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조소기(曹紹虁)와 공명(共鳴) 현상

다음은 패사회편(稗史匯編) - 심음류(審音類)의 조소기교절성향(曹紹虁巧絶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사이다.

<<“악공조소기(樂工曹紹虁), 천하막능이성기자(天下莫能以聲欺者). 여위도필해장악(與衛道弼偕掌樂). 낙양유승방중경자(洛陽有僧房中磬子), 야첩자면(夜輒自鳴), 구이성질(懼而成疾). 구술사백방금지(求術士百方禁之), 종불능이(終不能已). 기여승선(虁與僧善), 래향질(來向疾), 승구이고(僧具以告). (), 격재종(擊齋鐘), 복작성(復作聲). 소기소왈(紹虁笑曰) : ”명일가설성찬(明日可設盛饌), 당위제지(當爲除之).” 승유불신소기언(僧有不信紹虁言), 익기혹효(冀其或效), 내구찬이대지(乃具饌以待之). 기식글(虁食訖), 출회중착(出懷中錯), 여경수처(鑢磬數處), 기향축절(遂絶). 승고문기소이(僧苦問虁所以), 기운(虁云) : ”차경여종율합(此磬與鍾律合), 격피차응(擊彼此應).” 승대희(僧大喜), 기질역유(其疾亦愈).>> 

다시 말하면 조소기(曹紹虁)는 당( : 서기 618 서기 907 ) 나라 때 저명한 악공(樂工)이었다. 그 당시 음악에 관한 한 조소기(曹紹虁)를 따라 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소기(曹紹虁)와 위도필(衛道弼)은 음악 계통의 사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낙양(洛陽)에 있는 좌불사(座佛寺)의 승방(僧房)에 경자(磬子)가 하나 있는데 밤에 스스로 소리를 낸다. 경자란? 부처 앞에 절할 때 흔드는 동()으로 만든 바리때(중의 밥그릇) 모양의 종()을 일컫는다. 화상(和尙)은 경자(磬子)를 괴물로 생각해서 무서워 하기 때문에 병이 생겼다. 의술과 도술과 점술에 뛰어난 술사들을 불러 경자(磬子)가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을 그치게 해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소기(曹紹虁)와 화상(和尙)은 서로 친한 사이였음으로 조소기(曹紹虁)는 화상(和尙)의 병정을 살펴보기 위하여 좌불사를 찾아갔다. 화상(和尙)은 자초지종을 조소기에게 모두 말했다. 그때 마침 갑자기 스님들의 식사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경자(磬子)도 함께 울렸다.

조소기(曹紹虁)는 웃으며 내일 자네가 나에게 한 턱을 잘 내면 내가 종소리를 멎게 해주겠네라고 화상에게 말했다. 화상(和尙)은 조소기(曹紹虁)의 말을 믿기 어렵지만 한 줄기 희망을 갖고 있었다. 다음 날 화상(和尙)은 음식을 잘 차려 조소기(曹紹虁)를 정성껏 대접했다. 조소기(曹紹虁)는 식사를 마친 후 호주머니 속에서 줄칼을 하나 꺼내더니 경자(磬子)의 표면을 여러 군데 갈고 있었다. 그후 경자(磬子)는 스스로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화상(和尙)은 오묘하고 신기한 비법을 조소기(曹紹虁)에게 물었다. 조소기(曹紹虁)경자(磬子)와 승방 안에있는 종의 음률(頻率)이 서로 같다네! 그래서 승방 안에 있는 종을 때리면 동시에 경자(磬子)가 울린다네! 이러한 현상을 공명(共鳴) 현상이라고 부르네!” 라고 화상(和尙)에게 설명해 주었다. 화상은 매우 기뻐했으며 그후 화상의 병은 완전히 치유되었다." 는 뜻이다.

이상의 고사를 통하여 조소기(曹紹虁)가 음파(音波)와 음률(音律:頻律)과 공명(共鳴) 현상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다. 조소기(曹紹虁)가 경자(磬子)에 줄칼로 여러군데 갈아서 약간의 흠집을 냈기 때문에 경자(磬子)는 더 이상 종전의 경자(磬子)가 아님으로 공명현상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 결과 경자(磬子)는 더 이상 스스로 밤에 소리를 낼수 없었다. 1000여 년 전 당() 나라 때 조소기(曹紹虁)가 성학(聲學)에 수준 높은 조예(造詣)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2010년 12월 30일 목요일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과 위징(魏徵)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과 위징(魏徵)

() 나라 제 2 대왕 태종(太宗 : 서기 626 서기 649 )의 연호(年號)는 정관(貞觀)이다. 중국 봉건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운 시기 중 하나이기 때문에 사가(史家)들은 정관지치(貞觀之治)라고 당태종의 정치 공적을 찬양하고 있다.

특히 당태종(唐太宗)의 명재상(名宰相) 위징이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태종(唐太宗) 때 사회가 안정되고 농업 생산량이 증가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개선되어 유족한 생활을 하게되었다.

