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3일 월요일

장석순(張錫純)

장석순(張錫純)

아편전쟁이(서기 1840 서기 1842 )? 아편 문제가 발단이 되어 영국과 청나라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아편전쟁 이전 까지만 해도 청 나라에서는 쇄국정책을 폈었다. 그래서 서방 국가들의 중국내 활동은 아주 미약했으며 오직 오문(澳門:마카오(Macao))과 광주(廣州) 두 도시에서 만 서양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27 년 영국 의사 College 가 오문에 진료소를 열었으며 1828 년에 병원을 개업하였다. 그리고 1834 년 미국의 선교사 겸 의사인 Peter Parker 가 중국에 건너와 그 이듬해 1835 년에 광주(廣州)에 박제병원(博濟病院)을 개업하였다. 미국에서 제일 처음 중국내에 개업한 병원은 교회병원(敎會病院)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문호는 개방되었다. 그리하여 서방 국가들이 중국내에 교회병원(敎會病院)을 서둘러 설립하였다. 1842 년 남경조약 이후 5 개 도시 하문(廈門)과 영파(寧波)와 상해(上海)와 광주(廣州)와 복주(福州)에 교회병원을 설립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1861 년 영국 의사 W. Lockhart 는 북경에 진료소를 개업하였다. 정확한 통계에 의하면 1945 년 까지 중국내에 340 개의 서양 교회병원(敎會病院)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서양 의학의 중국내 전입으로 인하여 의학계에 혼란이 일어났다. 그중 동서의학 교류파의 등장이었다. 동서의학 교류파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은 장석순(張錫純 : 서기 1860 서기 1933 )이었다. 장석순(張錫純)은 동서의학 이론은 서로 같다고 주장했으며 서로 마음을 합쳐 협력하여 곤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석순(張錫純)의 대표작은 의학충중참서록(醫學衷中參書錄)” 이다. 장석순(張錫純)은 한의학의 장상학설(臟象學說)과 서양 의학의 해부학과 생리학은 서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서양 의학의 심력쇠갈(心力衰竭 : Cardiac Failure)과 동양 의학의 신불납기(腎不納氣)는 서로 상통하고 서양 의학의 뇌충혈(腦充血 : Encephalemia)과 동양 의학의 궐역(厥逆)은 서로 비슷한 병증(病症)이다고 말했다. 장석순(張錫純)은 근대 실험 과학 연구 방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론으로 부터 임상치료에 이르기 까지 또 약물의 효력 방면에 이르기 까지 세밀한 관찰과 실험을 해봐야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의학 학술 연구에 새로운 풍조를 조성했다. 그는 한약을 더욱 깊이 연구하여 효력을 명백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서양 약()의 장점은 받아들여서 동양의 한약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장석순(張錫純)은 임상 치료에 있어서도 동서 의학의 치료 방법을 서로 융합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치료에 임하여야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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