작약일명장리고야(芍藥一名將離故也). 유차가견(由此可見), 재고대(在古代), 이별시(離別時), 증지이작약(贈之以芍藥); 상초시(相招時), 기지이당귀(寄之以當歸); 거반시(拒返時), 회지이원지(回之以遠志), 사호이성습관용사(似乎已成習慣用辭).”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고인들은 이별 할 때 작약을 선물로 증여하고 부를 때 문무를 보냈다. 문무는 일명 당귀라고 칭하며 반드시 돌아간다는 뜻이 담겨있고 작약은 이별을 뜻했다. 그래서 고인들은 이별 할 때 작약을 선물하고 부를 때 당귀를 보내고 돌아가기를 거부할 때는 원지로 답했다. 이것은 습관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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