당태종(唐太宗)은 대신(大臣)들의 건의에 의하여 봉선태산(封禪泰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봉선태산(封禪泰山)은 고대로 부터 제왕들이 왕에 등극된 후 태산(泰山)에 올라가 천제(天帝)에게 제사 지내는 큰 예의(禮儀)이었다. 봉선태산(封禪泰山)의 행사 규모가 크기 때문에 경비가 막대하다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관(貞觀) 5 (서기 631 )에 여러 대신들이 태종(太宗)에게 봉선태산을 요구했다. 그러나 태종(太宗)은 거절하였다. 정관(貞觀) 6 (서기 632 )에 또 다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당태종(唐太宗)에게 봉선태산(封禪泰山)을 요구하였다.

단지 직간(直諫)하는 신하 간신(諫臣) 위징(魏徵) 만 백성들의 피땀으로 이루어 놓은 국고를 낭비하는 처사임과 동시에 시기상조라고 극구 반대하였다.

그래서 당태종(唐太宗)은 위징에게 대가도요구아거봉선태산(大家都要求我去封禪泰山), 지유니인위불행(只有認爲不行), 시부시인위아공로불구고(是不是認爲我功勞不)?”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 더러 봉선태산을 실행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너 혼자 만 어째서 나의 봉선태산을 반대하느냐? 나의 공로가 높지 못하여 그러느냐?” 는 뜻이다.

위징답왈(魏徵答曰) ”구고료(高了).” 다시 말하면 폐하의 공로는 지고(至高)합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덕행불후(是德行不厚)?” 다시 말하면 그럼 나의 덕행이 모자란단 말인가?” 는 뜻이다.

위징(魏徵) : ”흔후료(很厚了)” 다시 말하면 아닙니다. 짐의 덕행도 후합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국가불안정(是國家不安定)?” 다시 말하면 그럼 국가가 불안정하다는 말인가?” 는 뜻이다.

위징(魏徵) : ”이경안정료(已經安定了).” 다시 말하면 아니오. 국가도 이미 안정상태에 있습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사방만이융적환몰신복(是四方蠻夷戎狄還沒臣服)?” 다시 말하면 사방에 있는 주변 국가의 민족들이 굴복해서 신하의 예절로 우리 나라를 섬기지 않느냐?” 는 뜻이다.

위징(魏徵) : ”신복료(臣服了)” 다시 말하면 아닙니다. 신복(臣服)합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시년성불풍수(是年成不豊收)” 다시 말하면 매년 풍작을 이루지 못했느냐?” 는 뜻이다.

위징(魏徵) : “연성흔호(年成很好)” 다시 말하면 아닙니다. 매년 풍작을 이루었습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나마시부서부도(那麽是符瑞不到)?” 다시 말하면 상서로운 징조가 없느냐?” 는 뜻이다.

위징(魏徵) : ”부서야도료(符瑞也到了)” 다시 말하면 상서로운 징조가 있습니다.” 는 뜻이다.

태종(太宗) : ”저육개조건도구비료(這六個條件都具備了), 나아위즘마불능봉선태산니(那我爲怎麽不能封禪泰山呢)?”

다시 말하면 이상 여섯 개의 구비조건을 모두 충족시켰는데 어째서 나 더러 봉선태산을 아직 실행하지 말라고 권유 하느냐?” 는 뜻이다.

위징간절지설(魏徵懇切地說) ”폐하(陛下), 아상급이타개비방(我想給打個比方). 가여설(假如說), 유개인득료일장대병(有個人得了一場大病), 십년와상불기(十年臥床不起), 현재경과정심치료복원료(現在經過精心治療復原了), 축점회복정상(逐漸恢復正常). 취재저개시후(就在這個時候), 양저인배상일석미(讓這人背上一石米), 일천주상일백리지(一天走上一百里地), 나타수둑료마(那他受得了)? 수말동란부지십년(隋末動亂不止十年), 국가초보안정(國家初步安定), 상란환몰유득도완전치리(喪亂還沒有得到完全治理), 국가백성불능설완전부유료(國家百姓不能說完全富裕了). 저시봉선태산(這時封禪泰山), 향상창선유아문대당적사업이경고성(向上蒼宣喩我們大唐的事業已經告成), 신인위공파부도시후파(臣認爲恐怕不到時候)?”

