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금요일

장경악의 등창(背瘡) 치료

장경악의 등창(背瘡) 치료

장경악은 젊은 시절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긴칼을 옆에차고 유관(楡關 :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출발하여 봉성(鳳城 : 秦皇島 서쪽 17km 지점)을 통과하여 압록강을 건너 임진왜란에 참전하느라고 조금도 여가를 낼수 없는 바쁜 생활을 하였다.

서기 1613 년 장경악이 50세 되던 해에 첫 아들을 낳았다. 이때 부터 장경악은 더 이상 유랑생활을 접고 집안에 들어앉아 의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서기 1615 년 장경악이 52 세 되던 해 둘째 아들이 탄생되었다.

큰 아들은 여러차례 병치레를 하였다. 장경악은 큰 아들의 병을 치료할 때 마다 병상 기록을 자세하게 해두었다. 아들들이 아플 때 마다 장경악은 열심을 다해서 치료했다.

그러나 속언(俗言)의불자치(醫不自治)” 란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의사는 자기 자신을 치료하지 못한다.” 는 뜻이다. 또 다른 속어엔 자기적도삭줄료자기적도파(自己的刀削不了自己的刀把)” 란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칼로 자기 칼 자루를 깍지 못한다.” 는 뜻이다.

의사 자신과 의사의 가족들이 병들었을 때 의사들의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판단능력을 상실하여 치료가 잘 되지 않는데 의사들이 겪는 큰 시련이다.

장경악의 큰 아들이 두 살 때 뜻밖에 배저(背疽 : 등창)가 생겼다. 배저란? 등에 생기는 악성 종창을 일컫는다. 처음에 큰 아들의 등에 뾰루지가 하나 생겼다. 장경악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며칠 후 종기 근처를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근심점활(根深漸闊), 기대여완(其大如碗)” 이었다. 다시 말하면 종기의 뿌리가 점점 넓어져서 도토리 만 해졌다.” 는 뜻이다.

등창은 밑 뿌리의 크고 작음으로 병세의 경중(輕重)을 짐작할 수 있다. 장경악의 큰 아들의 등창의 밑 뿌리는 컸다.

그러므로 장경악은 놀랬다. 큰 아들은 벌써부터 미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장경악은 고명한 의사였지만 쇼크를 크게 받았으며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50 세의 늙은 나이에 난 늦동이 자식이 병에 걸렸음으로 가슴이 아파서 슬픈 감정 만 앞섰다. 장경악은 명의답지 않게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드디어 장경악은 외과의사를 불렀다. 의사들 마다 발병 원인을 각각 다르게 말했다. 그러나 외과 의사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속히 해독시켜야 된다.” 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한 외과 의사는 한량약(寒凉藥)으로 조성된 해독 처방을 조제하여 장경악의 큰 아들에게 복용시켰다. 한 첩을 복용한 뒤 큰 아들에게 고열이 발생했으며 지칠대로 지쳐서 식욕부진도 생겨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일대(一代) 명의(名醫) 장경악은 자기 아들의 생명에 지장이 초래될 것 같은 의구심 마저 생겨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장경악은 아버지로써 어떻게 해야 될까? 자식의 고통을 옆에서 수수방관 만 하고 아들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인가? 등등 착잡한 심정이었다.

의학 지식이 풍부한 장경악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묵상하며 여러가지 의서(醫書)와 의론(醫論)들을 머리속에 떠 올려 보았다.

갑자기 머리속을 스쳐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다름아닌 금원(金元) 4 대가(大家)의 한 사람 주단계(朱丹溪 : 서기 1281 서기 1358 )였다.

장경악은 본래 주단계의 양상유여(陽常有餘), 음상부족(陰常不足)” 이란 이론에 반대하여 양상부족(陽常不足), 음본무여(陰本無餘)” 라는 의론(醫論)을 제창했었다.

그렇지만 장경악은 주단계의 정확한 논술을 받아들여 부단히 인용했다. 경악전서(景岳全書)에 보면 장경악은 주단계의 의학 이론을 상당히 많은 부분에 인용한 것을 볼수 있다.

장경악은 다음과 같은 주단계의 의학 이론에 눈을 돌렸다.

