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3일 월요일

장경악의 변비 치료

장경악의 변비 치료.

낙엽귀근(落葉歸根)이란 중국 사람들의 전통에 따라 장경악 역시 58세 되던 해에 전 가족을 데리고 북경을 떠나 고향인 절강성 소흥으로 돌아왔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란?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 는 뜻인데 사람은 객지에 살다가 끝내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중국인들의 전통을 말한다. 북경의 오염된 공기와 복잡한 환경을 떠나 장경악은 산수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흥(紹興)의 풍경은 그림같다. 육유(陸游)는 소흥(紹興)을 침원(沈園)이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하면 소흥(紹興)은 물속에 잠겨있는 아름다운 동산이다.” 는 뜻이다. 또 왕희지(王羲之)쇄과필적아지(過筆的鵝池), 벽수수죽(碧水脩竹), 간직시인간천당(簡直是人間天堂)” 이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하면 붓을 헹구어 낸 아지와 청록색의 푸른 물과 푸르고 길게 잘 자란 대나무 밭들은 그야말로  천국과 같이 아름답고 행복한 낙원이 아니고 무엇 이겠는가?” 란 뜻이다. 아지란? 왕희지가 거위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거위를 기르던 못이다. 장경악은 고향에 돌아와 한편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또 한편으로는 책을 쓰기 시작하여 마침내 서기 1624 년에 유경(類經)을 펴냈다. 그후 장경악은 계속 의서 편찬에 심혈을 경주하여 경악전서(景岳全書)를 쓰기 시작했다. 경악전서(景岳全書) 속에는 일 백만 자의 글자가 수록되어 있다. 경악전서(景岳全書)는 실로 장경악의 생명과 바꾼 의서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한의학 이론 중 대부분의 훌륭한 내용들은 장경악의 치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다. 장경악이 어떤 방식으로 논술을 전개해 나갔는지 아래에 간단히 예를들어 설명한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변비도 장경악은 자신의 임상 경험에 의하여 수 많은 환자들이 변비로 고생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깊이 연구하였다. 경악전서(景岳全書) 34 () 천집(天集)에 보면 비결(秘結)”이라는 병이 논술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변비이다. 첫째 장경악은 황제내경의 이론을 전개했으며 이 부분을 장경악은 경의(經義)라고 칭했다. 둘째 장경악은 자기 자신의 논술을 펼쳤다. 이 부분을 장경악은 논증(論證)이라고 칭했다. 고인들은 변비를 허비(虛秘), 풍비(風秘), 기비(氣秘), 열비(熱秘), 한비(寒秘), 습비(濕秘)로 구분하였다. 번잡하기 이를데 없으며 변비 종류 만 헤아려 보는데도 반나절은 걸린다. 그런데 변비를 양결(陽結)과 음결(陰結) 두 가지로 분류해 놓으면 더욱 간단하며 변증시 착오가 발생할 확률도 훨씬 적어진다. 셋째 논치(論治)인데 이 부분에서 장경악은 음양 두 개 부분으로 분류하는 방법을 상세히 논술해 놓았다. 넷째 술고(述古)인데 이 부분에서 장경악은 고대 의가에서 논술해 놓은 의학 이론을 좌담하는 형식으로 상세히 분석해 놓았다. 예를 들면 이동원(李東垣)과 주단계(朱丹溪)와 설립재(薛立齋) 등의 이론들을 분석했다. 좌담한 후 자기 자신의 병례를 상세하게 수록해 놓았다. 다음은 양결과 음결의 병례이다. 한 젊은이가 술을 많이 마신다. 그것도 황주(黃酒)가 아니고 화주(火酒)였다. 여름철에 이 젊은이는 술에 몹시 취하여 노천야지(露天野地)에 쓰러져서 잠을 자기 일쑤였다. 모기에게 피를 뜯김은 물론 밤중에 풍한사(風寒邪)가 인체내에 칩입했다. 결국 이 젊은이는 병에 걸렸다. 어느 날 갑자기 대소변이 불통되었다. 집안 사람들은 장경악을 초청하여 치료 받게 하였다. 장경악은 이 젊은이를 바라보며 지난 날 자기 자신을 되돌아 봤다. 장경악은 젊은이에게 젊은이! 자네는 내가 젊었을 때와 똑같네!” 하고 탄식했다. 장경악은 이 젊은이의 진맥과 설진(舌診)을 통하여 노천에서 잠을 잠으로 인하여 발생한 질병이라고 진단하였다. 한증(寒症)과 열증(熱症)이 겸하여 있으며 설태는 황색이었고 맥은 대맥(大脈)이었다. 양결임으로 반드시 고한약(苦寒藥)을 써서 치료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장경악은 우선 대승기탕(大承氣湯)을 처방하였다. 처방중 대황은 5 ()을 썼다. 결과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장경악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여석투수(如石投水)” 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이 처방은 한강 물에 돌던지기란 뜻이다. 그래서 장경악은 서기 1228 년 금() 나라 때 장종정(張從正)의 저서 유문사친(儒門事親) () 12 에 있는 신우환(神佑丸 : 甘遂, 大戟, 芫花, 黑牽牛, 大黃)과 통도법(通導法)을 썼다. 그래도 대소변이 불통했다. 장경악은 재차 진맥 후 자기의 진맥이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양결이 틀림없다고 확인한 후 대승기탕 중에 들어있는 대황을 생대황으로 교체하여 두 냥()을 썼다. 