다시 말하면 위징(魏徵)은 다음과 같이 폐하께 간절히 말했다. 폐하! 소인이 생각하고 있는 비슷한 예를 하나 들어 올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차례 큰 병에 걸렸습니다. 10 년 동안 병석에 누어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가정 합시다. 성심성의껏 치료한 결과 이제 겨우 신체가 점점 회복되어 거의 정상상태로 되돌아 왔다고 합시다. 이때 이 사람이 등에 쌀 한 섬()을 짊어지고 하루에 100 () 길을 걸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의 건강이 어떠하겠습니까? 수말(隋末) 농민(農民)  대기의(大起義)는 동한말(東漢末) 황건기의(黃巾起義) 이래로 가장 큰 농민들의 봉기(蜂起) 아닙니까? 왜냐하면 수() 나라 말기(末期) 농민봉기(農民蜂起)에 참가한 농민의 숫자가 수 백만 명을 헤아리며 장장 10여 년 동안은 동란 아니었습니까? 이제 수말동란(隋末動亂)이 멈춘지 겨우 10여 년을 경과했습니다. 이제 대당(大唐)은 초보적인 안정 단계에 처해 있으며 재난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국가와 백성들이 아직 완전히 부유해진 것은 아닙니다. 차제에 봉선태산을 실행하여 상제(上帝)에게 우리 대당(大唐)의 사업의 완성을 벌써 부터 알린다는 것에 대하여 소신은 두려워하는 바이며 아직 봉선태산의 때가 이르지 않했다고 여깁니다.” 는 뜻이다.

위징(魏徵)은 정확한 비유를 들어 성실하고 간절한 언사를 사용해서 충정(忠貞)이 철철 흘러 넘치는 말씨로 직언(直言)했는데 직언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거북스러움을 피하고 태종의 안색을 살펴가며 말했다.

당태종(唐太宗)은 위징(魏徵)에게 반박할 말이 없었으며 즉시 봉선태산(封禪泰山)의 시기를 연기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自尊心)과 허영심(虛榮心)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남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아 시정하려고 하거나 비난하거나 규탄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결과를 한 번 더 생각해 봐야한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의 역반심리(逆反心理)가 나타나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그러나 각종 수단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암시 효과를 나타낼 수 있게 해 줄 경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2010년 12월 29일 수요일

부청주(傅靑主)의 심리치료(心理治療)

부청주(傅靑主)의 심리치료(心理治療)

() 나라 초기(初期)에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에 분연(粉蓮)이라고 불리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남편 이소우(李小牛)가 부인 분연(粉蓮)의 노기(怒氣)를 북돋아 줌으로써 울화병이 생겼다.

이소우(李小牛)의 부인는 여러 의사를 불러 치료해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소우는 태원(太原)으로 부터 60 () 떨어져 있는 양곡(陽曲)에서 의료 행위를 하고 있는 시문(詩文)에 출중한 사상가(思想家)요 서화가(書畵家)요 의학에 정통한 명의 부청주(傅靑主)를 걸어서 찾아갔다.

부청주(傅靑主)는 이소우(李小牛)의 말을 듣고나서 저개병불견병인야능치(這個病不見病人也能治), 지시아수두약미부전(只是我手頭藥味不全), 니거검일괴계단대소적심색석두(一塊鷄蛋大小的深色石頭), 용온화전(用溫火煎), 수전소료(水煎少了), 재첨상계속전(再添上繼續煎). 사시후자연료(時候煮軟了), 니래나약(來拿藥). 천만주의(千萬注意), 불능양수건료(不能讓水乾了), 요인불리화(要人不離火).” 라고 이소우에게 말했다.

다시 말하면 당신 부인의 병은 환자를 보지 않아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수중에 있는 약들이 온전치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색이 진한 달걀 사이즈만한 돌멩이를 구하여 솥안에 넣고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돌멩이가 연해질 때 까지 계속 끓이십시오. 돌멩이가 연해졌으면 나에게 다시 와서 약을 가져 가십시요.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은 솥안에 물이 마르면 않됨으로 불 옆에서 사람이 떠나면 않됩니다.” 는 뜻이다.

이소우(李小牛)는 달걀 사이즈와 똑같고 색이 짙은 돌멩이를 구하여 깨끗이 씻은 다음 솥안에 넣고 49 차례나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멩이는 연해지지 않았다.

방안에 누어있던 부인이 병석에서 일어나 시부시전법부대(是不是煎法不對)?” 라고 남편에게 물었다.

다시 말하면 끓이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라는 뜻이다.

이소우(李小牛)부산선생취시양저양전적(傅山先生就是讓這樣煎的).” 이라고 부인에게 대답했다.

다시 말하면 부산(傅山) 선생이 시키는대로 끓였습니다.” 는 뜻이다.

부인은 요부(要不), 아간착화(我看着火), 니거문문(去問問).” 이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다시 말하면 잘 않되면 내가 아궁이에 계속 불을 지피고 있을 터이니 당신이 부선생에게 다시 한 번 더 문의해 보시요.” 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서 부인은 아궁이 앞으로 와서 불을 지피며 앉아 있었다.

이소우(李小牛)는 부산(傅山) 선생을 찾아가서 이경전료양천료(已經煎了兩天了), 약인즘마일점야불견연(藥引怎麽一点也不見軟)?” 라고 문의하였다.

다시 말하면 돌멩이를 끓인지 이틀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연해지지 않습니다.” 는 뜻이다.

부산(傅山) 선생은 현재수체니간화(現在誰替看火)?” 라고 이소우(李小牛)에게 반문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재 당신 대신 누가 불을 지켜보고 있습니까?” 라는 뜻이다.

