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7일 목요일

유수(劉秀)의 애정(愛情) 고사(故事)

유수(劉秀)의 애정(愛情) 고사(故事) ​다음은 사람을 감동시킨 슬픈 「황제애정(皇帝愛情)」고사(故事)이다. 원전(紀元前) 6 년(年) 유방(劉邦)의 제 9 대손(第九代孫)이 출생하자 마자 텃밭에서 한 줄기가 돋아 나오더니 한 줄기에서 9 개의 이삭이 나왔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유수(劉秀)라고 지었다. 소를 먹이고 밭을 갈던 당년 20 세의 유수(劉秀)는 11 세(歲)의 농촌(農村) 소녀(少女) 음려화(陰麗華)를 만났다. 그후로 부터 유수는 암암리에 ”내가 임금이 되어서도 음려화를 아내로 마지 할 것이다.”고 스스로 맹세하였다. 음려화(陰麗華)가 19 세(歲)될 때 까지 8 년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쉬운 일은 아니었다. 음려화가 19 세가 되었을 때 유수는 예를 갖추어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 부부가 되었다. 그 당시 유수(劉秀)는 일개(一個) 농민(農民) 기의군(起義軍)의 소두목(小頭目)이었다. 유수의 큰 형은 토황제(土皇帝)의 의심을 받고 살해당하였지만 슬퍼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생존을 위하여 토황제(土皇帝)와 진황제(真皇帝)와 여러 기의군(起義軍)에 가담하였다. 한편 유수(劉秀)는 자기 부인을 처가집으로 돌려 보냈다. 일차(一次) 공성전(攻城戰) 후 운태(雲台) 28 장(將)의 하나인 장령(將領) 유식(劉植: ? - 26 년)은 유수에게 곽성통(郭聖通)을 부인으로 맞이하던지 아니면 하북(河北)에 주둔하고 있는 10여 만 대군의 유양(劉揚)과 싸움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다. 유수(劉秀)는 할수없어 미려고귀(美麗高貴)한 곽성통(郭聖通)과 결혼하였다. 얼마 후에 큰 아들 유강(劉強)이 출생하였다. 곽성통(? - 52 년)은 유양(劉揚)의 외질녀(外姪女)였다. 그후 3 년이 지나고 나서 유수(劉秀)는 황제(皇帝)의 보좌(寶座)에 앉게되었다. 유수는 첫 부인 음려화(陰麗華)를 옆에 두고 싶어하였다. 유수(劉秀)는 유식(劉植)에게 죄를 씌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수는 음려화와 곽성통을 함께 귀인(貴人)에 봉했다. 고대에 정처(正妻)와 첩(妾)의 신분엔 큰 차이가 있었다. 첩(妾)은 하인(僕人)이나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으며 밖에서 정처(正妻)를 만날 경우 첩은 즉시 정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어야만 했다. 후에 유식(劉植)은 간신(奸臣)들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수는 반란을 평정한 후 음려화(陰麗華)를 황후(皇后)로 봉하였다. 그러나 음려화(陰麗華)는 황후의 자리를 거절하였다. 음려화는 유수에게 ’소생은 지난 3 년 동안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유강(劉強)은 유수(劉秀)의 자식임으로 황후(皇后)는 내가 아니고 곽성통(郭聖通)입니다.’고 말했다. 유수(劉秀)는 음려화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유수는 음려화의 형제(兄弟)들에게 벼슬을 주려했으나 음려화(陰麗華)는 음씨 집안 사람들은 보통 농민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마저도 거절하였다. 음려화는 그후 부터 황제가 전쟁터에 나갈 때도 함께 따라 다니며 생활하였기 때문에 큰 아들 유장(劉莊)을 비롯하여 5 명의 자식을 낳았다. 후에 음려화의 모친(母親)과 전가족(全家族)은 악당들에 의하여 모두 살해를 당했다. 