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2일 토요일

고대 조선반도 안으로 이민 온 중국 사람들

고대(古代) 중국 대륙 사람들이 조선반도로 이민을 떠난 이유 중에는 전란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생존을 위해서였으며 범법한 자들이 처벌을 받기 싫어서였고 종교를 포교하기 위해서였으며 정치망명도 있었고 외교를 위하여 출사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무역을 하러 이민을 가기도 했고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정착한 경우도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 조선반도로 이민을 간 역사를 관찰하기 위하여 수 천년 전 하상(夏商: 서기 전 21 세기 서기 전 16 세기) 시대와 주(: 기원 전 11 세기 기원 전 221 ) 나라 때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먼저 기원 전 11 세기부터 기원 전 1 세기 기자조선 때 까지 살펴보자. 기원 전 11 세기 말 주무왕(周武王)이 은() 나라를 멸망시킨 후 기자(箕子)는 상() 나라 유민(遺民) 5000여 명을 데리고 조선반도로 도망가 기자조선을 건립하였다. 기자가 조선으로 피신하여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서는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과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와 역림(易林) 등이다. 역림에 보면 조선지지(朝鮮之地), 기백소보(箕伯所保), 선인선가(宣人宣家), 업처자손(業處子孫), 구사대길(求事大吉).”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땅은 기자의 보호 아래 백성들의 각 가정이 화목하였으므로 백성들의 마음에 들었다. 자손들이 번창하고 모든 일들이 대길(大吉)하기를 기원하였다.” 는 뜻이다. 주치중(周致中)의 이역지(異域志)에 보면 조선국(朝鮮國), 고조선(古朝仙), 일왈고려(一曰高麗), 재동북해변(在東北海邊). 주봉기자지국(周封箕子之國), 이상인오천종지(以商人五千從之). 기을무복소(其乙巫卜筮),백공기예(百工技藝), 예악시서(禮樂詩書),개종중국(皆從中國)” 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다시말하면 조선이란 나라는 고조선인데 첫째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동북해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주 나라에서 기자의 나라로 봉했다. 상 나라 사람 5000명이 기자를 따라 갔다. 무당과 점쟁이와 각종 기술자와 음악과 시서 등은 모두 중국에서 가져갔다.” 는 뜻이다.산 해경(山海經)-해내북경(海內北經)에 보면 조선(朝鮮), 금낙랑현(今樂浪縣), 기자소봉야(箕子所封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은 현재 낙랑현 자리에 있었고 기자에게 봉해졌다.” 는 뜻이다. 기자는 상 나라가 망하던 해에 조선으로 도망갔다. 주무왕이 기원 전 1046 년에 상()을 멸했다. 기자는 주나라 통치 밑에서 신민(臣民)으로 살기 싫어서 조선으로 도망가서 조선의 대동강 유역에 정착했다. 즉 평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반도의 서북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또 조선반도의 고대 역사 전적(典籍)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동사강목(東史綱目)인데 삼국유사에 보면 주무왕즉위기묘(周武王卽位己卯),봉기자우조선(封箕子于朝鮮).”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주무왕이 기묘년에 즉위 했는데 기자에게 조선을 봉해 주었다.” 는 뜻이다. 또 이씨조선 때 안정복(安鼎福)의 저서 동사강목에 보면 주무왕십삼년(周武王十三年:紀元前1042),기자수봉우조선(箕子受封于朝鮮), 사십년후기자거세(四十年後旗子去世),향년구십삼세(享年九十三歲).기자능재평양(箕子陵在平壤).”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주무왕 13 년(서기 전 1042 )에 조선을 기자에게 봉해 주었다. 40 년 후에 기자는 향년 93 세로 세상을 마쳤다. 기자의 묘는 평양에 있다.” 는 뜻이다. 조선의 역사 학자 한백겸(韓百謙)의 기전고(箕田考)에 보면 근년재조선평양성남발현기전(近年在朝鮮平壤城南發現箕田),방정유규칙(方正有規則),여중국상조갑골문중적전자상문합(與中國商朝甲骨文中的田字相吻合);매전분사개구(每田分四個區),매구유전칠십묘(每區有田七十畝),여중국은인칠십이조적문헌상일치(與中國殷人七十而助的文獻上一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최근 평양성 남족에서 기전이 발견되었는데 규칙이 방정하다. 고대 중국 상조의 갑골 문자 속의 전(田) 자(字)와 완전히 일치된다. 밭을 전(田) 자(字)와 같은 모양으로 구획하고 매 구획 마다 70 무(畝 :1畝200 )인데 중국의 은인칠십이조의 문헌과 일치한다.” 는 뜻이다.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 때는 고고학상 신석기 시대 중기였다. 조선반도에서 출토된 석부(石斧: 돌도끼)와석족(石鏃: 돌 화살 촉)과 석도(石刀: 돌칼) 등이 있는데 그중에 반월형(半月形) 석도(石刀)는 중국 고대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전형적(典型的) 특징이다. 고고학자들은 대량의 상(商) 나라 백성들이 주무왕(周武王)의 통치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동북 지역을 경유하여 조선반도에 정착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예기(禮記)-단궁상(檀弓上)에 보면 "기자조선재조선반도통치료근일천년(箕子朝鮮在朝鮮半島統治了近一千年). 조선인일직상백(朝鮮人一直尙白), 여기자교민이예의(與箕子敎民以禮義),전잠(田蠶),사작(絲作),은상상백(殷商尙白),대사염용일중(大事斂用日中),융사승한(戎事乘翰),생용백(牲用白).”