이소우(李小牛)아처자간착니(我妻子看着).” 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인이 불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는 뜻이다.

부산(傅山) 선생은 타병이호랍(病已好). 차병요치수선득소기(此病要治首先得消氣), 타견니나마몰일몰야지자석두(那麽沒日沒夜地煮石頭), 기취소료(氣就消了). 기소즉간목소(氣消則肝木蘇), 간목소즉비위자연운곡(肝木消則脾胃自然運谷). 타능체니자석두(能替煮石頭), 설명병이호료(說明病已好了).” 라고 이소우(李小牛)에게 설명해 주었다.

다시 말하면 당신 부인의 병은 이미 호전되었습니다. 당신 부인의 병은 쌓여있는 노기(怒氣)를 해소시켜 주면 치유됩니다. 그런데 당신의 부인은 당신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부엌의 아궁이 앞에 앉아서 돌멩이를 끓이고 있는 꼴을 보며 노기(怒氣)가 사라졌습니다. 노기(怒氣)가 사라짐과 동시에 간목(肝木)이 소생하였습니다. 간목이 소생함으로써 비위(脾胃)의 운화(運化) 작용이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당신 부인이 당신 대신 돌멩이를 삶으러 부엌으로 내려오는 순간 당신 부인의 병은 이미 치유되었습니다.” 는 뜻이다.

부산(傅山) 선생의 말을 듣자마자 이소우(李小牛)가 집에 돌아와 보니 부인의 병은 완전히 치유되었다.

이상의 고사(故事)는 한의학의 심리치료에 관한 생동감 있는 하나의 사례(事例)이다.

민간 속어(俗語)심병환수심약의(心病還須心藥醫), 해령환수계령인(解鈴還需系鈴人)” 이란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병은 마땅히 심리치료 의사가 치료해야 되며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해결해야 된다.” 는 뜻이다.

부청주(傅靑主)의 원명(原名)은 정신(鼎臣)인데 후에 산()으로 개명했다. 수 많은 자()와 호()를 갖고 있으며 청주(靑主)는 그의  ()이다. 부청주(傅靑主)는 다재다능하여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으며 의학에 정통하였다. 산부인과와 내과에 탁월한 의술을 지니고 있었으며 부청주여과(傅靑主女科)와 산후편(産後編)과 부청주남과(傅靑主男科)를 저술하였다. 진사탁(陳士鐸)의 변증록(辨證錄)과 석실비록(石室秘錄)과 동천오지(洞天奧旨) 등은 실제로 부청주(傅靑主)의 저술(著述)이라고 의학사가(醫學史家)들은 말하고 있다.

2010년 12월 28일 화요일

최안잠(崔安潛)의 도적 진압

최안잠(崔安潛)의 도적 진압

최안잠(崔安潛)은 당() 나라 제 22 대왕 희종(僖宗 : 서기 873 서기 888 ) 때 사천(四川) 절도사(節度使)를 지낸 사람이다.

사천(四川)은 원래 한족(漢族)과 소수 민족이 섞여 살고 있는 지방으로써 치안이 매우 어려운 곳이었으며 백성들의 원성이 높은 곳이었다.

고병(高騈)이라는 사천 절도사는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파직 당했고 그 후임으로 최안잠(崔安潛)이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최안잠(崔安潛)이 사천 절도사에 임명되었을 때 도처에서 도적들이 들고 일어나 사회의 치안이 극도로 혼란한 상태였다. 백성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임 절도사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최안잠(崔安潛) 절도사가 어떤 방식으로 경내의 도적들을 소탕할 것인가에 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최안잠(崔安潛) 절도사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해 냈다. 부임한지 5 일째 되는 날 최안잠(崔安潛) 절도사는 관비(官費) 1500 ()을 풀어 성도잠시(成都蠶市)와 약시(藥市)와 보시(寶市) 등 가장 도적이 많은 3 개처에 분배할 계획이었다.

()이란? 관(貫)이며 끈에 꿴 1000 문(文)의 동전을 일컫는다.

그리고 곳곳에 다음과 같은 방문(榜文)을 써 붙였다.

여과유인고발병체포일개도적(如果有人告發幷逮捕一個盜賊), 상전오백민(償錢五百緡).
  도적필유동과(盜賊必有同夥), 약동과고발가이사면고발자죄(若同夥告發可以赦免告發者罪),
  화평상인일양영상(和平常人一樣領償), 망대가분용포도(望大家奮勇捕盜), 절차화환(絶此禍患).”

다시 말하면

만일 도적 한 사람을 고발하거나 체포할 경우 상금 500 ()을 받을 것이다. 도적은 반드시 친구가 있다. 만일 친구 도적을 고발할 경우 죄를 사면해 줄 것이며 보통 사람들과 같은 상금을 받게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도적을 잡는데 협조해 주기 바란다. 이로 인하여 화를 입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는 뜻이다.

