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과 위징(魏徵)
당(唐) 나라 제 2 대왕 태종(太宗 : 서기 626 년 –서기 649 년)의 연호(年號)는 정관(貞觀)이다. 중국 봉건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운 시기 중 하나이기 때문에 사가(史家)들은 정관지치(貞觀之治)라고 당태종의 정치 공적을 찬양하고 있다.
특히 당태종(唐太宗)의 명재상(名宰相) 위징이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태종(唐太宗) 때 사회가 안정되고 농업 생산량이 증가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개선되어 유족한 생활을 하게되었다.
당태종(唐太宗)은 대신(大臣)들의 건의에 의하여 봉선태산(封禪泰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봉선태산(封禪泰山)은 고대로 부터 제왕들이 왕에 등극된 후 태산(泰山)에 올라가 천제(天帝)에게 제사 지내는 큰 예의(禮儀)이었다. 봉선태산(封禪泰山)의 행사 규모가 크기 때문에 경비가 막대하다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관(貞觀) 5 년(서기 631 년)에 여러 대신들이 태종(太宗)에게 봉선태산을 요구했다. 그러나 태종(太宗)은 거절하였다. 정관(貞觀) 6 년(서기 632 년)에 또 다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당태종(唐太宗)에게 봉선태산(封禪泰山)을 요구하였다.
단지 직간(直諫)하는 신하 간신(諫臣) 위징(魏徵) 만 백성들의 피땀으로 이루어 놓은 국고를 낭비하는 처사임과 동시에 시기상조라고 극구 반대하였다.
그래서 당태종(唐太宗)은 위징에게 ”대가도요구아거봉선태산(大家都要求我去封禪泰山), 지유니인위불행(只有你認爲不行), 시부시인위아공로불구고(是不是認爲我功勞不够高)?”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 더러 봉선태산을 실행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너 혼자 만 어째서 나의 봉선태산을 반대하느냐? 나의 공로가 높지 못하여 그러느냐?” 는 뜻이다.
위징답왈(魏徵答曰) ”구고료(够高了).” 다시 말하면 ”폐하의 공로는 지고(至高)합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덕행불후(是德行不厚)?” 다시 말하면 ”그럼 나의 덕행이 모자란단 말인가?” 는 뜻이다.
위징(魏徵) : ”흔후료(很厚了)” 다시 말하면 ”아닙니다. 짐의 덕행도 후합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국가불안정(是國家不安定)?” 다시 말하면 ”그럼 국가가 불안정하다는 말인가?” 는 뜻이다.
위징(魏徵) : ”이경안정료(已經安定了).” 다시 말하면 ”아니오. 국가도 이미 안정상태에 있습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사방만이융적환몰신복(是四方蠻夷戎狄還沒臣服)?” 다시 말하면 ”사방에 있는 주변 국가의 민족들이 굴복해서 신하의 예절로 우리 나라를 섬기지 않느냐?” 는 뜻이다.
위징(魏徵) : ”신복료(臣服了)” 다시 말하면 ”아닙니다. 신복(臣服)합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년성불풍수(是年成不豊收)” 다시 말하면 ”매년 풍작을 이루지 못했느냐?” 는 뜻이다.
위징(魏徵) : “연성흔호(年成很好)” 다시 말하면 ”아닙니다. 매년 풍작을 이루었습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나마시부서부도(那麽是符瑞不到)?” 다시 말하면 ”상서로운 징조가 없느냐?” 는 뜻이다.
위징(魏徵) : ”부서야도료(符瑞也到了)” 다시 말하면 ”상서로운 징조가 있습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저육개조건도구비료(這六個條件都具備了), 나아위즘마불능봉선태산니(那我爲怎麽不能封禪泰山呢)?”
다시 말하면 ”이상 여섯 개의 구비조건을 모두 충족시켰는데 어째서 나 더러 봉선태산을 아직 실행하지 말라고 권유 하느냐?” 는 뜻이다.
위징간절지설(魏徵懇切地說) ”폐하(陛下), 아상급이타개비방(我想給您打個比方). 가여설(假如說), 유개인득료일장대병(有個人得了一場大病), 십년와상불기(十年臥床不起), 현재경과정심치료복원료(現在經過精心治療復原了), 축점회복정상(逐漸恢復正常). 취재저개시후(就在這個時候), 양저인배상일석미(讓這人背上一石米), 일천주상일백리지(一天走上一百里地), 나타수둑료마(那他受得了吗)? 수말동란부지십년(隋末動亂不止十年), 국가초보안정(國家初步安定), 상란환몰유득도완전치리(喪亂還沒有得到完全治理), 국가백성불능설완전부유료(國家百姓不能說完全富裕了). 저시봉선태산(這時封禪泰山), 향상창선유아문대당적사업이경고성(向上蒼宣喩我們大唐的事業已經告成), 신인위공파부도시후파(臣認爲恐怕不到時候吧)?”
다시 말하면 ”위징(魏徵)은 다음과 같이 폐하께 간절히 말했다. 폐하! 소인이 생각하고 있는 비슷한 예를 하나 들어 올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차례 큰 병에 걸렸습니다. 10 년 동안 병석에 누어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가정 합시다. 성심성의껏 치료한 결과 이제 겨우 신체가 점점 회복되어 거의 정상상태로 되돌아 왔다고 합시다. 이때 이 사람이 등에 쌀 한 섬(石)을 짊어지고 하루에 100 리(里) 길을 걸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의 건강이 어떠하겠습니까? 수말(隋末) 농민(農民) 대기의(大起義)는 동한말(東漢末) 황건기의(黃巾起義) 이래로 가장 큰 농민들의 봉기(蜂起) 아닙니까? 왜냐하면 수(隋) 나라 말기(末期) 농민봉기(農民蜂起)에 참가한 농민의 숫자가 수 백만 명을 헤아리며 장장 10여 년 동안은 동란 아니었습니까? 이제 수말동란(隋末動亂)이 멈춘지 겨우 10여 년을 경과했습니다. 이제 대당(大唐)은 초보적인 안정 단계에 처해 있으며 재난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국가와 백성들이 아직 완전히 부유해진 것은 아닙니다. 차제에 봉선태산을 실행하여 상제(上帝)에게 우리 대당(大唐)의 사업의 완성을 벌써 부터 알린다는 것에 대하여 소신은 두려워하는 바이며 아직 봉선태산의 때가 이르지 않했다고 여깁니다.” 는 뜻이다.
위징(魏徵)은 정확한 비유를 들어 성실하고 간절한 언사를 사용해서 충정(忠貞)이 철철 흘러 넘치는 말씨로 직언(直言)했는데 직언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거북스러움을 피하고 태종의 안색을 살펴가며 말했다.
당태종(唐太宗)은 위징(魏徵)에게 반박할 말이 없었으며 즉시 봉선태산(封禪泰山)의 시기를 연기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自尊心)과 허영심(虛榮心)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남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아 시정하려고 하거나 비난하거나 규탄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결과를 한 번 더 생각해 봐야한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의 역반심리(逆反心理)가 나타나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그러나 각종 수단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암시 효과를 나타낼 수 있게 해 줄 경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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