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6일 수요일

사원자(沙苑子)의 민간전설(民間传说)

사원자(沙苑子)의 민간전설(民間传说) ​백질려(白蒺藜)는 사원자(沙苑子)라고 칭한다. 당(唐) 나라 현종(玄宗 : 712-756) 이융기(李隆基) 재위(在位) 때 현종의 딸을 영락공주(永乐公主)에 봉했다. 이름은 영락(永乐)인데 태어나서 부터 14, 15 세 될때 까지 계속 울면서 자랐다. 안락(安乐)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신체는 비쩍 말랐고 얼굴 색깔은 누렇게 떠 있었으며 걸핏하면 병(病)에 걸렸다. 이융기(李隆基)는 천자(天子)는 귀히 여겼으나 딸들의 병에 관하여는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다. 여러 명의(名医)들을 불러 치료해 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귀중(贵重)한 약(药)을 지어 복용시켰으나 별로 효험이 없었다. 영락공주(永乐公主)가 15 살 때 안사지란(安史之乱)이 발발하여 이융기(李隆基)는 양귀비(杨贵妃)를 데리고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황급히 도망갔다. 난리 중에 황가족(皇家族)들은 뿔뿔이 헤어졌으므로 영락공주(永乐公主)는 오늘 날 섬서성(陕西省) 사원(沙苑) 일대(一带)로 피난을 갔다. 그 당시 사원(沙苑)에 동방진인(东方真人)이라고 불리는 70세가 넘은 유향도사(游乡道士)가 살고 있었는데 학발동안(鹤发童颜)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신은 또렸했다. 동방진인 도사는 영락공주(永乐公主)와 함게 생활하게 되었다. 공주(公主)는 민간인(民间人)이 되었으므로 궁금예법(宫禁礼法)의 속박(束缚)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매일 동방진인 도사는 영락공주(永乐公主)의 외로움을 풀어주기 위해서 영락공주(永乐公主)와 인근 소녀(少女)들을 데리고 야외(野外)로 놀러 다니고 대로는 야산에 가서 과일도 따고 백사장(沙滩)에 나가 백질려(白蒺藜)도 채집하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동방진인(东方真人) 도사가 약용(药用)하고 남은 백질려로 차(茶)를 끓여 마셨다. 그럭 저럭 3 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영락공주(永乐公主)의 노랑색깔의 두 손은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또 누렇게 말라 시들었던 머리카락은 모두 검정 색깔로 변했다. 또 뼈만 앙상하던 얼굴도 살이쪄서 둥그스름 해졌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크나 큰 눈은 영락공주(永乐公主)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해주었으므로 종전과 달리 딴 여인 처럼 보였다. 후에 관군(官军)들이 장안(长安)을 수복 한 후 조정(朝廷)에서 영락공주(永乐公主)를 찾아 들이라고 어명을 내렸다. 영락공주(永乐公主)는 눈물을 흘리며 동방진인(东方真人) 도사와 고별(告别)하였다. 장안(长安)으로 돌아가는 영락공주(永乐公主)에게 동방진인은 한 개의 호로(葫芦)를 영락공주(永乐公主)에게 선물로 주면서 백질려(白蒺藜)를 채집하러 다니던 추억을 되새기며 장식품으로 몸에 걸고 다니라고 말했다. 영락공주(永乐公主)는 조정으로 돌와서도 매일 3 알 내지 5 알(粒)의 백질려로 차(茶)를 끓여 복용하였다. 영락공주(永乐公主)가 장안(长安)으로 돌아와 보니 현종(玄宗)은 이미 퇴위(退位)하였고 그 대신 영락공주(永乐公主)의 오빠 숙종(肃宗:756-762)이 즉위하였다. 영락공주(永乐公主)는 오빠에게 백질려(白蒺藜)를 선물로 드리며 백질려의 약효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숙종(肃宗)은 여동생의 말을 듣고나서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반달(半月) 동안 복용하였다. 과연 기분이 상쾌해 지며 이목(耳目)이 총명해 지고 정신(精神)이 맑아짐을 스스로 느꼈다. 그리고 숙종은 어릴 때 자신의 여동생 영락공주(永乐公主)의 모습을 상기해 보았다. 숙종은 백질려를 찬상(赞赏)하였으며 봉상현(凤翔县)에 매년(每年)사원자(沙苑子)를 공헌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백사장(沙滩)에서 버림 받아오던 야초(野草)가 하나의 명약(名药)으로 급변하였다. 숙종의 명령으로 백질려(白蒺藜)는 사원자(沙苑子)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봉상현(凤翔县)은 현재 섬서성 보계시(寶鷄市) 관할 현이다. 진(秦) 나라 목공(穆公)의 딸 농옥(弄玉) 공주는 피리를 불기 좋아하였다. 농옥 공주가 피리를 불면 화산(華山)에서 봉황(鳳凰) 새가 날아 왔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에 봉상현(凤翔县)이란 이름을 얻었다. 당 나라 이전에 봉상현(凤翔县)은 옹주(雍州)라고 불리었다. 봉상현(凤翔县)은 중국 불교 문화의 성지(聖地) 중 하나라로 꼽히고 있으며 수(隋) 나라 때 불교가 봉상현(凤翔县)으로 전입되어 당(唐) 나라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다음은원문(原文)이다 人物傳說 : 唐玄宗的女兒永樂公主 相傳,唐玄宗的女兒永樂公主,名雖爲永樂,可從生下到十四五歲,一直啼哭,沒有安樂過一天。身子長得又瘦又小,面黄發焦,動不動就生病。李隆基貴爲天子,對女兒的病卻毫無辦法,請了多少名醫,吃了多少貴重藥,仍無濟於事 不久,發生了安史之亂,李隆基帶上楊貴妃倉惶出逃。永樂公主在亂軍中與皇家失散,被貼身奶娘帶到今日陝西沙苑一帶。當時沙苑住着一位游鄉道士,名叫東方真人,雖年過七十,卻生得鶴發童顏,精神矍鑠。了解到公主的身世後,東方真人收留了她們。因怕公主寂寞,還讓公主和她的小女兒長壽生活在一起。公主到了民間,再不受什麼宮禁禮法束縛,整天隨少女們在野外游逛,或到山坡上去摘野果,或到沙灘上找白蒺藜。采來的白蒺藜除交東方真人作藥用外,剩下的都供自己當茶喝。日子過得飛快,不覺三年過去了。公主幹黄的雙手變得紅粉粉、胖乎乎的,焦枯的頭髮猶如墨染了一般,原來黑澀的刀條臉也變得又圓又胖,襯上一對水汪汪的大眼睛,漂亮極了,簡直就像換了個人。 後來,官軍收複了長安,朝廷詔令天下,尋覓永樂公主。公主見到文告,揮淚與東方真人告别。臨走時,東方真人送給公主一個葫蘆,告訴她里邊裝的就是她平日采來白蒺藜,讓她帶回去,每日取三五粒泡茶喝,可永保身強體健。公主回到長安時,玄宗已退位,由她的哥哥肅宗當政。公主謝過皇兄重封,將藥物呈上,並詳細地說了白蒺藜的妙用。肅宗聽後,將信將疑,一連試用了半月,果覺神清氣爽,耳聰目明,精神倍增,又想起禦妹小時候的樣子,不禁對此藥大加讚賞,令鳳翔縣每年進貢沙苑子入宮。從此這種沙灘上的野草,變成了一味名藥。由於皇上下旨,將白蒺藜稱做沙苑子,此藥也因此得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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