최안잠(崔安潛) 절도사는 방문을 써 붙인 후 자신의 계획을 장려하기 위하여 말을 타고 3 ()를 순시하였다.

얼마 후에 어떤 사람이 상습 절도범을 체포하여 관가로 끌고 왔다. 도적은 계속 자기 죄를 불복하며 타화아일양간료십칠년(他和我一樣干了十七年), 획장도시평분(獲贓都是平分). 타즘마능착아니(怎麽能捉我呢)?”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다시 말하면 저 사람과 나는 지난 17 년 동안 장물(贓物)을 똑 같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를 체포할 수 있습니까?” 라는 뜻이다.

최안잠(崔安潛) 절도사는 니기연지도아이발하방문(旣然知道我已發下榜文), 위사니불파타선촉래견관(不把他先捉來見官)? 약시나양적화(若是那樣的話), 타취핵시사죄(他就該是死罪), 니취해수상료(就該受賞了). 현재(現在), 니피타점료선(被他占了先), 해니사(), 니환설사(還說)!” 라고 잡혀 온 도적에게 말했다.

다시 말하면 너는 내가 방문을 발부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어째서 저 사람을 먼저 붙잡아 관가에 끌고 오지 않았느냐? 만약 저 사람을 네가 먼저 붙잡아 관가에 끌고 왔더라면 저 사람은 사형을 받게될 것이고 너는 상금을 받을 것인데 현재 너는 저 사람에게 먼저 붙잡혀 관가에 끌려 왔다. 그러므로 너는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며 저 사람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아직도 할 말이 있느냐?” 는 뜻이다.

범인을 체포하여 관가에 끌고 온 사람은 도적이 보는 앞에서 상금을 받고 체포된 도적은 광장에서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부터 도적들은 서로 미워하기 시작했으며 고발 당할까 두려워 서천을 떠나 딴곳으로 멀리 밤중에 도망쳐 버렸다. 그리하여 사천 경내(境內)에 도적이 없어졌다. 이상의 고사(故事)는 아무리 견고한 조직이라 할지라도 내부에 시기와 질투가 있으면 쉽게 붕괴된다는 교훈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단결은 안정의 필수조건이다.

2010년 12월 19일 일요일

미시(未時)는 소장(小腸)의 당번이다.

미시(未時)는 소장(小腸)의 당번이다.

미시(未時)는 오후 1 시 부터 오후 3 시 사이이며 소장의 당번이다. 소장은 수곡정화(水穀)의 정화(精華)를 흡수한다. 미시(未時)에 양쪽 볼이 붉그수레 해지거나 흉민(胸悶)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은 심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심장과 소장은 표리(表裏)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사시(巳時)는 비장(脾臟)의 당번이다.

사시(巳時)는 비장(脾臟)의 당번이다.

사시(巳時)는 오전 9 시 부터 오전11시 사이이다.

비장(脾臟)은 위()에서 섭취한 음식물을 운화하여 인체에 필요한 정미(精微) 물질로 만들어 소장에서 흡수하게 하며 찌꺼기는 대장으로 보내어 체외로 배설시키게 한다.

그러므로 아침 식사를 건너 뛰면 사시(巳時) 당번인 비장(脾臟)은 할 일이 없어 허탕만 치고 있다. 장기간 아침을 건너 뛰면 비()가 상한다.

그 결과 비만도 초래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굶으면 살이 빠진다고 하는 생각은 큰 잘못이다.

()12 생초(生肖) 중 사()에 속한다. 뱀은 지렁이와 비슷하게 닮았기 때문에 큰 지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뱀은 땅속에 구멍을 뚫어 집을 만들어 산다. 그래서 뱀은 지렁이와 마찬가지로 흙속에 산소가 잘 통하게 해주고 흙을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은 인체 내에서 비위(脾胃)와 상응된다. 그래서 비장(脾臟)은 사사(巳時)에 당번이다.

진시(辰時)는 아침 식사 시간이다.

진시(辰時)는 아침 식사 시간이다.

진시(辰時)는 오전 7 시와 9 시 사이이고 위()의 시간이며 아침 식사 시간이다. 그러므로 진시(辰時)에는 반드시 아침 식사를 해야 된다. 경맥(經脈)의 기혈(氣血)은 자시(子時) 부터 발생하여 묘시(卯時 : 오전 9 - 오전 11 )에 완성된다.

진시(辰時)에 햇빛이 두루 비추어 양기(陽氣)의 운화가 계속된다. 그러므로 진시(辰時) 부터는 인체에 음()을 보충해 주어야 할 차례이다. 음식물은 음()에 속한다.

진시(辰時)에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을 경우 9 시 부터 11 시 까지는 비장(脾臟) 당번이고 비장(脾臟)은 주로 운화(運化) 담당 장기인데 위(胃) 속에 음식물이 들어오지 않음으로 열중쉬어 상태에 있어야 한다.