또 저아조각(猪牙) 2 ()을 가미하여 황혼시에 전복(煎服)시켰다. 사고시분(四鼓時分 : 사경(四更)과 同 : 새벽 1 – 3 시 사이)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자 마자 젊은이는 설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대변이 나오고 난 다음 즉시 소변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후 점차적으로 질병이 치유되었다. 대황의 포제 품종은 다양하다. 생대황, 주초대황(酒炒大黃), 초제대황(醋製大黃), 숙대황(熟大黃 : 酒蒸) 등이 있다. 생대황의 사하력이 가장 강하다. 열결지증(熱結之症)에 생대황을 사용하는데 탈관참장지공(奪關斬將之功)” 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대황은 험난한 관문을 통과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오는 힘을 갖고 있다.” 는 뜻이다. 그래서 대황을 장군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 술로 찐 숙대황의 사하력은 완만하며 사화해독(瀉火解毒) 작용이 있다. 주대황은 술의 힘을 빌어 약성이 상행(上行) 하도록 도와 준다. 즉 구설생창(口舌生瘡)이나 목적인종(目赤咽腫) 등 상초실열증(上焦實熱症)에 효과가 탁월하다. 주제대황은 사열작용과 활혈화어(活血化瘀) 작용이 강하다. 이상의 제품들은 모두 청사대장지열(淸瀉大腸之熱) 작용이 있다. 체력이 약한 사람은 숙대황을 사용하는 편이 좋다. 대황의 약력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난다. 어떤 사람은 3g 의 대황으로 사()시키는데 충분하나 어떤 사람은 10g 을 사용해도 사하지 못한다. 특수한 경우 100g 의 대황을 써야 사되는 경우도 있다. 장경악의 제 2 의안(醫案)은 주한림(朱翰林)이라고 불리는 할머니의 케이스이다. 주여사는 금년 70세 이다. 지난 5 월에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져 곤두박질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부터 몸에 열이 났다 추웠다 한다. 의사를 불러 치료해 봤다. 의사들은 대부분 주여사가 음허유화(陰虛有火)라고 진단했으며 생지와 작약과 단피와 황금과 지모 등 청화약(淸火藥)을 썼다. 주여사는 복약 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병정은 점점 더 엄중해졌다. 이때 장경악이 나타나서 주여사를 치료하게 되었다. 장경악은 주여사의 맥을 짚고나서 육맥이 무력하다고 말했다. 장경악은 주여사의 증상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머리와 얼굴과 상체에 열이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갈증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리와 대퇴부에 냉감(冷感)이 있었다. 즉 상반신엔 발열 증상이 있고 하반신엔 한증(寒症)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주여사는 상체에 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사화(邪火)가 주여사에게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진음내휴(眞陰內虧)이다. 그러므로 입속에 진액이 부족함으로 구건(口乾) 증상이 생길 뿐이며 진정한 구갈은 아니다. 장경악은 주여사는 풍한지사(風寒之邪)의 침입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종의 감기이다. 그래서 장경악은 자신이 발명한 처방인 이음전(理陰煎)에 시호(柴胡)와 인삼을 가미했다. 고로 주여사의 처방은 : 숙지, 당귀, 자감초, 건강, 육계, 시호, 인삼으로 조성되었다. 이음전의 조성은 독특하다. 주로 비신중허(脾腎中虛)를 치료해 줌으로써 신음부족과 신양부족을 치료해 준다. 주여사와 같은 사람들은 체력이 저하되어 한사(寒邪)의 침입을 쉽게 받으며 사기를 밖으로 구축하기 힘들다. 그런데 시호는 사기(邪氣)를 구축해 준다. 장경악은 이음전가감을 복용한 후 음기(陰氣)가 점차적으로 충족되며 발한(發汗)됨으로 한사가 땀과 함께 밖으로 구축된다.” 고 말했다. 장경악은 이 처방에 대하여 신효불가진술(神效不可盡述)” 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이 처방은 신효막측하여 말로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다.” 는 뜻이다. 주여사는 장경악의 처방 두 첩으로 퇴열(退熱)되었으며 그후 죽으로 다스렸다. 주여사는 반달 동안 계속 되던 변비도 차츰 치료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종전에 주여사를 치료했던 의사들은 주여사의 조열지결(燥熱之結)을 청양약(淸凉藥)으로 치료하였다. 그래서 장경악은 의사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었다. 장경악은 주여사는 나이가 많고 맥상이 약하며 하지가 냉한데 재차 청화(淸火)시킬 경우 주여사의 정기가 상하게 된다.” 고 의사들에게 설명했다. 장경악은 주여사의 처방에 강()과 부자(附子)를 가미하고 본래 인삼과 당귀의 약량(藥量)을 한 배 더 늘려서 복용시켰다. 주여사는 종전의 건강했던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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