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30일 토요일

석가모니(釋迦牟尼) 탄일(誕日)과 욕불(浴佛)

석가모니(釋迦牟尼) 탄일(誕日)과 욕불(浴佛)



한국과 일본과 중국 등 대승불교가 유행하고 있는 국가에서 음력 4 월 8 일은 석가모니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며 불탄절(佛誕節)이라고도 부른다.



불경에 보면 ”석가모니의 모친 마야부인(摩耶夫人 : ? – 서기 전 536 년)은 정반왕(淨飯王)과 결혼한지 20 년이 지나도록 회임하지 못했다. 그런데 45 세 되던 해 어느 날 밤 그녀는 흰 코끼리 한 마리가 그녀의 왼쪽 옆구리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 당시 인도의 풍속은 아이를 임신할 경우 반드시 친정으로 가서 몸을 푸는 습관이 있었다. 4 월 8 일 날 남비니(藍毗尼) 화원(花園)을 거닐다가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윽고 석가모니가 그녀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부타는 태어나자 마자 아무 도움없이 스스로 일곱 발을 걸었으며 이르기를 ”나는 천인(天人) 중 가장 존귀하고 가장 높은 사람이다." 고 말했으며 사천왕(四天王)은 부드러운 비단옷으로 부타의 몸을 둘러 싸 주었다. 그리고 보좌에 앉혔다. 제석천(帝釋天)과 대범천(大梵天 : 불교의 護法神)이 좌우에서 부타를 모시었다.



두 용왕이 하늘에서 ”토청정수(吐淸淨水), 일온일양관태자신(一溫一樣灌太子身)”하였다. 다시 말하면 ”깨끗한 물을 입으로 토하여 한 번은 따뜻한 물로 또 한 번은 시원한 물을 태자의 몸에 쏟아 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보요경(普曜經)에 보면”구룡재천상왕하토향수(九龍在天上往下吐香水), 세욕불신(洗浴佛身)”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향수를 입으로 토하여 부타의 몸을 씻었다.” 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화원 속에 성지(聖池 : Puskarini)가 있는데 마야부인은 부타를 낳기 전에 이 연못 속에서목욕을 했으며 석가모니가 태어난 후 마야부인은 이 연못 속에서 석가모니를 목욕시켰다고 한다. 마야부인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후 일 주일 만에 거세(去世)하였다. 그후 석가모니는 이모집에서 자랐다.



김용(金庸)의 저서 천용팔부(天龍八部)에 보면 공중에서 노래와 춤으로 부타를 환영했으며 향불을 피우고 꽃을 뿌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매년 음력 4 월 8 일은 부타의 탄생일로 기념하였다. 사원에서는 법회(法會)를 거행하고 법룡(法龍)이 향기나는 비를 내려 부타를 목욕시켰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날 각종 꽃과 등불과 다과(茶果)를 차려놓고 불상을 씻어 준다. 그래서 욕불절(浴佛節)이란 이름이 생겼다.



동진(東晉 : 서기 317 년 – 서기 420 년)때 이미 욕불절(浴佛節)이 있었다는 사서(史書)의 기록이있다.



또 업중기(邺中記)에 보면 후조(後趙)의 제 3 대왕 무제(石虎 : 서기 295 년 – 서기 349 년)는 신실한 불교 신자였다. 무제(武帝)는 부처님의 불상(佛像)을 태운 박달 나무로 만든 큰 마차를 조각하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하였다.



길이가 2 장(丈 : 1 장(丈)은 3 미터)이고 넓이는 1 장(丈) 남짓했으며 바퀴가 4 개 달린 박달 나무로 만든 수레였다. 아홉 마리의 용이 입에서 물을 품어 낸다. 또 나무로 도인(道人)을 만들어 부타의 배(腹部)를 손으로 안마해 주고 십 여명의 나무로 만든 도인들의 키는 2 척(尺)이었다. 모두 가사(袈裟 : 모슬린)으로 칭칭 감고 있었으며 항상 읍(揖)하며 예불(禮佛)하고 있다. 또 한 손으로 향(香)을 집어 향로에 꽂아넣고 수레가 가면 나무로 만든 사람도 따라 가고 용의 입에서는 실제로 물을 토하며 수레가 그치면 모든 것이 함께 정지하는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었다.” 는 뜻이다.



불상을 수레(車) 위에 올려놓고 많은 스님들과 사람들이 불상을 따라서 빼곡히 둘러싸며 행진하는 것을 행상(行像)이라고 부른다.



동진(東晉)의 법현(法顯)의 저서 불국기(佛國記)에 보면 ”어전재불탄절적행상활동(於阗(今新疆和田一帶)在佛誕節的行像活動)”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화전현 일대에서는 불탄절 날 행상이 거행되었었다.” 는 뜻이다.