비장(脾臟)은 음식물의 정기(精氣)를 전화(轉化)해서 전신에 운반하는 기능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음식물 속에 들어있는 단백질은 아미노산(Amino Acid)으로 전화시키고 탄수화물은 글루코스(Glucose)로 전화 시키며 지방은 글리세롤(Glycerol)과 지방산(Fatty Acid)으로 전화시켜 전신에 운송한다.

만약 비장이 정기를 순조롭게 수송할 수 없게 되면 복만(腹滿)과 장명(腸鳴)과 설사와 소화불량과 식욕부진 등의 증후(症候)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아침 식사를 장기간 건너 뛰는 사람은 인체가 쉽게 상한다. 진시(辰時)에 반드시 아침 식사를 하여 수곡정미(水穀精微)를 섭취해서 인체의 원기(元氣)를 보충해 주어야 한다.

2010년 12월 18일 토요일

담(膽)은 자시(子時)에 당번이다.

()은 자시(子時)에 당번이다.

자시(子時 : 23:00 -1:00)와 담() 자시 (子時)는 밤 11 시 부터 다음 날 1 시 까지 두 시간 동안이다. 양기(陽氣)가 발동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즉 만물이 자생(滋生)하는 시간이다.

밤샘하는 사람들은 밤 9시 만 되면 지치고 피곤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밤 11 시 쯤 되면 정신상태 까지 변함을 스스로 느낀다. 11 시 이후 부터 인체의 양기가 발동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12 생초(生肖)?

12 지지(地支)의 동물로 표시하는 사람의 띠를 일컫는다. 즉 자서(子鼠), 축우(丑牛), 인호(寅虎), 묘토(卯兎), 진용(辰龍), 사사(巳蛇), 오마(午馬), 미양(未羊), 신원(申猿), 술견(戌犬), 해돈(亥豚)을 일컫는다.

자서(子鼠)가 첫 번째 이며 자()12 지지(地支) 중 첫 번째 글자이며 쥐를 의미한다. 자시(子時)에 양기가 발동하기 시작하나 늙은 쥐 처럼 미약하나 생명력은 강하다.

태극도(太極圖)를 보면 한 쪽은 음()이고 다른 한 쪽은 양()이다. 양기가 가장 강한 곳은 생선 처럼 생긴 모양의 머리 부분이며 양기가 가장 약한곳은 꼬리 부분이다. 또 음기가 가장 강한 곳은 양기가 가장 약한 생선의 꼬리부분 이며 음기가 가장 약한 곳은 양기가 가장 강한 생선 모양 중 머리 부분이다.

자시(子時)는 양기가 시작되는 생선의 꼬리 부분에 해당된다. 양기(陽氣)가 미약함으로 소모해서는 않된다. 휴식을 취해야 된다. 만일 이때 양기를 소모시켜 버리면 첫 출발하는 양기의 세력을 억눌러서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은 남방에 있고 화()에 속하고 신()은 북방에 있고 수()에 속한다. 심화(心火)는 비록 위에 있지만 상염(上炎)하면 않된다. 아래로 내려가서 신()을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 신수(腎水)는 비록 아래에 있지만 물이 아래로 스며들면 않된다. 물이 기화(氣化)하여 위로 올라가서 심()을 윤택하게 해주어야 한다. 이것을 한의학에서 심심상교(心腎相交)라고 칭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만 인체는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수면은 심신상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밤 11 시 경에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밤에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자시(子時)에 잠을 자면 담기(膽氣)가 양성된다.

황제내경 소문의 육절장상론(六節藏象論)에 보면 범십일장취결어담야(凡十一藏取決於膽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무릇 11 장은 결단(決斷)을 담()에서 취한다.” 는 뜻이다.

즉 인간의 사유활동의 배후에 담의 기능이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담(膽)은 자시(子時)에 당번이다. 고로 담기를 양성시켜 주고 담의 기능을 증진시켜 주기 위해서 또 기의 출발을 돕기 위해서 자시(子時)에 반드시 잠을 자야 한다.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은 세계 최초의 외상(外傷) 전문치료서이다. 서기 442 년 제() 나라 원가(元嘉) 19 년에 진() 나라의 유연자(劉涓子)가 원작자(原作者)이지 만 남북조 때 제()나라의 공경선(慶宣)이가 재정리하고 순서를 가려서 수정하여 제() 나라 동혼후(東昏侯) 영원(永元) 원년(元年 : 서기 499 )에 편찬하였다.

지금부터 1660여 년전 서양 의학이 싹트기 시작할 때 제() 나라에서는 이미 임상 실험과 경험을 통하여 세계 최초의 외상 전문 서적을 간행하였으니 장한 일이다.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5 ()으로 구성되어 있고 외상과 옹저와 창절과 습진과 루력과 개선과 기타 여러 종류의 피부병 등의 병증이 수록되어 있다.