유수(劉秀)는 홀로 살아남은 음려화에 대하여 미안한 감을 금치 못했다. 유수는 후에 양후실정「讓後實情」에 관한 조서(詔書)를 내렸다. 곽황후(郭皇后)는 시기(猜忌)를 부리며 황제(皇帝) 면전(面前)에서 크게 화를 냈다. 어느 날 유수는 참지 못하고 곽성통(郭聖通)을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시켜 버리고 음려화(陰麗華)를 황후의 자리에 앉혔다. 음황후(陰皇后)는 곽성통이 폐위된 후에도 유강(劉強) 태자(太子)를 사랑하였다. 태자(太子) 유강(劉強)은 자신이 유장의 형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유장(劉莊)이 왕위를 물려 받아야 한다고 반복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유장(劉莊)이 동한(東漢)의 제 2 대왕 한명제(漢明帝: 58 - 75)가 되었다. 62 세(歲) 때 음려화(陰麗華)는 세상을 떠났으며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원능(原陵)에 합장(合葬)되었다. 10 년후 유장(劉莊)은 꿈속에서 부친(父親) 유수와 모친(母親) 음려화가 묘 주위를 산책하며 사랑스럽게 거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난 한명제의 그 당시 나이는 50 세였다. 한명제(漢明帝)는 문무백관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제전(祭殿) 양변(兩邊)에 28 수(樹)의 측백나무(柏樹)를 심으라고 어명을 내렸다. 2 천여 년이 지난 현재 하남성(河南省) 맹진현(孟津縣) 백합향(白合鄕) 철사촌(鐵謝村)에 있는 원능(原陵)에 가서 보면 유수(劉秀)와 음려화(陰麗華)가 서로 손을 마주잡고 서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다음은 원문이다. " 劉秀的愛情故事 : 公元前6年,劉邦第九代旁系孫子出生了,田間出現了一莖九穗,於是孩子被取名劉秀。安心放牛種田的劉秀20歲那年見到了11歲的農村美少女陰麗華,從不對女色感興趣的他暗暗發誓:「做官當做執金吾(皇帝),娶妻當娶陰麗華。」好不容易等到她長到19歲,兩人拜堂成親。不過那時的劉秀還只是一個農民起義軍的小頭目,他的哥哥被土皇帝猜疑殺死也沒敢公開哭一聲。為了在土皇帝、真皇帝和各路起義軍中謀求生存,劉秀把新婚妻子送回了娘家。 后來在一次重大攻城戰中,對方將領劉植提出:要麼劉秀娶其侄女郭聖通為妻,要麼就來一場十幾萬兵馬的混戰。劉秀無力打仗,只好被迫和美麗高貴的郭聖通再拜天地,不久生下了他的第一個兒子劉強。 三年後劉秀拿下皇帝寶座,並把心愛的陰麗華接到了身邊。不過那時的劉秀還不敢得罪劉植,於是他空著皇后位置,把兩個女人都封為了貴人。古時的正妻與妾的身份差距很大,妾只相當於僕人,每次見正妻都要下跪行禮的。 後來劉植造反,劉秀平定奸臣後,終於可以理直氣壯的立陰麗華為皇后了,不過陰麗華卻拒絕。她說,過去三年最後悔的是未能給丈夫留下一絲血脈,如今一看到劉強,她就愛上了這個孩子,因為他是劉秀的孩子。從孩子角度想,應該當皇后的不是自己,而是郭聖通。劉秀很感動,要加封陰家兄弟為官,陰麗華也拒絕了,說他們未能為國出力,於是陰家依然是個普通農家。後來陰貴人陪皇帝外出打仗,一口氣為他生下了劉莊等五個兒子,不過太子還是劉強。 不久陰貴人的母親和全家被一夥歹徒殺光了,面對哭得死去活來的她,劉秀非常內疚,下詔書追封陰家,不料這份導出「讓後實情」的詔書,引起郭皇后的猜忌,從此郭皇后在皇帝面前也大發脾氣。多年後終於有一天皇帝忍不住了,將郭聖通貶為廢後,立陰麗華為皇后。陰皇后依舊處處關照和愛護廢後及其太子,劉秀也大大加封郭家以慰其心,不過太子劉強自認為自己比不上劉莊,主動提出讓位,反覆多年後,劉莊終於成為了漢明帝。 62歲時陰麗華去世,與光武帝劉秀合葬於原陵。十年後劉莊還夢見父親和母親在陵畔漫步,恩愛之情一如自己從小就看熟的景象。醒來後五十歲的漢明帝當著文武百官的面哭得死去活來,並在祭殿兩邊種下二十八棵柏樹。兩千年過去了,原陵仍然屹立,劉秀與陰麗華相攜相伴的身影彷彿還清晰可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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