옹저인적독재장부(癰疽因積毒在臟腑), 당선조위기위주(當先助胃氣爲主), 사근본견고(使根本堅固), 이이행경활혈좌지(而以行經活血佐之).”

다시 말하면 옹저는 장부에 독이 쌓여서 생긴다. 우선 위기를 도와 다스려 근본을 견고하게 해주고 보조 치료로써 행경(行經) 활혈(活血)해 주어라.” 는 뜻이다. 다시 주()에 보면 단견종통(但見腫痛), 참지맥증허약(參之脈證虛弱), 편여자보(便與滋補), 기혈무휴(氣血無虧), 가보종길(可保終吉).”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종통을 진찰할 때 맥증이 허약한가? 잘 살펴 본 후 즉시 자보해 줌으로써 기혈이 충족되면 마침내 만사대길로 마감 짓는다.” 는 뜻이다.

장경악은 이 대목을 읽고나서 마음이 좀 놓이고 안정을 되찾았다.

이윽고 장경악은 사사이료(謝謝爾了), 단계전배(丹溪前輩)!” 라고 크게 웨쳤다.

다시 말하면 단계 선배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는 뜻이다.

이제부터 장경악의 심신(心神)은 안정되었으며 시야가 넓어져서 자기 큰 아들을 하나의 보통 환자와 똑같이 볼수 있었으며 제대로 병정을 분석할 수 있는 눈이 뜨였다.

큰 아들의 병정 분석 결과 장경악은 큰 아들의 병정을 허한증(虛寒證)” 이라고 진단했다. 인체의 정기(正氣) 면에서 관찰할 때 정기부족(正氣不足)이었다. 그러므로 병독을 체외로 제거시킬 수 없었다.

장경악은 우선 인삼과 부자와 당귀와 숙지와 자감초와 육계로 조방한 처방전을 만들었다. 온보(溫補)해 주는 약과 활혈양혈(活血養血)해 주는 당귀를 썼다.

당귀는 피를 필요로 하는 인체의 각 장부에 피를 보내줌으로 당귀(當歸)란 이름을 얻었다. 당귀는 당귀두와 당귀미와 당귀신과 전당귀와 당귀횡수(當歸橫須)로 분류되며 각각 약효가 조금씩 다르다.

당귀두와 당귀미는 활혈, 파혈(破血) 작용이 있으므로 화어(化瘀)해 주는 약으로 사용된다. 당귀신은 보혈양혈 작용은 강하나 화어 작용은 약하다.

전당귀(全當歸)는 활혈과 양혈 작용이 있으며 그냥 당귀라고 말할 때는 전당귀를 일컫는다.

당귀횡수(當歸橫須)는 활혈통락해 주는 작용이 있다. 그러므로 병사가 맥락으로 들어갔을 때 당귀횡수를 사용한다.

서기 1625 년에 본초경소(本草經疏)를 저술한 명 나라 때 명의 무희옹(繆希雍 : 서기 1556 서기 1627 )은 당귀횡수 사용에 특출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요즘 약방에 가서 보면 당귀를 분류해서 사용하지 않고 한 가지 당귀 만 사용하고 있는데 한약문화 역시 시대에 따라 변천해 간다는 것을 알수 있다.

장경악의 큰 아들은 장경악이 조방한 약을 한 첩 복용하고 나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두 첩을 복용한 후 종전과 같이 정신이 맑아졌다.

장경악은 큰 아들에게 모두 열 첩을 복용시켰다. 그 결과 등창 속에 고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큰 아들의 정기가 부족할 때는 등창 속에 고름이 들어있지 않았으며 등창의 색깔도 변하지 않했었다. 장경악은 침을 사용하여 등창 속에서 고름을 빼냈다. 그후 1 개월 동안 조리하여 큰 아들의 병을 치유하였다.

큰 아들의 병을 치유한 후 장경악은 환자들의 질병을 진단할 때 맨 먼저 음양을 구분하였다. 그 다음 정기와 사기에 관심을 두고 정기허(正氣虛)에 집중했다. 장경악은 정기허의 상태를 음증(陰症)” 이라고 칭했다. 이때 사기는 아직 발작하지 않은 상태임으로 부정치료(扶正治療 : 인체내의 면역력 증강)가 필수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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