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부(杨仆)와 순체(荀彘)와 조선(朝鲜) 전쟁
한 나라 제 6 대왕 한무제 원봉(元封) 2년(BC 11 년)에 한무제(漢武帝) 유철(刘彻)은 사신(使臣) 섭하(涉何)를 조선(朝鲜)에 파견하여 조선왕(朝鲜王) 위우거(衛右渠)를 배알하고 돌아 오라고 어명을 내렸다.
조선왕(朝鲜王) 위우거는 한무제가 보낸 사신 섭하(涉何)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섭하(涉何)는 자기 신변을 보호해 주며 호송(护送)해 주는 조선의 신하 비왕장(裨王长)을 국경지대에 도착하자 죽여 버렸다.
한무제(武帝)는 섭하(涉何)를 요동(辽东 : 郡治襄平,현재 요녕성(辽宁省) 요양시(辽阳市))의 동부도위(东部都尉)에 임명하였다.
조선왕(朝鲜王)은 군대를 출병시켜 요동(辽东)을 공격하여 섭하(涉何)를 살해하였다.
그해 가을 무제(武帝)는 사형수들을 모집하여 해로와 육로로 조선을 공격하였다.
해군장군(将军) 양부(杨仆)는 5 만 명의 해군을 이끌고 제국(齐国 : 현재 山东)을 출발하여 발해(渤海)를 지나 해로(海路)로 출정하였고 좌장군(左将军) 순체(荀彘)는 군대를 이끌고 요동(辽东)을 출발하여 욱로(陆路)로 출정(出征)하였다.
원봉 3 년초(年初)에 해병 장군(将军) 양부(杨仆)가 이끄는 7000 명의 선발대가 조선(朝鲜)의 국도(国都) 왕험성(王险城: 현재 朝鲜 平壤市 南)에 도착하였다.
조선왕(朝鲜王)은 왕험성을 사수하고 있었으며 양부의 군대가 소수임을 알고 있던 우거왕은 즉시 출병하였다.
양부(杨仆) 군대를 공격하였고 양부의 군사들은 산산이 흐터져 산속으로 도망가 버렸다. 10 여 일 후 산졸(散卒)들을 모두 궤멸시켰다.
한편 좌장군순체(左将军荀彘)의 군사들은 패수(浿水: 현재 朝鲜 清川江)의 서부(西部)에서 조선군(朝鮮军)과 대결하여 싸웠다.
한무제(汉武帝)는 한 나라 군사들이 승리하지 못한 이유를 분석한 후 사신(使臣) 위산(卫山)을 파견하여 위우거왕(卫右渠)에게 항복하라고 권유하였다.
위우거왕(卫右渠王)은 화해(和解)를 요청했다. 조선의 태자(太子)는 일 만여 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가서 투항하겠다고 말했다. 위산(卫山)과 순체(荀彘) 장군은 갑자기 돌변한 위우거왕의 태도에 의심을 품었다.
위산과 순체 장군은 태자에게 군사들이 휴대(携带)하고 있는 모든 병기(兵器)를 땅에 내려 놓으라고 명령하였다.
태자의 군사들은 일시에 위산(卫山)과 순체(荀彘)를 사살할 것 처럼 위협을 주고 귀환하였다.
위산과 순체의 군대는 다시 패수(浿水)에서 조선군대(朝鲜军队)와 싸우기 시작하였다.
한 나라 군사들이 왕험성을 포위하였다. 양부가 이끄는 군대는 왕험성 남쪽을 수비하고 있을 때 위산과 순체의 의견이 각각 달랐다.
양부(杨仆)는 화평해결(和平解决)을 주장했고 순체(荀浿) 장군은 독군맹공(督军猛攻)을 주장하였다.
작전계획의 불일치로 인하여 왕험성을 포위한지 몇 달이 지나도록 승부가 없었다.
한무제(汉武帝)는 제남(济南) 태수(太守) 공손(公孙)을 파견하여 전황을 살피고 돌아 오라고 명하였다.
공손(公孙)이 왕험성(王险城)에 도착하여 순체(荀彘)의 의견을 듣고나서 양부(杨仆)를 체포하고 좌장군순체(左将军苟彘)는 즉시 왕험성(王险城)을 공격하였다. 조선국(朝鲜国)의 재상(宰相) 로인(路人)과 한음(韩阴 : 일설에 도(陶))과 니계상참(尼溪相参) 장군(将军)과 왕협(王峡) 장군은 한군(汉军)이 성(城)을 때려 부수자 겁에 질려 투항하였다. 그해 여름 니계상참(尼溪相参)은 자객(刺客)을 시켜 조선왕(朝鲜王) 위우거(卫右渠)를 살해하였다.
한군(汉军)은 왕험성내로 입성(入城)하였다.
위우거(卫右渠)의 대신(大臣) 성기(成已)도 투항하였으나 군대를 소집하여 한군을 재공격 하였다.
순체(荀彘)는 위우거(卫右渠)의 아들과 로인(路人)의 아들을 투항하게 하였다.
조선의 군민(军民)들은 성기(成已)를 주살(诛杀)하고 한군에 투항하였다. 이로써 위만조선은 망하였고 그 자리에 한 나라는 진번(真番)、임둔(临屯)、현토(玄菟)、낙랑(乐浪)의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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