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굉(朱肱 : 서기 1068 년 - 서기 1165 년)의 자(字)는 익중(翼中)이고 호(號)는 무구자(無求子)이다.
송(宋) 나라 때 오흥(吳興 : 현재 湖州(杭州 북쪽 70km 지점))에서 태어났다. 휘종(徽宗) 때 봉의랑의학박사(奉議郞醫學博士)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굉을 주봉의(朱奉議)라고도 불렀다.
송철종(哲宗) 원우(元祐) 3 년(서기 1088 년)에 과거 시험에 합격한 진사(進士)이다. 역대 유의(儒醫) 중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주굉(朱肱)은 송대(宋代) 이전 까지의 상한론 연구학자들 중 첫째로 꼽는 대가(大家)였다. 물론 손사막(孫思邈)과 왕숙화(王叔和)와 임억(林億) 등 훌륭한 학자들이 상한론을 주석하거나 교정하였으나 오직 주굉(朱肱)은 어느 누구 보다도 숨은 뜻을 명백하게 설명하고 미비한 점을 보충하였다.
주굉(朱肱)은 서기 1089 년 부터 서기 1108 년 까지 20 년에 걸쳐 상한백문(傷寒百問) 3 권(卷)을 저술하였다. 유전(流傳) 과정 중 일부분이 분실되었는데 대관(大觀) 5 년(서기 1112 년)에 항주서호(杭州西湖)의 무이(武夷)에 살고 있던 주굉(朱肱)의 친구 장장(張藏)이 수정증보(修訂增補)하여 남양활인서(南陽活人書) 20 권(卷)을 편찬하였다. 실제로 상한백문을 남양활인서로 개명한 것이다.
주굉(朱肱)의 친구 장장은 화타(華佗)가 장중경(張仲景)을 칭찬한 ”활인(活人)” 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주굉(朱肱)의 저서 상한백문을 남양활인서라고 개칭했다.
장중경(張仲景)이 상한론(傷寒論)을 편찬한 후 화타는 ”차진활인서야(此眞活人書也)” 라고 찬탄하였다. 다시 말하면 ”상한론 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책이다.” 는 뜻이다.
진(晉) 나라 때 부터 송(宋) 나라 때 까지 약 800 여년 동안 상한론을 연구하여 저술된 책은 일 백여 종(種)이나 된다.
주굉(朱肱)은 ”치상한선수식경락(治傷寒先須識經絡), 불식경락(不識經絡), 부지사기지소재(不知邪氣之所在)” 라고 남양활인서에 강조해 놓았다.
다시 말하면 ”상한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먼저 경락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경락을 모르면 사기가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는 뜻이다.
청(淸) 나라 때 의학가 서영태(徐靈胎)는 의학원류론(醫學源流論)에 ”송인지서(宋人之書), 능발명상한론(能發明傷寒論), 사인유소집지이이효(使人有所執持而易曉), 대유공어중경자(大有功於仲景者), 활인서위제일(活人書爲第一).” 이라고 활인서(活人書)를 평했다.
다시 말하면 ”상한론에 관하여 송 나라 사람이 저술한 책이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장중경에 대하여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책은 활인서이다.” 는 뜻이다.
주굉(朱肱)은 남양활인서(南陽活人書) 20 권(卷) 외에 북산주경(北山酒經) 3 권(卷)과 내외이경도(內外二景圖)를 저술했다.
내외이경도 중 내경론(內境論)에 보면 ”신수유이(腎雖有二), 기일왈명문여제상대(其一曰命門與臍相對)”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신은 두 개가 있지만 하나는 명문(命門)이고 다른 하나는 배꼽과 상대된다.” 는 뜻이다. 명 나라 때 손일규(孫一奎)는 주굉(朱肱)의 두 개의 신(腎) 중 하나가 명문이다는 기초 위에 명문이론(命門理論)을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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