북위(北魏) 때 불교가 가장 성행했었으며 매년 석가탄일에 행상(行像)이 거행되었다.



행상(行像)이란?



신불소상(神佛塑像)을 마차 위에 싣고 아름다운 꽃과 오색 찬란한 비단으로 장식하여 하루 종일 시가행진하는 대규모의 일종의 국가적인 종교 행사였다. 행상(行像)을 행성(行城) 또는 순성(巡城)이라고도 불렀다.



북위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9 년(서기 485 년)에 도읍을 낙양으로 천도 한 후 불교는 크게 일어났다.



북위(北魏)의 양현지(楊衒之)의 저서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보면 “불탄절에 낙양 지구에있는 각 사원(寺院) 마다 불상(佛像) 한 개와 보살상(菩薩像) 두 개씩을 경명사(景明寺)에 집합시켰다. 많을 때는 불상이 일 천 여개가 넘었다. 입을 크게 벌린 사자가 모든 사(邪)를 면하게 해준다는 전설에 의하여 행열의 선두에서 사자가 길을 인도하고 불상의 머리 위에는 오색 찬란한 비단으로 만든 양산을 바치고 오색 찬란한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뒤따라 오고 그 뒤에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과 아름다운 무용복으로 장식한 무용단이 춤을추며 따라가며 그 뒤에는 요술사와 광대놀이꾼들과 코미디언들이 뒤따라가는 볼만한 구경 거리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경명사(景明寺)는 북위의 제 7 대왕 선무(宣武 : 서기 500 년 – 서기 515 년)황제 때 건립한 낙양에서 제 일큰 절이다. 경명(景明) 연간에 지었기 때문에 경명사(景明寺)란 이름을 얻었다.



이와 같은 전 국민적인 불교 종교행사는 당송(唐宋) 이후 부터 시들해 지기 시작하였다. 명(明) 나라 때와 청(淸) 나라 때 불탄절은 백성들의 중요한 명절로 여겼으며 불탄절 행사는 일종의 민속으로 전해 내려왔다.



북경지구 백성들은 불탄절에 절에가서 욕불 행사를 거행하고 불경을 암송하며 구수한 콩국을 만들어 나누어 마셨다.



”재불탄일자두미살이염(在佛誕日煮豆微撒以鹽), 요인어로청식지(邀人於路請食之), 이위결연야(以爲結緣也).” 라는 민속이 북경지구에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불탄절에 콩을 삶아서 사람들에게 콩국을 대접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불도(佛道)에 귀의한 사람들이 있었다.” 는 뜻이다.



명 나라와 청 나라의 조정에서는 매년 음력 4 월 8 일 석가탄일에 ”사백관오문외식(賜百官午門外食不落夾)” 이라고 일하구문고(日下舊聞考) 147 권(卷)에 수록해 놓았다.



다시 말하면 ”정부에서는 문무 백관들을 오문(현재 천안문) 밖에 불러 모아 놓고 종자(粽子)를 나누어 먹도록 지시했다.” 는 뜻이다.

종자(粽子)란?

찹쌀에 대추를 넣어 댓잎이나 갈잎에 싸서 쩌먹는 단옷날 음식의 한 가지인데 석가탄일에도 먹었다.



일본에서는 명치유신(明治維新 : 서기 1868 년) 때 부터 양력 4 월 8 일을 불탄절로 바꾸어 기념활동을 벌였다. 왜냐하면 양력 4 월 8 일은 일본 전체에 벗꽃이 만발하는 시기이며 욕불의식 중에 신선하고 아름다운 꽃을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민간에서 불탄절을 화절(花節)이라고도 칭한다.



동남아 지구에서는 불탄절에 성도(成道)와 열반(涅槃 : 입적(入寂) 또는 거세(去世))을 이날 동시에 거행하며 폐사거절(吠舍佉節) 또는 유살가절(維薩迦節)이라고 칭한다. 폐사거(吠舍佉 : 梵文(Vaisakha))는 인도의 범력(梵曆) 2 월 인데 동남아 지역에서는 양력 4 월과 5 월 사이의 보름날을 월원일(月圓日)이라고 칭하며 기념식을 거행한다.



중국에서는 4 월은 길상일(吉祥月)이라고 칭한다. 부타는 4 월 초 팔일 날 출생했으며 4 월 15 일 날 해탈했고 부타가 출가한 달도 4 월 달이었다. 동한(東漢) 말년에 저술된 모자이혹론(牟子理惑論)에 ”불사월팔일생(佛四月八日生)”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사료(史料)에 의하여 검증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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