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기자조선은 조선반도를 일 천년 가까이 통치했는데 조선인들은 유별나게 흰색을 좋아한다. 기자는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뽕 나무를 심어서 명주실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대사가 있을 때 흰 색깔을 사용했고 군대 내에서도 백말을 사용했으며 제사상에 올리는 산제물도 흰 돼지나 흰 소나 흰 양을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였다.” 는 뜻이다. 기자는 은(殷) 나라 왕실의 귀족이었다. 백색을 끊임없이 좋아하는 풍속은 현재 까지 조선 민족들에게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33 권(卷)에 보면 전라도익산군(全羅道益山郡),본마한국(本馬韓國),후조선기준피위만지란(後朝鮮箕準避衛滿之亂),부해이남지한지(浮海而南至韓地),개국잉호마한(開國仍號馬韓),기준성재용화산상(箕準城在龍華山上),속전기준소축(俗傳箕準所築),고명언(故名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전라북도 익산군은 본래 마한국이었다. 조선의 기준왕은 위만의 난을 피하여 한지(韓地)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용화산상에 기준성이 있는데 전해 내려 오는 전설에 의하면 기준왕 때 축성된 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기준성이다.” 는 뜻이다. 또 전국시대 말기에 대량의 중국인들이 조선반도로 옮겨와서 살았다. 조선반도에서 대량의 전국시대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연(燕) 나라와 고조선과 서로 왕래가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진(秦) 나라가 6 국을 통일한 후 통일 전 제(齊) 나라와 연(燕) 나라 사람들이 고역(苦役)에 못이겨 계속 조선반도로 도주하였다. 조선반도로 도주한 사람들을 "연제망명자(燕齊亡命者)" 라고 칭했다. 연제망명자들 중 일부는 조선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다가 진국(辰國)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정착한 지방을 "동계지(東界地)" 라고 칭했다. 진(秦: BC 221 - BC 206 ) 나라 때 백성들의 고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래서 진(秦) 나라 백성들은 진 나라의 고역에 못이겨 조선반도로 탈주하였다.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진한(辰韓)에 보면 진한(辰韓),기노자언진지망인(耆老者言秦之亡人),피고역(避苦役),적한국(適韓國).마한할동계지여지(馬韓割東界地與之),기명국위방(其名國爲邦),궁위호(弓爲弧),적위구(賊爲寇),행주위행상(行酒爲行觴),상호위도(相呼爲徒),유사진어(類似秦語),고혹명지위진(故或名之爲秦韓).”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말하면 진한의 예순이 넘은 노인들은 자신들을 "진지망인(秦之亡人)이라고 칭했다. 다시 말하면 진 나라에서 도망 온 사람이다.” 는 뜻이다. 고역을 피해 조선반도로 이민해 왔으며 마한에서는 동계지(東界地)라고 불리는 곳에 정착하게 도와 주었다. 동계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고 말한다. 모두 같은 뜻인데 진(秦) 나라의 말이며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도 불렀다.” 는 뜻이다. 또 삼국지(三國志)에 보면 ”진한(辰韓),기어언불여마한동(其語言不與馬韓同),유사진인(有似秦人),비단연제지명물야(非但燕齊之名物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진한 사람들의 말은 마한 사람들의 말과 다르고 진 나라 사람들의 말과 비슷하다. 연(燕) 나라와 제(齊) 나라 사람들의 말과 좀 다르다.”는 뜻이다. 즉 진한(辰韓)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어휘는 연(燕) 나라나 제(齊) 나라 사람들의 어휘와 다르므로 이들은 발해 연안에 살고있던 연 나라 사람도 아니요 제 나라 사람도 아니다는 말이다. 또 삼국지에 보면 진한인명낙랑인위아잔(辰韓人名樂浪人爲阿殘).동방인명아위아(東方人名我爲阿), 위낙랑인본기잔여인(謂樂浪人本其殘餘人).낙랑시조선반도예맥인거주지(樂浪是朝鮮半島穢貊居住地).낙랑예맥인(樂浪穢貊人),진한인원고도회거주재중국동남연해일대(辰韓人遠古都會居住在中國東南沿海一帶),기중일지우공원전1000년좌우북상조선반도(其中一支于公元前1000年左右北上朝鮮半島),영일지후대적일부분우공원전200년좌우야진입료조선반도(령一支後代的一部分于公元前200年左右也進入了朝鮮半島),저양(這樣),신래적진한인칭낙랑인위아잔(新來的辰韓人稱樂浪人爲阿殘),취시설아문적잔부(就是說我們的殘部),낙랑인화마한인대타문여친붕화상빈(樂浪人和馬韓人待他們與親朋和上賓),화해상처(和諧相處).”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진한 사람을 낙랑인의 아잔이라고 칭한다. 동방 사람들은 아(我)를 아(阿)라고 말한다. 즉 진한 사람들은 낙랑인의 일부라는 뜻이다. 낙랑은 조선반도의 예맥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다. 그래서 낙랑인을 예맥인이라고도 부른다. 아득한 옛날에 진한(辰韓) 사람들은 중국 동남 연해 일대에 살고 었다. 그중 일 지파는 기원 전 1000 년 경에 조선반도 쪽으로 올라 갔다. 그중에서 또 한 지파는 서기 전 200 년 경에 조선반도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 사람들을 낙랑인의 아잔이라고 칭한다. 그리하여 낙랑인과 마한인은 서로 친구 처럼 또는 귀빈 처럼 대우해 주며 서로 잘 어울린다.” 는 뜻이다. 체질인류학자(體質人類學者)들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 민족과 중국의 동남방 해안 절강성(浙江省) 일대의 인종(人種)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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