1 권에 옹과 저저의 감별법과 진단법과 예후(豫後) 등이 기록되어 있고 제 2 권에는 금창지혈산방(金瘡止血散方)과 어혈백마제산방(瘀血白馬蹄散方)을 비롯하여 31 개 처방이 수록되어 있다. 3 권에는 장열옹저대황탕방(壯熱癰疽大黃湯方)과 옹괴후황기탕방(癰壞後黃芪湯方)을 비롯하여 29 개의 처방이 수록되어 있으며 제 4 권에는 옹저종송지첩방(癰疽腫松脂帖方)과 단옹저시발흔열침음장성옹탕방(丹癰疽始發焮熱浸淫長成湯方) 31 개의 처방이 수록되어 있다. 5 권에는 옹저패괴생지황고방(癰疽敗壞生地黃膏方)과 제상육물멸반고방(諸傷六物滅盤膏方)을 비롯하여 59 개의 처방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150 개의 외치료(外治療) 처방이 수록되어 있다. 외상의 치료에 있어서 지혈과 수렴과 지통과 진정과 해독약 이외에 수은연고(水銀軟膏)와 웅황(雄黃 : 硫化)연고와 연단(鉛丹 : 亞鉛華(산화아연))연고 등이 있다. 연단(鉛丹 : 亞鉛華(산화아연))연고는 바셀린에 산화아연 정제 라놀린 표백 밀랍을 섞은 연고이며 습진과 외상과 염증 등에 사용된다. 이와 같은 연고는 인도와 아라비아와 유럽에서 사용된 연고 보다 수 백년이나 앞섰다.

또 옹종은 절개(切開)하고 천자(穿刺)하여 배농(排膿) 시키는 수술법을 사용하여 치료했다. 그외 장옹(腸癰 : 腹腔內外膿性疾患)의 치료에 대황탕을 사용했다.

공경선의 서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신화성(神話性)을 띈 고사가 실려 있다.

석유연자(昔劉涓子), 진말어단양교외조사(晉末於丹陽郊外照射), 홀연일물(忽然一物), 고이장허(高二丈許), 사이중지(射而中之), 위뇌전(爲雷電), 성약풍우(聲若風雨), 기야불감전추(其夜不敢前追). 힐단솔문도자제수인(詰旦率門徒子弟數人), 심종지산하(尋踵至山下), 견일소아제관(見一小兒提罐), 문하왕(問何往). “위아주피유연자소사(爲我主被劉涓子所射), 취수세창(取水洗瘡)”.운황부귀(云黃父鬼).잉장소아상수(仍將小兒相隨),환미지문(還未至門),문도약지성(聞搗藥之聲).비급(比及),요견삼인(遙見三人):일인개서(一人開書),일인도약(一人搗藥),일인와이(一人臥爾).내제성규돌(乃齊聲叫突),삼인병주(三人幷走).유일권옹저방(遺一卷癰疽方),병약일구(幷藥一臼).시종송무제북정(時從宋武帝北征),유피창자(有被創者),이약도지즉유(以藥塗之卽癒).연자용방위치(涓子用方爲治),천무일실(千無一失).연위십권(演爲十卷),호귀유방(號鬼遺方).자적여종숙조(姉適余從叔祖).연자기자서(涓子寄姉書),구서차사(具敍此事),병방일권(幷方一卷).방시단양박지본사(方是丹陽薄紙本寫),금수적상존(今手跡尙存).기손도경여여인거(其孫道慶與余隣居),정의이상(情疑異常),임종견어(臨終見語),가유신방(家有神方),아자유치(兒子幼稚),구비기인(苟非其人),도불허행(道不虛行),심권진후(尋卷診候),겸변약성(兼辨藥性),욕이상전(欲以相傳).속여기호방술(屬余旣好方術),수이불사(受而不辭).자득차방(自得此方),어금오재(於今五載),소치개유(所治皆癒),가위천하신험(可謂天下神驗).유씨석기공방(劉氏昔寄方),고초사다무차제(故草寫多無次第).금첩정기전후(今輒定其前後),족류상사(簇類相似),위차일부(爲此一部),유포향곡(流布鄕曲).유식지사(有識之士),행이자방(幸以自防).제영원원년대세기묘오월오일찬(齊永元元年大歲己卯五月五日撰)".

