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1일 금요일

중화문화(中華文化)가 일본과 한국에 미친 영향

중화문화(中華文化)가 일본과 한국에 미친 영향
최근 일본학자들 중 일본 문화는 중국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일본은 해양문화이고 중국은 대륙문화다고 주장한다.
또 한국의 학자들 중 황하문명의 선조는 한민족(韓民族)이다." 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와같은 말을 듣고나서 중국 학자들은 기분이 상했다.

중국 학자들에 의하면 역사상(歷史上) 중화문화(中華文化)가 조선반도(朝鮮半島)와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전파한데는 4 가지 경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다.
중국(中國)、일본(日本)、한국(韓)은 동아문화권(東亞文化圈)에 속해 있다.
다시 말하면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 또는 유학문화권(儒學文化圈)이며 혹자는 쾌자문화권(子文化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젓가락 문화권이다.” 는 뜻이다.

중화문화(中華文化)가 조선반도(朝鮮半島)와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전파(傳播)된 네 가지 경로는 다음과 같다.

제 일(第一) 경로(徑路)는 이민(移民)이다.
고대(古代) 중국(中國)과 조선반도(朝鮮半島)의 교통은 매우 편리했다.
일본열도(日本列島)는 조선반도(朝鮮半島)를 통하여 동해(東海) 바다를 경유하여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이민을 떠났다.
전설(傳說)에 의하면 기원전(公元前) 11 세기(世紀) 주무왕(周武王) 때 기자(箕子)가 5000여 명의 은상(殷商) 유민(遺民)들을 데리고 조선(朝鮮)으로 이민을 떠났다.
진한(秦漢) 시기(時候)에 전란(戰亂)을 피하여 다수의 중국인(中國人)이 조선(朝鮮)으로 떠났다.
한(漢) 나라 초기(初期)에 위만(衛滿)은 백성들을 데리고 조선(朝鮮)으로 가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중국인(中國人)들이 일본(日本)으로 이민(移民)을 떠난 역사도 유구하다.
중국인(中國人)들이 조선(朝鮮)에 도착한 후 두 가지 경로를 통하여 일본(日本)으로 갔다.
하나는 조선해협(朝鮮海峽)에 있는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갔고 또 다른 루트는 북해도 쪽을 경과하여 일본으로 들어갔다.
기원(公元) 2 3 세기(世紀) 진한(秦漢) 때 수 많은 중국인(中國人)들이 일본(日本)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중 대표 인물(代表人物)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서복(徐福)이다.
서복(徐福)은 진시황(秦始皇)을 속이고 3000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을 데리고 여러가지 공구(工具)와 종자(種子) 등을 가지고 동해를 건너갔다.
"서복동도(徐福東渡)"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서복(徐福)이 일본(日本)으로 갔다고 확실하게 설명은 않했지만 후세 사람들이 민간전설(民間傳說)로써 서복(徐福)은 중국(中國) 상고(上古) 시대에 일본(日本)으로 이민(移民) 간 대표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일본 사회는 채집(采集) 위주(主)의 승문시대(繩文時代)로 부터 농경(農耕) 위주(主)의 이생시대(彌生時代)로 넘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므로 서복이 이끌고 간 중국 이민들은 선진적(先進的) 생산 기술을 일본에 전수해 준 장본인들이었다.
이 점은 일본 학자들도 승인하고 있다.
중국(中國) 이민자(移民者)들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와 수당(隋唐)과 명청(明清) 시대 까지 계속 되었다.
그 중에는 명말(明末) 명 나라의 유명한 사상가(思想家) 주순수(朱舜水)와 은원화상(隱元和尚)도 끼어 있었다.
두번 째 경로는 사절단이다.
기원(公元) 1 세기(世紀)로 부터 기원 7 세기(世紀) 까지 조선반도(朝鮮半島)는 삼국시대(三國時代)이었으며 삼개(三個) 국가(國家)에서는 중국(中國)에 수 많은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당 (唐) 나라 가 건국된 첫해에 백제(百濟)는 20 차례나 사절단을 당조(唐朝)에 파견했으며 신라(新羅)에서는 30 차례 당조(唐朝)에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당 나라에서는 9 차례 사절단(使節團)을 신라(新羅)에 파견하였다.
일본은 기원(公元) 1 세기(世紀) 동한왕조(東漢王朝) 때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하였으며 일본은 오왕시대(五王時代) 때 중국에 진공(進貢)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본(日本)은 내량평안시대(奈良平安時代) 때 부터 대형(大型) 사절단(使節團)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그 당시 중국엔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가 있었다.
일본 사절단은 중국의 경제(經濟)、문화(文化)、제도(制度)、예술(藝術) 등을 배워갔으며 일본(日本) 사회(社會) 진보(進步)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日本) 역사상(歷史上) 제 일 차 (第一次) 개혁(改革)인 대화개신(大化改新)은 사절단들이 배워간 학습을 기초로 하여 진행된 개혁이었다.
이조시대(李朝時代) 초년(初年) 부터 이씨조선에서는 명(明) 나라로 사절단(使節團)을 파견하였으며 모두 300 차례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청조(朝) 때는 이씨조선에서 500 차례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씨조선에서는 대량의 중화문화(中華文化)를 흡수하였다.
세번 째 경로는 유학이었다.
수당(隋唐) 시기엔 일본(日本)과 조선(朝鮮) 유학생(留學生)들이 많지 않았다.
당(唐) 나라 때 국자감(國子監) 안에 신라유학생(新羅留學生)이 200 여 명이 있었고 그중에는 중국(中國)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된 유학생들도 많이 있었으며 그중에는 당조(唐朝) 조정의 관직에 임명된 사람들도 있었다.
송대(宋代)와 원대(元代)와 명대(明代)에는 일본(日本)의 스님(僧人)들이 많이 있었다.
일본의 스님들을 입송승(入宋僧)、입원승(入元僧)과 입명승(入明僧)이라고 각각 칭했다.
네번 째 루트는 무역을 통한  중화문화의 전파였다.
조선(朝鮮)과 중국(中國)의 주요 무역은 조공무역(朝貢貿易)이었다.
일본(日本) 사람들은 송(宋) 나라와 원(元) 나라 때 민간무역(民間貿易)이 성행되었다.
중화문화(中華文化)가 일본(日本)과 한국(韓國)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중화문화(中華文化)가 동아지구(東亞地區)에 전파(傳播) 된 내용(內容)은 다채로웠다.
예를 들면 생산기술(生技術)과 생산도구(生工具)와 문자(文字)와 제도(制度)와 법률(法律)과 경제(經濟)와 사상(思想)과 종교(宗教)와 문학(文學)과 예술(藝術) 등이 있었다.
또 사회풍속(社會習俗)에도 영향을 미쳐 현재 까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기원(公元) 1 세기(世紀)에 한자(漢字)가 조선반도(朝鮮半島)에 전해졌다.
45 세기(世紀)에 한문을 빌려 조선(朝鮮)的의 문자(文字)가 생겼다.
19 세기말(世紀末) 조선(朝鮮)에서는 완전히 한문 만 사용하여 이조실록(李朝實錄)을 완성하였다.
한국(韓國)에서는 1970 년에 한자(漢字) 사용을 금했었다.
현재 한국(韓國)의 학자(學者)들 중에는 한자(漢字) 사용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한자(漢字)의 사용 금지는 문화(文化)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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