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5일 수요일

허숙미(許叔微)

허숙미(許叔微)의 자()는 지가(知可)이고 호()는 근천(近泉)이다. 북송 원풍(元豊) 3 (서기1080 )에 진주(眞州 : 현재 江蘇省 儀征 : 남경의 북동쪽 45km 지점) 백사(白沙)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허숙미가 열 한 살 되던 원안(元按) 5 (서기 1090 )에 부친은 역병에 걸려 죽었고 그해 모친 또한 중병에 걸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100 일 만에 모친도 돌아가셨다. 양친 부모가 돌아가신 것에 큰 자극을 받아 후에 허숙미가 의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허숙미는 한편으로는 의학을 연마하였다.

남송 건염(建炎) 원년(서기 1127 ) 진주에 역병이 나돌았다. 허숙미는 백성들의 질병 치료에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환자들의 10 8, 9는 허숙미의 치료를 받고 치유되었다.

허숙미는 소흥(紹興) 2 (서기 1132 )에 진사(進士)에 합격한 후 휘주(徽州), 항주(杭州)부학교수(府學敎授) 및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했다. 그래서 허숙미는 허학사(許學士)란 칭호를 얻었다.


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허숙미는 후에 상주(常州 : 남경 동쪽 111km 지점)로 옮겨 생활했고 또 얼마 후에는 태호(太湖) 마적산(馬迹山)으로 이주하여 살며 행의(行醫)하였다.

항금(抗金) 명장(名將) 한세충(韓世忠)과 긴밀한 사이였다. 악비(岳飛)의 피해를 입고 한세충은 소주(蘇州)로 내려가 생활하였다. 한세충은 배를 타고 태호를 건너 허숙미를 만나 나라를 걱정하며 시국을 논했다.

허숙미는 송 나라 때 상한론을 연구한 대가(大家)였다. 허숙미는 상한론의 변증시치(辨證施治) 이론을 보충 설명했다.

허숙미의 학술사상 중 비신(脾腎) 관계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는 신시일신지근저(腎是一身之根抵), 비위내생사지소계(脾胃乃生死之所系), 이자지중우당이신위주(二者之中又當以腎爲主), 보비상수난보신기(補脾常須暖補腎氣)”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신은 일신의 근본이며 비위는 생사와 관련되어 있다. ()와 신() 중 마땅히 신()이 주()가 되어야 하며 비()  () 할 때는 항시 신기를 따뜻하게 보해 주어야 한다.” 는 뜻이다.

이와 같은 비()와 신()의 관계에 대한 허숙미의 견해는 후세 의가에서 비신 관계의 연구와 임상응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허숙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본사방(本事方 : 類證普濟本事方) 10 ()과 속본사방 10 권은 모두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또 상한백증가 5 권과 상한발미론 2 권과 상한구십론과 치법(治法)과 변증(辨證)과 익상한론과 중경맥법삼십육도(仲景脈法三十六圖) 등이 있다.

상한백증가는 장중경의 방론(方論) 100 ()을 노래로 편성하여 후세 의가에서 기억하기 쉽게 만들었다. 허숙미는 소흥(紹興) 24 년에 향년 74 세로 세상을 마쳤으며 시신은 마적산 단계촌(檀溪村) 동록(東麓)에 안장되었다. 특히 보제본사방은 허숙미의 역작이다. 내용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실용 가치가 크기 때문에 오늘 날 까지 의학계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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