다시 말하면 () 나라 말기에 유연자는 단양(丹陽)의 교외(郊外)로 햇빛을 쪼이러 나갔다. 홀연히 키가 2 (: 1 장은 3.33m)이나 되는 큰 거물을 보았다. 유연자가 화살로 적중시켰더니 천둥과 번개치는 소리와 함께 폭풍우 내리는 소리가 났다. 그 날 밤 유연자는 감히 거물을 쫓아가지 못했다. 이튿 날 아침 유연자는 젊은 제자 여러명을 거느리고 거물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도중에 어린 소년이 물 항아리를 들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유연자는 소년에게 어디로 가고 있느냐?” 고 물었다. 소년은 우리 주인께서 유연자의 화살에 맞은 상처를 씻기 위해서 물을 길러갑니다.” 고 대답했다. 유연자는 소년에게 너의 주인이 누구냐?” 고 물었다. 소년은 황부귀(黃父鬼)” 입니다고 대답했다. 유연자는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대문 앞에 도달되기도 전에 약을 찧는 소리와 약 냄새가 났다. 이윽고 유연자는 대문 앞에 도착되었다. 멀리 세 사람이 보였다. 한 사람은 책을 펴서 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약을 공이로 찧고 있었으며 또 한 사람은 누어 있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세 사람은 옹저방 한 권과 돌절구와 공이와 약을 남겨둔 채 달아나 버렸다. 때는 송() 나라 무제(武帝)가 북벌 정책을 실행하던 때였다. 창과 화살로 인한 부상병이 많이 발생했다. 황부귀가 도망가며 남겨 둔 약을 발라 상처를 치유하였다. 유연자는 황부귀가 남겨두고 달아 난 옹저방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수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1000명의 환자 중 한 명도 예외없이 모두 치유되었다. 유연자(劉涓子)는 열 권의 책을 쓰고나서 귀유방(鬼遺方)이라고 명명하였다. 유연자(劉涓子)는 이상과 같은 사실을 진술한 글과 함께 귀유방 일 권을 자기 누나에게 전해주었다. 후에 유연자(劉涓子)의 누나가 시집가며 그 책을 종조부에게 전해 주었다. 귀유방(鬼遺方)은 단양산(丹陽産) 박지(薄紙 : 얇고 투명한 종이)에 베꼈다. 지금까지 필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유연자(劉涓子)의 손자 유도경(劉道慶)은 이웃집 사람에게 이 책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임종이 가까워 유언을 했다. ”우리 집안에 신방(神方)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물려 줄 적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적당한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이 보람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책을 보고 증상을 진단하여 약성을 분별하여 치료할 수 있는 훌륭한 방술이니 사양하지 말고 받으십시요.” 라고 말했다. 공경선(慶宣)은 이 방을 얻어 5 년 동안 환자들을 치료하는 즉시 질병이 치유되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신효막측한 처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도경은 공경선에게 귀유방을 전해 주었다. 순서가 없이 베껴져 있었기 때문에 순서를 가려서 잘 정리하여 시골 구석에 까지 퍼뜨렸다. 유식한 사람들은 귀유방을 보고 스스로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 나라 동혼후(東昏侯) 영원(永元) 원년(元年 : 서기 499 ) 기묘(己卯) 5 5 일에 책을 편찬했다.” 는 뜻이다.

() 나라 때 종실전(宗室傳)에 기재된 것을 보면 유연자(劉涓子)는 팽성(彭城) 내사(內史)에게 일찍이 귀유방을 전수해 주었고 그의 아들이 조사하고 점검한 후 진무참관(振武參官)에게 전해 주었다. 송 나라 때 무제와 함께 북정(北征)에서 돌아 온 후 유격장군(遊擊將軍)에게 전해졌고 최후로 영포현후(營浦縣侯)에게 전해졌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귀유방(鬼遺方)은 유도경(劉道慶)의 임종시에 공경선(慶宣)에게 전해졌다. 현재 우리가 읽어 볼수 있는 귀유방(鬼遺方)은 공경선(慶宣)이 수정하고 재정리한 것이다.

()나라 때 손사막(孫思邈)의 저서 천금익방(千金翼方)에도 귀유방(鬼遺方)의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귀유방(鬼遺方)은 후에 여러차례 중간(重刊)되었고 현재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송 나라 때 각본(刻本) 영인(影印)된 것이다.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은 원래 진() 나라 유연자(劉涓子)가 편찬한 책이다. 그러나 남제(南齊)의 공경선(慶宣)이가 재정리하고 순서를 가려서 제()나라 동혼후(東昏侯) 영원(永元) 원년(元年 : 서기 499 )에 재편찬되었다.

황부귀(黃父鬼)가 유전(遺傳)한 것이므로 ()” ()()” ()를 따서 귀유방(鬼遺方)이라고 명명되었다.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와 당서(唐書)에 원서(原書) 10 ()이 수록되어 있다. 송대(宋代) 이후에는 두 종류의 잔본(殘本) 즉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 5 권과 유연자치옹저신선유방(劉涓子治癰疽神仙遺方) 1 ()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유연자치옹저신선유방 1 ()의 내용은 주로 옹저증치(癰疽證治)이다. 본서의 주요 내용들은 금창외상(金瘡外傷)과 옹저창절(癰疽瘡癤)과 진비개선(疥癬)과 악창제루(惡瘡諸瘻)와 루력퇴창(頹瘡)과 탕화상(湯火傷) 및 기타 외과질환에 관한 의약이론과 처방들이 수록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외과전서(外科專書)로써 수대(隋代)와 당대(唐代) 방서(方書)의 외과부분과 명대(明代) 왕긍당(王肯堂)의 양과증치준승(瘍科證治準繩)과 청() 나라 때 고세징(顧世澄)의 양의대전(瘍醫大全) 등에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의 외과(外科)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일본의 의심방(醫心方) 중 외과부분에 유연자귀유방의 주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